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50화 (349/508)

350. 성격 더러운 놈들

저벅.

남궁천이 한 걸음 내딛자 비선향원들이 일제히 그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묵천악이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처척!

비선향원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더니 이내 귀신처럼 자취를 감췄다.

“후우우.”

묵천악이 긴 숨을 토해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의 일격으로 내상을 꽤 심하게 입은 것인지 입술은 퍼렇게 질려 있었고, 안색은 하얗게 뜬 상태.

하나 묵천악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무거운 목소리를 흘려냈다.

“과연 남궁가의 희망이라 할 만하군. 자네의 무위에 탄복했네.”

“과찬이십니다. 맹주님께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으셨다면 결과는 또 달랐을 겁니다.”

“굳이 겸양을 갖출 필요는 없네. 이미 자네가 후기지수를 뛰어넘어 어지간한 기성 무인들도 상대하기 힘들 정도라는 걸 잘 알았네. 패력궁이 자네에게 적랑단주 자리를 양보한 이유가 있었군.”

“하찮은 재주를 높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묵천악이 피식 웃고는 소매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그러고는 총관의 손에서 팔을 빼내고는 혼자 힘으로 서서 잠시 운기에 집중했다.

짧은 시간 대략의 운기를 마친 묵천악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총관을 돌아보았다.

“가서 적랑검을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적랑검이란 적랑단주에게 하사하는 일종의 상징이 담긴 검이었다.

딱히 명검이나 보검은 아니지만, 임명식 때는 늘 사용되는 장식용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총관이 붉은 빛깔의 적랑검을 가지고 돌아왔다.

총관이 적랑검을 받아 들고는 남궁천을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까이 오게. 이제부터 임명식을 거행하겠네.”

“영광입니다.”

남궁천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꾸하고는 묵천악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묵천악이 검집에서 검신을 뽑아냈다.

차아아앙!

매끄러운 쇳소리에 이어 불그스름한 빛을 뿜는 적랑검이 묘한 기운을 발했다.

척!

묵천악이 손을 뻗어 검신을 남궁천 목 가까이에 들이댔다.

지이이잉.

검신이 미미하게 떨리면서 희미한 울음을 터뜨렸다.

묵천악의 미간이 슬쩍 좁혀진다.

이 광경을 총관이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다.

꿀꺽……!

‘맹주님. 이성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묵천악은 아주 잠깐 이대로 검신에 공력을 실어 남궁천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검신을 뽑아서 차기 단주의 목 곁에 들이대는 행위는 일종의 상징성이었다.

단주로서 목숨을 걸고 맹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이 과정에서는 차기 단주가 무방비의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남궁천의 목을 그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나 그랬다간…….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게 무너질 테지.’

지금 남궁세가는 너무 커버렸다.

손쉽게 제거하고 적당한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철저하게 계획한 대로 신중히 처리해야 하리라.

이를 악물고 살기를 억누른 묵천악이 씹어뱉듯 말했다.

“남궁천.”

“예.”

“그대를 적랑단주로 임명한다. 앞으로 그대는 적랑단주로서 최선을 다해 강호를 지켜주길 바란다.”

“맹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남궁천이 정해진 답을 하는 순간 묵천악이 검신을 들어 올려 검집에 갈무리했다.

철컥.

“후우우.”

총관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묵천악이 적랑검을 거꾸로 쥐고는 남궁천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적랑검을 받아 든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묵천악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부단주를 임명하겠네.”

“대기하겠습니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상했던 바다.

예전에는 부단주 임명권이 적랑단주에게 있었지만, 묵천악이 맹주가 되고 나서부터는 그 관례가 바뀌었다.

적랑단주에게 막강한 무력이 주어지는 만큼, 적당히 견제 역할을 겸할 의도로 맹주가 직접 부단주를 임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맹주가 임명할 부단주라면…….

“들어오거라.”

묵천악의 부름에 맹주전 한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남궁천의 입매가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역시…… 그런가?’

이젠 놀랍지도 않다.

맹주의 비열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나 할까?

남궁천을 향해 살벌한 눈초리를 보내며 들어선 자는 다름 아닌 당우기였다.

당우기가 맹주 앞에 다가와 포권을 했다.

척!

“당우기가 맹주님을 뵙습니다!”

“자네를 부단주로 임명하겠네. 자네는 앞으로 적랑단주 남궁천을 도와서 강호의 평화를 지키도록 하게.”

“귀한 자리에서 막중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우기가 돌아서서는 남궁천 옆으로 다가섰다.

묵천악이 남궁천을 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마침 자네가 사천당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아서 당우기를 부단주로 임명했네. 두 사람이 제법 호흡을 잘 맞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남궁천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뭐, 괜찮습니다. 이 녀석이 성격은 더러운 놈이지만 잘 길들여 보지요. 맹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강호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한층 수월해질 것 같습니다.”

의외로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묵천악의 눈자위가 가늘게 떨렸다.

‘객기를 부리는 것인가?’

뭐, 상관없다.

어차피 남궁천과 당우기의 사이가 견원지간이라는 건 너무나 분명하니까.

아마 당우기와 함께 다니는 내내 남궁천은 불안감에 시달리리라.

지금도 당우기는 노골적으로 남궁천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남궁천이 당우기를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대주는 제가 임명해도 되는 거죠?”

“그렇네.”

이 부분은 효율적인 조직력을 위해 맹에서 보장해 주는 부분이었기에 맹주가 개입할 수 없었다.

다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빠르게 조직을 정비해 주길 바라겠네. 참고로 적랑단은 단주와 같은 소속 문파의 일원을 일 할 넘게 고용할 수는 없다네. 타 문파는 이 할까지 채울 수 있고.”

즉, 적랑단 삼백 명 중 서른 명까지만 소속 문파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역시 적랑단주에게 편향된 힘을 실어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학관에서 다 배운 내용이니까요.”

“그렇군. 통상적으로는 적랑단에 임명되면 조직을 정비할 시간을 보름 정도 부여하네. 하나 이번에는 시기가 엄중한 만큼 보다 빨리 정비해야 할 걸세.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은 흑무련의 난으로 어지러운 시기가 아닌가?”

“물론입니다. 최대한 빨리 정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군. 하면 사흘의 시간을 주지. 그때까지 조직을 완전히 정비하고 첫 임무를 수행해주게.”

옆에서 듣고 있던 총관이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적랑단을 정비하는 데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니?

절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보름의 정비 시간을 준 것도 단주만 바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적랑단원은 그대로인데 누군가 단주로 승격이 되거나, 새로 임명되었을 때만 그 적응기로 보름의 기간을 준 것이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적랑단원이 초토화된 상태다.

한마디로 조직을 밑바닥부터 아예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고작 사흘이라니?

단원만 해도 삼백 명에 달하는데, 남궁세가 사람들로 서른 명을 채운다고 해도 이백칠십 명을 모집해야 하는 상황.

억지로 삼백의 인원을 맞춘다고 해도 조직력이 갖춰질 리가 없다.

자칫하면 오합지졸로 덩치만 큰 애물단지 집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총관은 당연히 남궁천이 난색을 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남궁천이 싱긋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충분하군요. 사흘 안에 정비를 끝내겠습니다.”

“…….”

묵천악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필시 당황해서 말도 잇지 못하리라 여겼는데…….

’뭐? 충분해?

조직을 정비해 본 적이 없어서 뭘 모르는 건가?

아니면 역시 객기인가?

진천랑은 거친 인생을 살았다.

하나 평생 혈혈단신으로 도망만 다닌 자다.

아주 잠깐 남궁선이 그와 함께 동행했지만, 평생 혼자 지낸 적이 더 많은 녀석이다.

그런데 사흘 안에 삼백의 인원을 채우겠다고?

맹주가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어찌 아들의 몸으로 환생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그 대답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네놈의 그 저주받은 운명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갈무리한 묵천악이 내친 김에 임무까지 내렸다.

“사흘 후에는 곧바로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해야 하네. 지금 바로 명령을 내릴 생각인데 괜찮겠나?”

“명 받들겠습니다.”

“좋아. 확실히 젊어서 그런지 각오가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자네가 이번에 맡을 임무는 천중산(天中山)에 집결해 있는 흑무련의 세력을 소탕하는 것일세.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되는 만큼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걸세.”

“알겠습니다.”

“참고로 자네에게 많은 시간을 줄 수가 없네. 한시가 급한 문제인 만큼 사흘 후에는 바로 떠날 수 있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미안하군. 적랑단주로 선발되자마자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겨서. 그러나 시간이 없으니 이해해 주게.”

“물론이죠.”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물론 이해하고말고.

보름 안에 내 누명도 벗기고, 당신도 죽여야 하는데 너무 시간을 허비할 수 없지.

남궁천이 속내를 갈무리하며 포권했다.

“그럼 믿고 맡겨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강호 평화를 지키겠습니다.”

“고맙네.”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물론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품으며.

‘이렇게 순순히 제 발로 사지로 가준다니 고맙고말고.’

* * *

“부르셨습니까? 주군.”

신룡객잔 특실로 손우곤이 찾아와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창응대를 소집해야겠다. 잠깐 어딜 좀 다녀와야겠어.”

“어딜…… 말씀입니까?”

“흑무련과 싸우러.”

“어…… 그럼…… 전쟁하러 가는 것 아닙니까?”

“뭐, 정사 간의 싸움이니까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것치곤 너무 별거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는데요? 뒷골목 파락호 때려잡으러 가자는 것처럼 들립니다.”

“별거 아니게 될 거야. 후딱 갔다 와야지. 맹주에게 남은 날이 얼마 없으니까.”

“혹시 이번 임무가 맹주의 마지막 한 수인 겁니까?”

“맞아. 더 이상 맹주가 할 건 없을 거다. 한마디로 이제 마지막 패를 쥐고 있는 건 나란 뜻이지.”

“흐음. 위험하지 않겠죠?”

“위험하면? 안 하려고?”

“그럴 리가요. 더욱 신경 쓰기 위함이죠.”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흑선보는?”

“정예 예순 명을 추려두었습니다.”

“수고했군. 살곡은?”

“스무 명까지 추려두었습니다.”

“좋아. 그럼 총 인원이 몇 명이지?”

“창응대와 불명회 무인을 포함해서 총 백이십 명입니다.”

“그 정도면 됐어. 앞으로 손 대주는 적랑단 일 대주다.”

“명 받들겠습니다.”

“비량 교관님이 이 대주. 그리고 유현과 팽수혁, 진소홍과 윤종승이 차례로 대주를 맡을 거야.”

“저보다는 비량 교관의 무위가 더 높을 겁니다.”

“알아. 하지만 부려먹기는 손 대주가 더 편해서 그래.”

“아…… 예.”

“사흘 후에 바로 비밀리에 출정식을 가진 다음 천중산으로 떠난다. 그때까지 맹으로 집결할 수 있도록 하고. 당가에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천중산으로 오라고 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직이 뇌까렸다.

“이젠 내가 마지막 한 수를 둘 차례야. 하지만 이 큰 그림의 화룡점정을 찍을 자는…….”

* * *

“당우기가 될 수도 있네.”

맹주의 말에 총관이 눈치를 살피다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그를 부단주로 임명하신 겁니까?”

“그렇네. 흑무련이 실패해도 당우기가 마지막 용의 눈을 찍을 터.”

묵천악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야비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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