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48화 (347/508)

348. 성격 더러운 놈들

“남궁천을…… 말씀이십니까?”

총관이 넌지시 눈치를 살피며 묻자, 맹주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어차피 임명식을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임명식 때 직접 확인해 볼 것이 있네.”

총관이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무엇을 확인하신다는 건지…….”

묵천악이 매서운 눈길로 돌아보자, 움찔거린 총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자네는 이제 날 믿지 못하는가!”

“절대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맹주님을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하면 나를 기만하는 것인가!”

“기만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

“한데 어째서 남궁천이 진천랑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야!”

총관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녕 이렇게까지 무너지신 건가?’

물론 묵천악은 전혀 무너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냉철한 판단력으로 남궁천을 지켜본 셈이다.

그 결과 진천랑의 환생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누가 믿을까?

묵천악으로서는 정말이지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총관이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맹주님. 최근 너무 많이 신경을 쓰셨습니다. 의원이라도 불러 진맥을 하시어 약이라도 한 재…….”

“갈! 자네는 날 미친놈 취급하는군!”

털썩, 쿵!

총관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땅에 박으며 소리쳤다.

“그런 불경한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소신은 맹주님이 지나치게 신경을 쓰시면서 몸과 마음이 다소 지쳐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제가 미덥지 못하다면 차라리 그 검으로 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묵천악이 부들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놈은 분명 진천랑이었다! 평생 그놈을 쫓았어! 다른 놈들을 다 속여도 내 감각만은 절대 속이지 못한다. 나는 그놈 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어!”

“하나 진천랑은 분명 맹주님의 손에…….”

“그놈의 호흡! 그놈의 표정! 그놈의 눈빛! 그놈의 말투! 그놈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내 뇌리에 박혀 있단 말이야! 난 평생 그놈을 연구했다! 누구보다 진천랑을 내가 잘 알아!”

이제 맹주의 외침은 거의 광기에 가까워 보였다. 전신에서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살기가 숨 막히도록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저러다 주화입마에 걸리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맹주님, 부디 고정하시고…….”

“그만! 듣기 싫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그놈이 마공을 익혔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마교의 이혼대법을 염두에 두신 거군요.”

“마교의 술법은 기상천외한 것이 많다고 들었다. 진천랑이 언제 어느 틈에 그런 술법을 이용한 것인지 알 수 없지!”

총관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주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니다.

하지만 역시 가능성이 낮다.

그런 식으로 이뤄지는 이혼대법이라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묵천악이 씹어뱉듯 말을 이어갔다.

“임명식 과정 중에 대검식(對劍式)을 통해 반드시 증명해 보이지!”

“아…….”

총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적랑단주나 청랑단주처럼 고위직 무인을 임명할 때는 대검식이라는 절차가 있다.

이는 맹주와 가볍게 손을 섞는 행사인데 비무라기보단 그저 형식적인 관례에 지나지 않았다.

“대검식의 진정한 의미는 자질 검증이다. 그 뜻을 바로 세울 때도 된 게지.”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임명식은 비공개로 진행하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총관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묵천악의 눈이 시린 빛을 뿜어냈다.

‘놈은 필시 마공을 익혔다. 궁지에 몰리면 본색이 드러날 터. 진천랑, 네놈이 천하를 속여도 나는 속일 수 없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내가 옳다! 네놈의 수작질을 내 반드시 밝혀주마!’

총관이 자리를 뜨려다가 멈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묵천악이 그런 총관을 힐끔거리고는 쏘아붙이듯 물었다.

“할 말이 있는가?”

“저어…… 만에 하나 남궁천이 마공을 익힌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실 건지…….”

“죽여야지.”

“예?”

“마공을 익혔다면 그걸 빌미로 죽일 것이고, 마공을 밝혀내지 못하면 예정대로 불가능한 임무를 주어 죽일 것이다.”

“최후의 수단을 쓰실 생각이군요. 그럼 그것도 준비해 두겠습니다.”

묵천악은 대답 대신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총관은 뭐라고 입을 열려다가 그냥 돌아섰다.

빈방에 홀로 남은 묵천악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진천랑. 네놈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 넌 결코 날 이기지 못할 것이다! 결코!’

까드득!

* * *

꿀꺽!

남궁화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궁검과 남궁천은 지금 눈을 감은 채 서로 손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손바닥에서 미묘한 기운이 팽창했다가 수축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슈우우우욱.

이내 쟁쟁하던 기운이 두 사람의 몸 안으로 갈무리되면서 후끈 달아올랐던 열기가 차츰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후우우우.”

남궁천이 긴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남궁검 역시 천천히 눈을 떴다.

긴장한 채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남궁화가 다그치듯 남궁검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떠셨어요?”

남궁검이 눈살을 슬쩍 구기더니 이내 놀랍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과연 대단하구나. 마기를 이렇게까지 갈무리하다니. 새로운 경지를 본 것 같구나.”

“과찬이십니다.”

남궁천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남궁화가 두 손을 모아 쥐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정말 다행이에요!”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말 많은 노력을 했구나. 아무리 창벽공이 진정한 제왕의 심공이라지만, 질적으로 다른 기운을 품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인데.”

“대비를 해야죠. 지금으로선 맹주가 절 적랑단주로 임명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니까요. 그럼 분명 대검식을 이용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겠지. 원래 대검식은 일대일의 비무로 진행하는 것이지만, 그 맹주가 어찌 나올지 알 수가 없구나.”

“아마 비선향을 이용할 겁니다. 호신위들까지 끼어들지도 모르고요.”

“그럼 결코 쉽지 않을 거다. 네 경지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초절정의 고수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형국이다.”

“그래서 아예 그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의심도 말끔히 제거할 방법으로 내공 대결을 생각 중입니다.”

“과연. 그래서 나를 불러 시험해달라고 한 것이구나.”

“예, 할아버지.”

“허 참.”

남궁검이 실소를 짓고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전히 다른 사람이 보면 냉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지만, 남궁화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저 눈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온정을 듬뿍 담고 있다는 것을.

어찌 그러지 않겠나?

남궁천이 부활하고 나서 모든 게 바뀌었는데.

쓰러져 가던 남궁세가는 어느새 강호인들의 칭송을 받는 가문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특히 이번 사건을 통해서 남궁세가는 명실상부한 명문세가로 자리매김한 셈이었다.

아직 천하제일가문의 위용을 자랑하던 전성기만큼은 아니라지만, 이젠 얼마든지 솟아오를 가능성이 보인다.

게다가 넉넉한 자금까지 확보했으니 앞으로 두려울 게 무엇인가?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른다더니. 아직도 삶을 깨우치지 못했구나.’

남궁검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척이 들리더니 손우곤이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남궁검의 물음에 손우곤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맹주가 적랑단주 임명식을 진행하겠다고 합니다.”

“과연.”

남궁검과 남궁화는 다시 한번 감탄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모든 일이 남궁천의 예상대로 착착 맞아 돌아가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남궁천이 불쑥 나서며 물었다.

“임명식은 당연히 비공개겠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능구렁이 속셈이야 부처님 손바닥이니까.”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며 남궁검을 보았다.

“이마저 통하지 않으면 맹주는 제게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려고 할 겁니다. 그게 최후의 한 수겠지요. 그리고 저는 그걸 이용해서 맹주를 완전히 파멸시킬 생각입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그 영감탱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저거든요.’

* * *

원래대로라면 정식으로 대연무장에서 임명식이 거행되었겠지만, 지금 묵천악은 맹주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저만치 맹주전 입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무림맹에 들어서서 맹주전까지 오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각을 지나며 높은 계단을 쉼 없이 올라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심리적으로 이방인이 된 느낌을 지우기 힘들어진다.

묵천악은 이 부분을 노린 것이었다. 아무래도 낯선 공간을 느끼게 해서 조금이라도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하려는.

마침내 맹주전 입구에서 남궁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묵천악이 입매를 슬쩍 틀어 올렸다.

“어서 오시게. 강호신룡.”

“와아, 높네요. 맹주전은 처음 와봅니다.”

남궁천이 해맑게 대꾸하자, 묵천악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천하를 굽어 살피기 위한 자리라는 뜻이겠지.”

“천하를 발아래 두겠다는 뜻은 아니겠죠?”

“…….”

“하하! 농담, 농담.”

남궁천이 손을 저으며 너스레를 떤다.

묵천악이 냉소를 짓고는 한 걸음 나섰다.

“원래라면 대연무장에서 적랑단주 임명식을 거행해야 하지만, 지난번 불미스러운 일도 있고 해서 다소 간소하게 진행하는 점을 이해하시게.”

“별말씀을요. 거추장스러운 행사는 간소할수록 좋죠.”

“이해해 준다니 다행일세. 하면 바로 대검식을 시작할까?”

“바로요? 뭔가 되게 급하시네요.”

“허허. 강호의 정세가 불안하니 내 마음도 급해지는 모양일세.”

“뭐, 그러시겠네요. 제가 맹주님이었어도 똥줄이 탈 것 같거든요. 혹시 막 밤에 악몽도 꾸고 그러지 않으세요 ? 전 쫓기는 마음일 때는 가끔 그러더라고요.”

이 새끼 역시……!

묵천악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그러자 총관이 헛기침을 하며 한 걸음 나섰다.

“남궁 소협. 맹주님께 예를 갖추게.”

“아, 실례였던가요? 저는 그저 공감을 표현한 건데. 왠지 맹주님이라면 제 마음도 잘 공감해 주실 것 같아서.”

남궁천이 이를 드러내며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럴수록 묵천악의 눈에는 진천랑이 보였다.

‘저놈은…… 저놈은…… 틀림없다! 총관! 자네는 저놈의 얼굴에서 그 녀석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정녕 저 녀석의 얼굴은 나만 보고 있단 말인가!’

묵천악이 무심결에 총관과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역시나 덤덤할 뿐이었다.

‘오냐, 그렇다면 내 반드시 저놈의 진면목을 까발리리라!’

차아앙!

순간 묵천악이 검을 뽑아 들자 전신에서 뜨끈한 기운이 사방으로 불어 나갔다.

남궁천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우씨, 깜짝이야. 아, 죄송. 너무 놀라서 그만. 아니, 뭐 대검식을 원래 그렇게 죽일 듯이 하는 겁니까?”

“대검식의 본래 의미는 단주로 임명된 자가 무위를 증명하는 것일세. 엄중한 시기인 만큼 그 뜻을 되살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일세.”

“흐음.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죠.”

남궁천이 성큼 나서자, 이번엔 주변으로 그림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슈슈슈슈슉!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대검식이라면서요? 일대일 아닙니까?”

“말했다시피 시기가 엄중하지 않은가? 이 정도는 자네가 버텨내야 할 것 같아서 말일세.”

“역시 꼼꼼한 맹주님이시군요.”

“자주 듣는 말이지.”

“알겠습니다. 한 명을 상대로 이러는 게 좀 치사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만큼 절 대단하다고 인정하시는 것 같으니 넘어갈게요.”

묵천악이 냉소를 흘렸다.

“이해심이 넓군.”

“제가 원래 좀 이해심이 넓습니다.”

“그래서 날 구해준 것인가?”

“아뇨?”

남궁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묵천악이 미간을 슬쩍 구겼다.

“하면?”

“그야 맹주님은 비싼 분이니까요.”

암, 비싸고말고.

당신이 얼마짜린데.

하나 맹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 진정한 속뜻을 모른 채 그저 ‘귀한 분’을 표현했다고만 생각했다.

묵천악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면 이제부터 차기 적랑단주의 무공을 견식해 볼까?”

그러자 남궁천이 턱을 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흐음. 그러다 처맞으면 많이 아플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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