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대가리 박으시죠
“크익! 노오오오옴!”
격분한 묵천악이 눈을 뒤집으며 저도 모르게 일장을 뻗어냈다.
남궁천이 얼른 장을 뻗으며 받아냈다.
퍼어어엉!
“크읏!”
공력에 떠밀린 묵천악이 주춤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맹주님!”
화들짝 놀란 총관이 맹주에게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물러서라! 내 오늘 저놈을 반드시 죽여야겠다!”
“고정하십시오, 맹주님! 남궁천 소협이 맹주님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구해? 저놈이 나를 구해? 어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리고 말하지 않았는가! 저놈은 진천랑이야!”
“맹주님…….”
“비켜라!”
“맹주님, 고정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총관이 전에 없이 크게 소리치며 묵천악 앞을 가로막았다.
격하게 흔들리던 묵천악의 눈동자가 그제야 조금씩 자리를 찾아갔다.
씨근거리는 묵천악이 눈길을 돌려 관중석을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총관의 말대로 많은 사람이 귀빈석 쪽을 바라보면서 수런거리고 있었다.
“방금 뭐야? 맹주님이 강호신룡을 기습하지 않았나?”
“에이, 그럴 리가. 워낙 경황이 없어서 적으로 오인을 하셨겠지.”
“맹주님 정도 되시는 분이 적아를 구분 못 한다고?”
“그만큼 강호신룡도 보통이 넘는 무인이 아닌가?”
“하긴. 그것도 그렇군.”
“지금은 안 싸우잖아?”
확실히 조금 전의 일격이 사람들에게는 의아한 구석이 있는 장면이었다.
묵천악이 심호흡을 하고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읊조렸다.
“내가…… 실수를 했군.”
그제야 총관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위험하니 몸을 피신하십시오.”
“나는 괜찮네.”
“하지만…….”
“총관. 괜찮다고 했네.”
“……알겠습니다.”
총관이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나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휘유. 간 떨어질 뻔했어요. 저는 또 맹주님이 절 죽이시려는 줄 알았어요.”
‘저 간악한 놈!’
묵천악의 미간이 다시 팍 구겨졌다.
정말이지 어찌나 능청스럽게 말을 뱉는지 조금 전의 말이 자신의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묵천악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남궁천에게 다가가 조용히 뇌까렸다.
“어째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냐? 설마 마교의 대법이라도 사용한 것이더냐?”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혹시 조금 전에 머리라도 얻어맞으신 건가요?”
“뭐라?”
“저는 도대체 맹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총관 쪽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좀 달래달라는 표정이었다.
총관이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갔다.
“맹주님, 부디 진정하십시오. 지금 여기 서 있는 사람은 맹주님을 구한 남궁 소협입니다.”
“총관은 끼어들지 말게.”
“하지만 맹주님, 더 이상 실수를 하시면…….”
“총과아안!”
순간 묵천악이 사자후를 터뜨리자 귀빈석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바람에 귀빈석에 난입해서 사투를 벌이던 흑의인들도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호신위들이 기세를 끌어 올려 흑의인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묵천악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남궁천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네놈은……!”
그때였다.
쒸에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빛살처럼 날아드는 화살 한 대!
푹!
“꺼억!”
묵천악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날아간 화살이 옆에서 달려들던 흑의인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었다.
비무대에 있던 천무류가 활을 쏴서 흑의인을 명중시킨 것이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으음. 무슨 오해를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대화하시죠? 지금은 나쁜 놈들이 득실거리니까요.”
그러더니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날려 흑의인들에게 벽라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촤아악! 촤악!
“크악!”
“으아아악!”
일검마다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동작 하나하나가 매섭기 짝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베는 건 흑의인인데 살기는 이쪽을 향해 날아드는 것만 같다.
지금도 그렇다.
‘방금 저 눈! 분명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남궁천은 흑의인들을 베면서도 이따금씩 맹주를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마치 너도 언젠간 이렇게 죽여주겠다는 듯.
하나 지금 수많은 관중과 총관을 비롯한 수하들의 생각은 달랐다.
남궁천이 진정 맹주를 구하기 위해 살신성인의 자세로 겁 없이 뛰어들어 싸우는 것으로만 보였다.
일검에 일살.
좁은 지역에서 벽라검을 휘두르며 검무를 추니 그야말로 사신이 따로 없다.
묵천악이 눈자위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야말로 기묘한 상황.
남궁천은 지금 묵천악을 지키기 위해 혈향이 피어오르는 검무를 추고 있었다.
하나 검로에 묻은 살기가 묘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다.
‘진천랑……! 네놈은 어째서 죽지도 않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더냐? 어째서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것이더냐!’
‘후후. 맹주, 뭘 그리 쫄고 그러시오? 이제부터 당신은 내가 평생을 느꼈던 고독을 느끼게 될 거요.’
‘진천랑! 네놈은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 네놈은 내 손바닥이다! 평생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맹주, 이제 당신의 시대는 끝났소. 두고 보시오. 지금부터 당신을 처절하게 몰락시킬 테니까.’
촤아아아아악!
섬광이 터지면서 핏줄기가 튀어올랐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흑의인이 남궁천의 벽라검에 쓰러졌다.
“크윽……!”
쿠웅!
귀빈석은 이제 시체더미가 쌓여 발 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호신위들은 빠르게 주변을 살피고는 안전을 확인한 후 귀신처럼 모습을 감췄다.
상황이 이리 되자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관중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강, 강호신룡이 맹주님을 구했어.”
“맙소사, 저 많은 흑무련 놈들을 도륙하다니.”
“애초에 흑무련을 찾아낸 것도 남궁세가 사람들이었잖아? 게다가 남궁천은 폭멸고독마저 파훼해 버렸고.”
관중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다가 이내 누군가 소리쳤다.
“남궁천이…… 강호신룡이! 맹주님을 지켰다!”
그는 다름 아닌 불명회원이었다.
한 사람이 그렇게 고함을 내지르자, 관중들의 흥분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함성에 가까운 외침이 이어졌다.
“우아아아! 남궁천 만세! 강호신룡 만세! 무림맹 만세!”
“남궁세가 만세!”
“남궁천과 남궁세가는 무림맹의 홍복이다!”
“강호신룡이여, 영원하라!”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함성이 이어졌다.
맹주의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멍청한 것들이 뭘 안다고!’
총관이 그런 맹주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어…… 맹주님. 비무는 어떻게……?”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어서 결론을 짓게!”
“크흠. 알겠습니다.”
총관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총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함성을 내지르던 사람들이 웅성임을 멈추고는 이목을 집중했다.
총관이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관중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비무 도중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것을 사과드립니다. 다행히 간악한 사도 무리들은 모두 제압되었으니, 여러분은 부디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그 전에 비무의 결과가 나왔으므로 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적랑단주 선발전 최종 우승자는 패력궁 천무류 대협입니다!”
관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내왔다.
하지만 이미 남궁천의 활약으로 뭔가 기운이 빠진 반응이었다.
여느 때처럼 열광적인 함성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사실 관중들은 이제 우승자가 누구인지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들의 뇌리에 남은 것은 오로지 하늘을 날듯이 이동한 남궁천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맹주를 구한 장면이었다.
천무류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불쑥 손을 들어 올렸다.
갈채를 보내던 관중들이 동작을 멈추고는 천무류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천무류가 쓴웃음을 지으며 관중들을 둘러보았다.
“적랑단주의 임무는 사마외도를 척결하고, 본 맹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아니겠소? 오늘 나는 진짜 적랑단주가 될 적임자의 들러리 역할에 지나지 않았소. 하여 나는 적랑단주의 자리를 정중히 사양할 생각이오.”
“……!”
총관이 흠칫거리고는 얼른 맹주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묵천악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분노로 뺨까지 부들거렸다.
‘저 멍청한……! 그 이상 떠벌리지 마라! 천 각주!’
무언의 압박을 담은 시선으로 뚫어질 듯 노려보았지만, 정작 천무류는 맹주의 시선 따위는 보지도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오. 누가 진정 적랑단주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오늘 맹주님을 구하고, 본 맹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나섰으며, 간악한 사도 무리를 척살한 자가 누구요?”
“남궁천!”
“남궁 소협입니다!”
“강호신룡이오!”
여기저기 관중들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함성처럼 목소리가 커져갔다.
천무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번 비무도 엄밀히 따지자면 나의 승리라고 할 수 없었소. 남궁천 소협은 아직 내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소. 오히려 승패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맹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소. 장외실격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지.”
말을 이어가는 천무류를 보며 남궁천이 내심 피식 웃었다.
‘그야 내 돈이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그렇죠.’
물론 그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다.
대신 천무류의 말을 묵묵히 경청했다.
“하여! 나는 남궁천 소협에게 적랑단주의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오! 아니, 이건 양보가 아니라 응당 그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라 할 수 있소. 남궁천 소협! 자네가 적랑단주를 맡아주게.”
천무류가 뜨거운 눈길로 귀빈석에 선 남궁천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히며 많은 말을 주고받는다.
‘자네 말이 맞았다. 자네는 천살성이 아니었어.’
‘겨우 그 정도로 되겠어요?’
‘자넬 오해한 걸 사과하지.’
‘말로만?’
‘…….’
남궁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승패는 인정해야죠. 제가 장외 실격을 당했으니, 저의 패배입니다.”
순간 천무류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지체 없이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쿵 찧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몇몇 이들이 놀라서 숨을 삼켰다.
“헉!”
그런 와중에 천무류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남궁 소협, 노부가 이렇게 부탁하겠네! 부디 자네가 적랑단을 잘 이끌어주시게!”
“이런! 어쩌자고 대선배께서 저 같은 녀석에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어서 일어나십시오!”
그제야 천무류가 일어나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굳은 결의와 고고한 의협심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닐세.”
“……후우, 정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남궁천의 낭랑한 목소리가 대연무장에 울리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우아아아앗! 이게 무슨 일이냐?”
“강호신룡이 적랑단주가 되었다!”
“두 사람 다 멋있다! 무림맹의 앞날이 창창하구나!”
“흑무련 놈들은 이제 끝이다!”
“와아아아아!”
그런데 다음 순간 맹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누구 마음대로 적랑단주를 한단 말이더냐!”
“……!”
모든 관중이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묵천악이 씨근거리면서 남궁천에게 다가갔다.
“네놈이 대살성 진천랑이라는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나는 널 진작 알아보았다! 이 쳐 죽일 놈! 감히 누굴 속이려고 드느냐?”
“어…… 맹주님?”
남궁천이 당황한 척하며 대꾸하자, 묵천악이 눈을 뒤집으며 소리쳤다.
“어디서 연기를 하는 것이야!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난다면, 끝없이 죽여주마!”
상황이 뜻밖으로 흐르자, 관중들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총관이 얼른 나섰다.
“맹주님! 고정하십시오! 이자는 남궁천 소협입니다! 진천랑이 아닙니다!”
“소협은 얼어 죽을 소협인가! 총관! 내 진작 말하지 않았나? 이 녀석은 천하대살성 진천랑이라고! 그놈이 환생한 게 틀림없다고!”
이쯤 되자 천장에서 호신위가 뚝 떨어지더니 맹주를 말리고 나섰다.
“맹주님. 우선 고정하시고, 자리를 옮기시지요.”
호신위가 눈짓을 보내자, 총관이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는 난간으로 가서 소리쳤다.
“여러분, 지금 맹주님이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해서 잠시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번 대회는 여기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대회를 마무리하자 사람들이 눈살을 잔뜩 구겼다.
“뭐야? 이렇게 끝이야?”
“임명식 같은 것도 안 해?”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잖나? 맹주님이 기습을 당하셨으니까.”
“그렇다고 강호신룡을 저렇게 대하는 건 아니지.”
“어허, 총관님이 말하셨잖은가? 잠시 오해가 생긴 거라고.”
사람들이 저마다 분분한 의견을 내세우며 떠들어댔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남궁천의 입가에는 아무도 보지 못한 회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맹주, 이제부터 당신이 무너져 갈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