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운명에 맞서는 놈들
모용신이 남궁천의 배후를 급습할 때,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맹주 묵천악이었다.
‘저 멍청한……!’
생각 같아서는 당장 뛰어내려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모용신은 남궁천에게 사로잡혀 장외까지 날아간 상황.
‘끝이구나.’
묵천악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비무가 끝난 상황에서 기습을 가했다.
어떤 식으로도 감쌀 수 없는 상황이다. 남궁천이 분기탱천해서 일격에 때려죽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물론, 여론을 어느 정도 조장할 수는 있다.
하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남궁천에게도 충분한 명분이 생긴 셈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 이 지경까지 왔다면…….
‘모용 단주. 자네가 죽어주게.’
그렇다.
이왕 여기까지 왔다면 남궁천이 모용신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뒷말이 조금이라도 나올 수 있을 테니까.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여론을 조장할 여지가 조금이나마 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모용신을 벽으로 밀어붙인 남궁천에게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곧이어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들고 내질러 가는 순간!
“기다려! 남궁천!”
방해꾼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멈칫!
남궁천이 멈칫거리는 사이 관중석에서 누군가 훌쩍 뛰어내리더니 쏜살처럼 달려갔다.
‘모용강?’
묵천악이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모용강을 보았다.
“저 한심한 녀석이!”
이젠 별의별 방해꾼이 다 나타난다.
이래서야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정도가 아니라, 겨우 설익은 밥이라도 먹겠다는데 솥 채로 뒤집어엎는 격이 아닌가?
“뭐, 뭐야? 저 청년은 누구야?”
“가만! 저 생도는 무연회 때 나왔었잖아! 그래, 모용강이다!”
“아! 모용신 단주의 동생이구나!”
관중의 이목이 달려가는 모용강에게 집중됐다.
모용강은 남궁천 곁으로 다가오더니 포권을 하며 멈춰 섰다.
척!
“남궁천! 형님을 살려다오!”
굳은 표정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모용강. 눈가가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벽라검을 내질러 가던 남궁천이 미간을 슬쩍 좁혔다.
이미 벽라검은 모용신의 목을 반 치쯤 파고들어간 상태였다. 검신을 타고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뭐야? 네가 왜 끼어들어?”
남궁천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던 모용강이 멈칫거렸다.
왜 끼어드냐고?
글쎄. 자신은 왜 끼어들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언제나 자신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형이 아니었던가? 차라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벽라검이 모용신의 목을 향해 날아들던 그 순간, 모용강은 어릴 적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던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번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왠지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끝이라고? 죽을 땐 죽더라도 내게 왜 그렇게 모질게 대했는지 해명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최소한 사과는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야!’
모용강이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소리쳤다.
“이렇게 부탁하마! 부디 여기서 멈춰다오!”
“꺼져.”
“남궁천! 이미 비무는 끝났잖아! 승패도 결정됐어!”
“그래, 그랬지. 그런데 이자가 날 뒤에서 급습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어다.”
“남궁천!”
“닥쳐. 계속 방해하면 너도 죽인다.”
남궁천이 씹어뱉듯이 말하자 주변으로 삭풍이 불었다.
휘이이잉!
등골마저 오싹해지는 한기가 전해진다.
모용강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따금씩 남궁천에게서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 온통 시체로 널브러진 전작 복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다. 지독하게도 쓸쓸하고 두려운 기운.
때마침 모용신이 핏기를 잃은 얼굴로 희미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죽여라…… 남궁천.”
“안 돼! 남궁천! 형님을 살려다오! 그래도 내 친형님이야!”
그러자 모용신이 모용강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시끄럽다! 강! 너는 닥치고 빠져 있어라! 이건 이 녀석과 나의 비무다! 네놈은 얌전히 나의 죽음을 지켜보아라!”
“싫습니다! 형님도 그만하십시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강. 너는 내 도구다! 도구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도구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녀석은 나를 죽여야 할 운명이고, 나는 여기서 죽을 운명이다. 그리고 이제 너는…….”
잠시 뜸을 들인 모용신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너의 운명을 찾아라. 나는 너를…… 버렸다.”
“형님!”
하지만 모용신은 대답 대신 표독스러운 눈길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남궁천. 이제 날 죽여라. 그게 너의 운명이지 않느냐? 너는 대살성의 자식이지 않은가? 천살성의 피가 너에게도 흐르고 있다는 걸 만천하에 보여주어라!”
남궁천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잠시 후 남궁천이 서늘한 얼굴로 읊조렸다.
“정말이지 죽이고 싶게 만드는군.”
“안 돼, 남궁천! 부탁한다!”
“닥쳐라! 강아!”
다시 모용신과 모용강이 싸우자, 남궁천이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이거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네.”
그러거나 말거나 모용강이 이번엔 무릎까지 털썩 꿇으며 사정했다.
“남궁천! 네 분노를 이해한다! 하지만 이렇게 부탁할 테니…… 형님을 살려다오!”
남궁천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모용신이 그런 남궁천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뭘 고민하는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따라. 그냥 날 죽이란 말이다. 그게 대살성의 자식다운 모습이 아니더냐?”
결국 남궁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죽이고 싶지만, 살려는 드릴게.”
“뭐, 뭐라?”
모용신이 눈을 부릅떴다.
살려주겠다고?
그게 가능한가?
천살성을 타고난 인간이 자신을 살려주겠다고?
하나 이어진 남궁천의 웃음은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처럼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될 거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생각해 보니 죽는 건 너무 쉽잖아?”
말뜻을 이해한 모용신이 눈을 부릅떴다.
“무, 무슨……! 안 돼애애앳!”
하지만 이미 남궁천은 모용신의 단전을 향해 일장을 뻗어가고 있었다.
쒸에에엑!
뻐엉!
기가 폭발하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용신의 옷자락이 산산이 터져 나갔다.
탄탄한 복부에 손바닥 자국이 붉은 인장처럼 새겨졌다.
“끄아아악!”
모용신이 입을 쩍 벌리고 비명을 터뜨렸다.
어려서부터 무공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청랑단주 모용신의 단전이 한순간에 부서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관중들이 숨죽여 지켜보았다.
누구도 남궁천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랑단주의 비열한 암습을 비난하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청랑단주를 죽이지 않고 단전을 폐하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다.
오히려 남궁천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귀빈석 난간에서도 맹주와 총관이 굳은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묵천악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저 병신 같은 놈!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지!”
“맹, 맹주님…….”
“뒷정리하게.”
딱딱한 말을 뱉은 묵천악이 미련 없이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홀로 남은 총관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모용신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남궁천은 최후의 최후까지 맹주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정말이지 정해진 운명을 마구 걷어차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만약 저기서 남궁천이 모용신을 죽였다면 어떻게든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 수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억지가 좀 들어가겠지만, 원래 정치질이 다 그렇지 않던가?
어차피 양민들은 개나 돼지와 마찬가지다.
약간의 선동과 조작질만 있으면 이리저리 갈대처럼 흔들리는 게 바로 양민들이다.
한데…….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궁천은 모용신을 죽이지 않았다.
비록 단전을 부수긴 했지만, 비무가 끝난 상태에서 배후를 노렸던 청랑단주를 끝까지 살려주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어려워진다.
총관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많이 기울었다.
총관이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해가…… 기우는구나.”
씁쓸한 표정으로 눈길을 옮기는데 마친 그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저만치 관중석 입구에 서 있는 한 사람.
꽤 먼 거리였지만 존재감이 확실해서 총관은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패력궁?’
분명 패력궁 천무류다.
타인의 비무는 지켜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천무류의 행색이 이제 막 관중석으로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사실이었다.
패력궁 천무류는 마침 대연무장 근처를 지나다가 오늘 남궁천의 비무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잠시 들러본 것이었다.
다만 그가 관중석으로 들어왔을 때는 남궁천이 이제 막 모용강을 벽에 밀어붙였을 때였다.
그로서는 두 사람 모두 장외로 나간 상황이라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무는 끝난 건가?’
한데 곧이어 남궁천이 청랑단주의 단전을 파괴하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앞선 사정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남궁천의 손속이 지나치게 잔인하게 느껴진 탓이다.
“부각주.”
“예, 각주님.”
옆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얼른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보통 각주와 부각주의 사이를 생각해 보면 확실히 과한 예를 차리고 있었다.
그만큼 패력궁 천무류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엄중하기 때문이리라.
“어찌 된 상황인지 아는가?”
“비무가 끝난 후에 청랑단주가 남궁천을 배후에서 기습한 것 같습니다.”
“청랑단주가 기습을?”
이상한 일이다.
자신이 아는 한 청랑단주는 그토록 사리 분별을 못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혹시 개인적 원한이 있는 것인가?”
“자세한 건 알지 못하나,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흐음.”
천무류가 침음을 흘리고는 저만치 아래의 남궁천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한 청랑단주 모용신은 칼 같은 자였다. 너무 칼 같아서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자.
결과를 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불사하는 성격이라는 것도 대충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이 있었다.
철저하게 명분을 따지는 것. 한마디로 백도 무림에 딱 어울리는 자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런 자가 배후에서 암습을?
그것도 비무가 다 끝난 후에?
명분도 없고 실리도 챙기지 못하고.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부각주.”
“예, 각주님.”
“맹주님을 뵙고 싶군.”
“빠른 시일에 일정을 잡아보겠습니다.”
“아니. 오늘 잡아보게.”
“예? 아, 예. 오늘 중으로 잡아보겠습니다.”
천무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관중들은 여전히 작은 웅성임과 함께 남궁천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미 비무는 끝난 상황.
하지만 남궁천이 배후에서 급습한 천랑단주를 죽이지 않고 단전을 부수기만 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무인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겠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남궁천의 자비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강호신룡은 대인배로군.”
“나 같았으면 일격에 때려 죽였을 거야.”
“그러니 자네가 대협이라는 말을 못 듣지.”
“뭐라고? 자네, 지금 시비 거는 건가?”
“하하. 흥분하지 말게.”
조금씩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번져가기 사직했다.
그러는 동안 남궁천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한 모용신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고는 돌아섰다.
모용강이 얼른 모용신에게 달려갔다.
“형님!”
모용강이 재빨리 모용신의 요혈을 점하고는 응급약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남궁천이 그 모습을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네가 그놈을 살렸다.”
“미안하다. 남궁천.”
모용강이 고개를 떨어뜨리자, 남궁천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젠 내가 안 죽여도 깨어나면 스스로 죽으려고 발악할 거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 거다.”
“칫, 가족이면 좀 한결같아야지. 뭐가 이리 서로 달라?”
남궁천이 투덜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남궁천의 눈길이 귀빈석으로 향했다.
맹주가 보이지 않았다.
‘맹주, 슬슬 느껴지나? 내가 다가가는 것이. 이렇게 차츰차츰 조여줄 테니 전생의 내 기분을 한번 느껴보라고. 이제 두 달도 안 남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