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들
“맹주님, 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맹주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총관이 달려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물론 총관이 복도를 따라 달려올 때부터 그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에 놀랄 건 없었다.
다만 총관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의외이긴 했다.
“진정하고 말하게. 자네답지 않군.”
“아…… 죄송합니다.”
머쓱하게 대꾸한 총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지금은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최근 맹주의 조바심이 자신에게도 전염된 모양이다.
호흡을 고른 총관이 맹주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한참이나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맹주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놀라움에서 분노로, 다시 놀라움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모든 이야기를 전한 총관이 한 걸음 물러나서 맹주의 눈치를 살폈다.
묵천악은 한참이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총관을 돌아보았다.
“신뢰할 만한 정보인가?”
“비선향주가 전한 정보입니다.”
“흐음.”
묵천악이 침음을 흘리자, 총관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더 조심해야 할 듯합니다.”
“아니.”
“예?”
“이건 어쩌면 좋은 재료가 되겠군.”
묵천악의 중얼거림에 총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료라 하심은…….”
“확실히 충격적인 소식일세. 그래서 그간 연락이 없었던 거로군. 하나 이 소식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에게 더 유리해질 수도 있네.”
“소신이 아둔하여 맹주님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후후후. 괜찮네.”
묵천악이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총관은 그 표정을 보면서 모처럼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 맹주의 얼굴은 전성기 때 그가 자주 짓던 표정이 담겨 있었다.
어딘지 자신감에 찬 표정.
계획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담긴.
“자네 생각에 차기 맹주는 누가 좋겠는가?”
“예에?”
순간 총관이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맹주를 보았다.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맹주님, 설마…….”
“아닐세. 자네가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그제야 총관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요. 저는 맹주님이 아닌 사람은 누구도 떠올릴 수가…….”
“천 각주는 어떤가?”
“천 각주라면…… 남문각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갑자기 왜 그런…….”
“내 말에 대답부터 해보게. 만약 내가 천 각주에게 맹주직을 권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총관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곧 대답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천 각주는 직위에 관심이 없는 자입니다. 이번에 그가 비무 대회에 나선 것도 강호 형세가 어지러워 마지못해 나섰을 겁니다. 만약 맹주님이 맹주 자리를 권하신다면, 천 각주는 극구 사양할 것입니다.”
“역시 그런가?”
“예, 맹주님.”
총관이 확신에 찬 대답을 하며 다시 맹주의 눈치를 살폈다.
묵천악이 빙그레 웃었다.
“실은 나도 그럴 것 같네. 그래서 딱 좋지 아니한가?”
“……?”
“천 각주를 만나러 가세.”
“지금 말씀입니까?”
“그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총관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가자, 홀로 남은 묵천악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남궁천. 네 뜻대로 세상이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 * *
쒸에에에엑!
콰아앙!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자마자 폭발이 일어났다.
딱히 폭약을 매달고 달린 화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과녁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흐음.”
침음을 흘린 천무류가 눈을 지그시 감고는 활을 내렸다.
‘유현이라.’
그는 지난 비무를 떠올리고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 유현.
예의가 바르고 무공 수위가 상당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유현이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기에 눌려 포기했다고 생각하겠지만…….
‘확실히 남다른 재능이었지.’
결코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부족한 자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뛰어난 무인이었다.
어쨌거나 유현은 움직였다.
자신이 예안기공(銳眼氣功)을 펼칠 때 손가락이라도 하나 까딱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던가?
기성 무인들 중에서도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돌처럼 땅에 박혀서 꿈쩍을 하지 못한다.
예안기공은 활을 쏘기 전 표적을 노려볼 때 사용하는 그만의 독문심법이었다.
이때 상대는 천무류의 눈이 매의 그것처럼 매섭게 느껴지는데, 대개는 공포에 질려 꿈쩍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유현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움직인 것이다.
‘한데 그 아이가 남궁천보다 약하단 말이지.’
재미있지 않은가?
실로 오랜만에 될성부른 떡잎을 보았는데, 그보다 더 나은 녀석이 있단다.
비무 대회에 참가한 보람은 있는 건가?
사실 천무류가 이번 비무 대회에 참가한 것은 세상이 어지럽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강호신룡에 대해 궁금했던 부분도 있었다.
물론 후기지수인 만큼 자신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겠지만, 인성이나 실력 등 여러 면에서 알아보고 싶은 인재였다.
그럼에도 지금껏 남궁천의 비무를 지켜보지 않은 것은 그 어떠한 편견도 없이 오롯이 직접 상대하며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번 모용신과의 비무를 우연찮게 보고 나서는 생각이 많이 바뀐 것이다.
‘잔인한 손속에 거침없는 성격. 거기에 초견파공안까지.’
확실히 위험한 요소가 너무 많다.
강호의 질서와 안전을 위해서 독을 품은 싹은 미리 잘라내야 할 필요도 있으리라.
그렇게 눈을 천천히 뜨던 천무류는 순간 멈칫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놀랍게도 전각 사이로 맹주와 총관이 함께 등장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천무류가 포권을 하며 인사하자, 맹주가 감탄한 투로 대꾸했다.
“과연 패력궁이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기다린 것 같소만.”
“예, 기척을 느꼈습니다.”
“역시 훌륭하시오.”
“과찬이십니다. 일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으셨으니 가능했습니다.”
천무류가 겸양을 갖춰 대꾸하자, 맹주가 껄껄 웃으며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남문각주께서 이곳에서 수련 중이라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와보았소.”
“우선 이리로 오시지요.”
천무류가 맹주와 총관을 후원 한쪽에 마련된 정자로 안내했다.
맹주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어제 비무를 무척 흥미롭게 보았소. 화산파의 수제자가 고양이 앞에 쥐가 된 것처럼 꼼짝도 못 하다니. 과연 패력궁은 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소.”
“과찬이십니다. 남궁천은 아마 또 다를 겁니다.”
“그러잖아도 그것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소.”
천무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남궁천에 대해 알아내신 게 있습니까?”
“흐음. 워낙 민감한 문제라 믿을 수 있는 자들을 시켜 은밀히 조사해보았소.”
“말씀하시지요.”
“남궁천 그 아이가 아무래도…….”
“…….”
“천살성을 물려받은 게 맞는 것 같소.”
“……!”
맹주가 먼 산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아니길 바랐지만…… 그 피를 이은 터라 어쩔 수 없는 모양이오.”
“혹시 증거가 있습니까?”
천무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묵천악이 착잡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살곡을 아시오?”
“어찌 모르겠습니까? 살곡의 표적이 되면 그날부터 잠을 자지 못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 아닙니까?”
“그렇소. 참으로 악랄한 살수 집단이지.”
“갑자기 살곡은 왜……?”
“남궁천이 살곡의 주인인 듯하오.”
순간 천무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천은 이제 약관에 다다른 청년이 아닌가?
그에 비해 살곡의 역사는 길다.
한데 남궁천이 살곡주라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다 보니 의심보다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천무류가 차분한 표정을 되찾고는 물었다.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본 맹이 은밀히 알아본 정보요. 하나 천 각주께서 곧 남궁천과 비무를 하게 되니 말해주는 것이외다.”
“아니, 이제 약관에 지나지 않은 아이가 어찌 살곡주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아이는 대살성 진천랑의 아들이외다.”
“그 말씀은…… 진천랑이 살곡과 연관이 있다는…….”
“그렇소. 전대 살곡주와 진천랑은 사실 막역한 사이였소. 한데 진천랑이 죽고, 얼마 전 살곡주마저 죽으면서 남궁천을 후계자로 임명한 모양이오.”
“허어! 그런……!”
천무류의 눈동자에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묵천악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청랑단주의 단전을 폐했을 때만 해도 나는 믿고 싶지 않았소. 하나 남궁천이 살곡주라는 게 밝혀진 이상 더 망설일 것은 없어졌소.”
타앙!
순간 천무류가 탁자를 내려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강직한 얼굴로 묵천악을 보며 다짐했다.
“맹주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천무류가 대살성의 사생아를 반드시 죽이겠소. 지금껏 맹이 지켜온 강호 평화를 망가뜨릴 녀석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외다!”
“천 각주.”
묵천악이 감동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천무류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본 맹에 천 각주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오. 사실 나는 이제 그만 맹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소이다.”
“맹에서 물러나다니요? 어째서 그런 말씀을?”
“기실 작금의 상황으로 볼 때, 본 맹은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해 있지 않소이까? 북쪽은 흑무련이 장악해 버렸고, 본 맹은 적랑단을 잃었으며, 이젠 청랑단주마저 잃었소. 본 맹의 최고 정예 조직이 엉망이 되었지. 거기에 살곡주이자 천살성을 가진 남궁천을 강호신룡으로 추앙받게 만들지 않았소이까? 이건 모두 내 불찰이외다. 해서 나는 모든 책임을 지고 맹주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외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크게 소리친 천무류가 뺨을 부들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강호 북쪽의 문제는 흑무련의 잘못이요, 적랑단의 패배는 당예설의 잘못이고, 청랑단주를 잃은 것은 남궁천의 잘못입니다! 어찌 그 모든 책임을 맹주님 홀로 지려고 하신단 말입니까? 맹주님의 고심은 이해하지만, 책임 소재를 명확히 따지지 않으면 오히려 맹은 더욱 불안해질 겁니다. 지금껏 이 강호의 평화를 지켜오신 분이 바로 맹주님 아닙니까?”
“천 각주. 하나 내게도 책임이 없진 않소. 그러니…….”
“무릇 장(將)이란, 졸을 부리는 것. 모든 결과에 어느 정도의 책임은 따르겠지요. 하나 진정 책임지는 자세라면 끝까지 자리를 보존하시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 물러나신다는 것은 오히려 책임에서 회피하는 것입니다.”
“…….”
“……주제넘은 소리였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오. 내 천 각주의 꾸지람을 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소. 천 각주의 말이 옳은 것 같소.”
“꾸지람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허허. 그러지 마시오. 천 각주. 그대는 오늘 나의 스승이나 다름없었소. 하면…… 천 각주.”
“말씀하십시오.”
묵천악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대가 말한 장으로서 부탁하겠소. 강호신룡…… 아니, 천살성 남궁천을 부디 그대가 막아주시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총관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무류를 보았다.
‘이런 심계가 있으셨던가?’
총관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유능한 자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지만, 이렇게 즉각적으로 정보를 활용할 줄이야.
‘그래, 위태롭지만 아직 맹주님은 무너지지 않고 서 계신다.’
총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내 천무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장은 부탁이 아니라, 명을 내리면 되는 겁니다. 남문각주 천무류가 맹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맙소, 천 각주.”
묵천악이 시커먼 속내를 감춘 채 감탄한 표정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