소설리스트

파공검제-351화 (350/508)

351. 최후의 한 수

새벽바람이 찼다.

밤새 흩날린 눈발로 땅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마침내 남궁천에게 다가온 당우기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단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남궁천이 무뚝뚝하게 말을 뱉고는 안마당에 집결한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모두 백이십 명.

스무 명이 하나의 대를 이루고 있다.

“인원이 많이 모자랍니다만.”

당우기의 말에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돌아보았다.

‘이 녀석도 연기깨나 하는군.’

정말이지 당우기는 지금 남궁천에게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제삼자가 본다면 그저 적랑단 부단주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과거의 원한은 잊고, 적랑단 부단주로서 새 출발을 하는 자 같다.

하나 남궁천은 알고 있었다.

사람은 절대로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을.

‘뭐, 나처럼 죽다 살아날 정도로 충격적인 경험을 겪는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남궁천이 속내를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싸움은 머릿수로 하는 게 아냐. 머리로 하는 거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 머리로 정말 이해한 건진 모르겠지만.”

남궁천이 일부러 도발을 하며 당우기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당우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깍듯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야, 이 정도로 사람이 달라 보일 수 있다니. 이건 거의 세뇌 수준 아닌가? 하지만 난 속지 않는다.’

남궁천이 그렇게 돌아서는데, 마침 전각 안에서 맹주와 총관이 걸어 나왔다.

“적랑단주, 준비는 끝났는가?”

묵천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남궁천이 그 장단에 어울려 주며 고개를 숙였다.

“예, 맹주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한데 인원이 모자라는 것 같군. 절반도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문제없습니다. 최정예 인력으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천중산에서 사천당가의 지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호오, 사천당가까지. 그거 잘됐군.”

묵천악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회에 천중산에서 사천당가까지 몰살시킬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과가 어디에 있겠나?

그러잖아도 남궁가와 사천당가가 서로 손을 잡은 것이 영 신경이 쓰였는데.

묵천악이 새벽의 찬 공기에도 날카로운 기운을 발하며 서 있는 적랑단원을 둘러보았다.

“출정식을 이왕 화려하게 치르면 사기 진작도 좋겠지만, 이는 비밀리에 수행해야 하는 임무인 만큼 이해를 바라네.”

“물론입니다.”

“하면 총관은 천뇌당에서 보낸 작전을 보여주게.”

“예, 맹주님.”

총관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남궁천에게 다가와 두루마리를 건네주었다.

“적랑단주는 받으시오.”

“예, 총관님.”

남궁천도 예를 갖추고는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가 펼쳐 보니 과연 세세한 전략과 전술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었다.

만약 이 방법이라면 필시 천중산에 집결해 있는 적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듯했다.

‘천뇌당이 괜히 있는 게 아니긴 하군.’

하지만 이 역시 함정일 게 뻔하지 않은가?

남궁천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맹주를 보았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자네를 믿지. 내 한때 자네가 천하대살성의 아들이라 하여 우려를 표한 적이 있으나,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말게나.”

“이해합니다.”

“고맙군. 그럼 꼭 살아서 돌아오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임무 완수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는가?”

“열흘 안으로 해결하겠습니다.”

순간 묵천악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가 곧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 과연 젊은 패기가 좋군.”

“감사합니다.”

당연히 최대한 빨리 끝내야지. 당신 수명이 이제 보름도 남지 않았으니까.

남궁천이 속내를 갈무리한 채 맹주를 빤히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혔다.

잠시 후 묵천악이 고개를 돌려 당우기에게 말했다.

“자네는 앞으로 단주를 잘 보필하여 임무 완수에 차질이 없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맹주님!”

역시나 두 사람은 잠시간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은 후 돌아섰다.

묵천악이 적랑단을 둘러보며 짧게 말했다.

“너희들은 오늘 막중한 임무를 맡고 적의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 출발한다. 부디 간악한 적들을 단죄하고 살아서 돌아오도록.”

“존명!”

백이십여 명의 적랑단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남궁천은 포권을 해 보이고는 돌아섰다.

잠시 후 남궁천을 필두로 적랑단원들이 안마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장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인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서늘한 바람만이 남았다.

총관이 맹주 곁으로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남궁천이 정말 저 작전대로 수행할까요?”

“왜 그런 걱정을 하는가?”

맹주의 물음에 총관이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이 정도까지 왔다면, 이제 저 작전이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면 자네 생각은 남궁천이 어찌 나올 것 같은가?”

“만약 저라면 도중에 회군할 것 같습니다. 빤히 보이는 함정에 발을 들이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짓도 없을 테니까요.”

“허허허.”

모처럼 맹주가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하늘을 보았다.

밤새 눈이 내려서 그런지 하늘은 잔뜩 낮아져 있었다.

언제든 금방 다시 눈을 뿌릴 것만 같다.

맹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분명 남궁천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면…….”

“진천랑은 그러지 않네.”

또…… 시작인가?

총관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나 묵천악은 그런 총관의 반응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두고 보게. 자네 눈에 저 아이가 남궁천으로 보여도, 하는 행동은 내 생각대로 움직일 테니.”

“진천랑이면 어찌 움직입니까?”

“함정인 걸 알아도 임무 수행을 할 것이야.”

“어째섭니까?”

“지금 남궁세가가 많이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정상을 향하기 위해서는 상징적으로 볼 수 있을 만한 공로가 있어야겠지. 진천랑은 이게 그 기회라고 여길 것이야.”

“하나 함정이라는 걸 안다면…….”

“그러니까 더욱 자신할 걸세.”

“예?”

“함정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녀석은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할 걸세.”

“아…… 하면 맹주님께선 그 부분도 염두에 두신 건지요?”

“물론이지. 놈은 흑무련을 소탕하라는 임무는 진행하되, 절대로 그 작전대로 하진 않을 것이야. 그것이 바로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군요.”

“놈은 지금 나를 얕잡아 보고 있어.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고 있지. 하나 그게 바로 빈틈일세. 나는 놈의 전생도 그렇게 죽였으니까.”

어느새 맹주의 두 눈은 불길로 이글거리는 듯했다.

정말이지 남궁천을 진천랑이라고 철저히 믿는 듯했다.

총관으로서는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었다.

‘미친 듯, 미치지 않은, 그러나 또 미친 것 같은…… 기묘함이로구나.’

그가 생각에 빠진 사이 맹주가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향주.”

“예, 맹주님.”

어디선가 비선향주의 대답이 들려왔다.

맹주의 입이 열렸다.

“따라가게. 실수하지 말고.”

“존명.”

다음 순간 비선향주의 기척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맹주가 준비한 세 번째 덫이었다.

이걸로 모든 과정이 끝났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필시 진천랑의 두 번째 죽음이 되리라.

“이걸로 된 거네. 이걸로.”

묵천악이 마치 스스로를 달래듯 그렇게 읊조렸다.

총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제 편히 쉬시지요.”

“그래야지.”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자, 총관이 넌지시 말했다.

“혹…… 결과가 생각대로 나오지 않더라도…….”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절대로. 진천랑이 흑무련과 남몰래 손을 잡은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렇군요.”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가 이만큼 확신한다는 건 그렇게 흘러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었다.

“그만 들어가지. 바람이 차군.”

“예, 맹주님.”

두 사람이 눈을 밟으며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 * *

무한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 잡은 폐가.

부서진 창문으로 싸락눈이 흩날리며 들어오는데도, 창가의 탁자에 앉은 두 사람은 각각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은 황랑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백묘였다.

두 사람은 탁자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백묘가 부채를 살랑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장기 두던 사람이 오줌이라도 싸러 갔나?”

“닥쳐라, 이년아. 날도 추운데 뭔 부채질을 하고 자빠졌어?”

“우리 영감님, 나이 드시니 뼈마디가 쑤시나 보군요. 그러게 장기는 뭐 하러 두자고 하셔서는. 침상에 가서 드러누우시지.”

“주둥이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라.”

“하여튼 성질머리 더러운 영감탱이라니까.”

“뭐야?”

“호호. 장기 두다가 살수 쓰게 생겼네. 이왕이면 날 따뜻한 날 양지바른 곳에 묻히는 게 좋지 않겠어요? 지금 파묻히기엔 너무 추울 것 같은데.”

“이 계집년이 뒈지려고 환장했구나.”

후우우우웅!

순간 뜨끈한 기운이 훅 불어나가면서 황랑의 장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마주 앉은 백묘가 배시시 웃는다.

“아아, 따뜻해. 그거 좀 더 해줘요.”

“이 계집이!”

콰창!

순간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친 황랑이 벌떡 일어났다.

백묘가 미간을 곱게 찡그리며 말했다.

“어…… 이러면 판 깨는 건데. 내가 다 이긴 장기를 이런 식으로 깨버리시네.”

“오냐, 내가 오늘 네년을…….”

끼이이익.

마침 낡은 문짝이 열리면서 폐가 안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들어서는 바람에 황랑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백묘가 피식 웃으며 황랑을 보았다.

“그만하시죠? 적서도 왔는데.”

“쳇, 정나미 떨어지는 계집년.”

“고마워요. 영감이랑 정나미 붙어봐야 좋을 게 뭐 있다고. 호호.”

“이익!”

황랑이 발끈하자, 이번엔 적서가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볼멘소리를 냈다.

“그만하고. 또 왜 불렀소?”

“흥, 이년이나, 저놈이나 까칠하긴 매한가지군. 무림맹 총관 나리께서 하찮은 마교 나부랭이들이 부르니 화가 나셨나?”

“비꼬지 말고 말하시오. 내 일이 그리 한가해 보이오?”

“말하는 싸가지 보소. 어휴,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황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백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무 짜증 내지 말아요, 적서. 지금 영감님은 저한테 내기 장기에 져서 이런답니다.”

“지긴 누가 져! 판이 깨졌으니 무효다!”

“누가 판을 깼더라?”

“흥! 어쨌거나 판이 깨졌으니 무효다!”

두 사람이 다시 옥신각신하자 총관이 미간을 푹 찡그렸다.

“그만들 하시고. 왜 불렀소?”

“왜 부르긴? 남궁천이 적랑단주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할 게 아닌가!”

“맹주의 명령으로 천중산으로 떠났소.”

“천중산으로? 그새 적랑단을 꾸렸단 말이야?”

“완벽하진 않으나 용케도 백이십 명을 모았소.”

“허허, 강호신룡이 허명은 아니군. 그래서? 자네 생각에 어찌 될 것 같은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총관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오.”

“그게 뭔데?”

“만에 하나 남궁천이 이번 임무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그런다면? 아, 뜸들이지 말고 빨랑 말해!”

“흐음. 맹주님의 운명은 거기까지라고 보면 될 거요.”

“호오. 그 맹주가 끝을 보인단 말이야? 남궁천 그 녀석 정말 대단한 놈일세. 그나저나 이 지경이 되어서도 자네는 끝까지 맹주에게 ‘님’ 자를 붙이는군.”

“적을 속이기 전에 나를 속여야 하니까. 그게 은마령이니까.”

짝짝짝.

황랑이 박수까지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 역시 대단해. 가끔 보면 은마령이 지상 최고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것 같다니까.”

“그만 비꼬시오.”

“어쨌거나 드디어 맹주가 최후의 한 수를 던졌단 말이군.”

“그렇소.”

“그래서, 자네 생각에 남궁천이 살아 돌아올 것 같은가?”

“그럴 리가 없소.”

“그럼 끝났군? 앞으로 좀 더 맹주에게 붙어서 잘 감시하면 되겠어.”

총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내심 떠오르는 불안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남궁천이 살아서 돌아올 것만 같지?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평생 간자로 살아온 은마령 적서의 감각은 꽤나 정확한 편이다.

그래서 총관은 더욱 불안한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그런 총관을 백묘가 가만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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