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운명에 맞서는 놈들
퍼억!
섬뜩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터져 나가고 피가 솟구친다.
“끄륵……!”
정수리에 도신이 절반쯤 박힌 무인이 눈을 허옇게 까뒤집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털썩!
“킬킬킬.”
괴기스러운 웃음을 지은 백무극이 도신을 한 차례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마침 연무를 헤치며 달려온 무인이 눈알을 부라렸다.
“뭐, 뭐야? 이 새끼! 너 우리 편 아니……!”
“뭐라는 거야? 이 병신 새끼들이.”
입매를 길게 찢은 백무극이 순간 바람처럼 날아들자, 무방비 상태로 있던 무인이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렸다.
“으악!”
퍼억!
백무극이 순간 도파로 명치를 가격하자 무인이 입을 쩍 벌린 채 허리를 숙였다.
찰나,
서컥!
백무극이 도를 수직으로 치켜 올리자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무인의 머리가 댕강 잘려 나갔다.
툭, 데굴데굴…….
졸지에 기습을 당한 무인은 자신이 어떻게 죽은 건지도 모른 채 목을 잃고 말았다.
촤아아앗!
백무극이 도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히죽 웃었다.
“강호에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어? 안 그래? 무극아?”
“집중이나 해.”
“새끼, 까칠한 척하기는.”
백무극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주변을 광기 어린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마침 저만치 금속성이 울리자, 백무극이 혀를 빼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다닷!
화살처럼 달려간 백무극이 연무 너머의 그림자를 향해 도신을 휘둘러갔다.
쉬이이이잇!
쩌엉!
금속성과 함께 상대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이 빌어먹을! 이건 또 뭐야?”
무인이 눈알을 부라리다가 백무극을 보고 멈칫했다.
“넌……?”
“킬킬. 이놈도 죽이자, 무극아.”
“좋을 대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백무극이 혀를 빼문 채로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키햐!”
“이 미친 새끼……! 갑자기 왜 나를……!”
하지만 그는 의문을 완전히 표하기도 전에 가슴에 구멍이 뚫리면서 튀어나온 검신을 보고 말았다.
정신없이 달려들던 백무극도 멈칫하고는 사내의 가슴에 튀어나온 검신을 보았다.
“뭐야? 이건…….”
백무극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마침 사내 뒤에서 모용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다, 무극.”
“어…… 모용강?”
“그래.”
“너 모용신 동생인데.”
“그래.”
“그런데 왜 같은 편끼리 싸우는 거냐?”
모용강이 대답 대신 검으로 꿰뚫은 사내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슈우욱, 콰당탕!
저만치 나가떨어진 무인이 간헐적으로 몸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낸 모용강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답했다.
“피차 마찬가지 입장인 것 같은데?”
“병신아, 마찬가지는 뭐가 마찬가지야? 나는 닥치는 대로 죽일 건데. 너도 죽일 거야.”
모용강이 눈을 가늘게 뜨자 백무극이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멍청아. 모용강은 우리 편이야.”
“병신아! 강호에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어? 그리고 저 새끼는 모용신 동생이라고!”
“모용신 동생이지만 같은 편끼리 싸우니까 우리와 같은 입장이야.”
“시끄러워! 난 그저 보이는 놈은 죄다 죽여 버릴……!”
사납게 소리치던 일극이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모용강이 바로 곁을 스친 탓이다.
곧이어 모용강은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쉬이이익! 촤아악!
“크아악!”
살을 베는 소리에 이어 뜨끈한 피가 등에 닿았다.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솟구쳤다.
“뭐야? 이건…….”
백무극이 천천히 돌아보자, 무림공적 하나가 가슴이 사선으로 베인 채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보아하니 자신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던 무림공적이 모용강의 일검에 당해 쓰러지는 상황.
발끈한 일극이 모용강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새끼야! 누가 너더러 도와달라고 했냐?”
“병신. 혼자 중얼거릴 시간에 싸워라. 적이 누군지도 모르겠나?”
모용강의 싸늘한 목소리에 백무극이 미간을 사납게 꿈틀거렸다.
“이런 개새…….”
“모용강 말 들어, 일극.”
“이익! 시끄러워! 이 몸의 주인은 나다!”
“아냐, 우리야.”
“닥쳐! 듣기 싫다!”
백무극이 자문자답하며 소리치자 모용강이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병신.”
차갑게 말을 뱉은 모용강이 백무극의 손을 뿌리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연무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백무극은 혼잣말을 되뇌며 미친 듯 소리쳤다.
* * *
대연무장을 채운 연기가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물론 범인이라면 아직 완전히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겠지만, 무공을 익힌 고수라면 안력을 높여 대략이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총관이 맹주를 돌아보았다.
“맹주님. 지금이라면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실 것 같습니다.”
태사의에 앉아 있던 맹주가 천천히 눈을 떴다.
‘드디어 끝인가?’
약간의 차질이 생겼지만 큰 변화는 없으리라.
아직은 연무가 있으니 관중들이 눈치채기 전에 비무대 주변으로 널브러진 시신들은 빠르게 정리하면 된다.
‘이왕이면 남궁가 사람들까지 건드리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 모든 일을 자초한 것은 남궁천이다. 고분고분 제 죽을 자리를 찾아갔더라면 남궁가는 건드리지 않았을 것을.
묵천악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난간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공력을 운기해서 안력을 높였다.
‘모용 단주가 너무 잔인하게 다루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주변에서 암기를 날리는 자들은 흔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세침만 이용했다.
관중들은 제삼자의 개입을 알 수 없으리라.
그런데…….
“……!”
순간 묵천악의 눈에 핏발이 섰다.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챈 총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불렀다.
“맹주님……?”
“아니, 대체 지금까지 뭘 한 거야!”
묵천악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금쯤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리라 생각한 남궁천이 너무나 멀쩡하게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남궁천이 수세에 몰린 형국도 아니다.
두 사람이 거의 비등비등한 상태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아니, 표정만 보면 오히려 모용신이 조급해 보인다.
비무대 주위로는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다.
한데 하나같이 무림공적이거나 자신의 충복들이다.
“이, 이게 어찌……!”
마침 그의 눈에 무림공적과 싸우는 백무극이 보였다.
“저 멍청한 녀석이!”
까드득!
어금니가 갈린다.
묵천악의 전신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맹주님, 진정하시…….”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는가!”
묵천악의 호통에 총관도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맹주가 흔들리고 있다.
정서가 무너지고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버텨왔건만.
총관이 고개를 숙인 채로 묵천악의 눈빛을 힐끔 살폈다.
씁쓸하다.
저 눈빛은 맹수의 기운을 품은 게 아니다.
맹수에게 쫓기는 승냥이와 같다.
도대체 이 비무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애초에 남궁천을 궁지로 몰아넣겠다는 비무 대회였다.
한데 대회가 거듭될수록 궁지에 내몰리는 것은 맹주가 아닌가?
‘남궁천…… 정말 무서운 자로구나.’
오랫동안 맹주를 보필했지만, 저토록 흥분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래서야 진천랑보다 더한 경우가 아닌가?
아니, 진천랑이 지금껏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도 맹주는 지금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리라.
그 말은 역시 남궁천에게서 진천랑의 혼이라도 본다는 건가?
부자지간이니 그럴 수 있다.
하나 몰입이 너무 심하다.
묵천악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 상대는 누군가?”
“그것이…… 비량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량이라.”
묵천악이 다시 한번 어금니를 깨물었다.
비량은 믿을 수가 없다.
오히려 최근 비량은 의심의 대상이다.
비선향에서 물러난 이후로 알 수 없는 행보만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역시 결승에서 남궁천이 패력궁과 붙게 될 것인가?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만 한다.
“결승에서는 비선향을 준비시키게.”
“알겠습니다. 한데…… 모용 단주가 아직 패하지 않았는데…….”
“내가 볼 땐…….”
“…….”
“가망이 없네.”
* * *
뚝…… 뚝…….
검신을 타고 핏방울이 미끄러지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용신은 자세를 바로잡고 호흡을 정리했다.
검신에 묻은 피는 자신의 것이었다. 길게 찢어진 팔뚝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어휴, 피 많이 흘리시네.”
남궁천이 눈살을 과장되게 찡그리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모용신이 미간을 구겼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흑사검법이 통하지 않는 것인가?’
흑사검법의 모든 초식이 고스란히 막힌다. 마치 남궁천은 초식 하나하나의 모든 검로를 읽는 듯했다.
제삼자가 본다면 호각지세로 보일 수도 있지만, 분명 자신이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따금씩 날아드는 세침을 전부 자신에게 튕겨내고 있다.
이게 고작 약관에 지나지 않은 견습생이 구사할 수 있는 경지란 말인가?
초절정이다.
확실히 남궁천은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아니다. 이런 생각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머리를 차갑게 식혀야만 한다.
지금은 현실 부정보다는 대응이 절실할 때다.
모용신은 빠르게 관중석을 훑었다.
안력을 높이니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된다. 다만 제자리에 있어야 할 암습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비무대 옆에는 쓰러진 자들도 보인다.
맹주가 보낸 것인지 무림맹원 몇 명이 달려와 시체를 빠른 속도로 정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암습 작전은 실패다.
‘모든 게 예상 밖이군.’
그렇다면 자신도 예상 밖으로 행동해야 한다.
마치 절대고수를 상대한다는 마음으로 한 수 한 수에 심혈을 쏟아야 한다.
아니다. 다음 수는 없다. 이번 한 수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
순간 남궁천이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 눈알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남궁천. 내가 너를 과소평가했구나.”
“알았으면 기권이라도 하시게?”
“그럴 리가. 더욱 전력으로 너를 쓰러뜨린다.”
말을 마친 모용신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해갔다. 그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졌다. 모든 원기를 쥐어짜서 반드시 죽이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엿보이는 순간이다.
말 그대로 회심의 일격!
‘간다!’
파앙!
순간 모용신의 신형이 금리도천파의 수법으로 튕기듯 날아갔다.
쉬이이이이잇!
‘이것만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슈슈슈슈슈슛!
순간 흑연검이 수십 개로 쪼개진다.
흑사검법의 절초 중 하나인 천섬비사(千閃飛蛇)다.
팟!
남궁천이 그대로 천섬비사 초식에 맞서 나갔다.
모용신의 눈동자에 확신이 새겨졌다.
‘그럴 줄 알았지.’
남궁천은 단 한 번도 자신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운명에 맞서겠다는 것처럼.
이번에도 남궁천은 수많은 잔상 중에서 정확히 진짜 흑연검을 가려내어 찔렀다.
쩌엉!
순간 공력이 터지면서 금속성이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의 검봉이 정확히 부딪치면서 한일자(一)가 순간!
‘진짜는 지금부터다!’
순간 모용신이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검신이 꿈틀거리더니 몸을 튕겼다.
타앙!
사두용심(蛇頭龍心)!
검은 뱀이 한 마리의 용이 되어 솟구쳐 오른다.
쿠아아아아!
강기를 머금은 흑연검이 곧장 돌진하면서 남궁천의 얼굴을 갈라 버렸다.
‘때론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을!’
모용신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처음부터 이렇게 전력을 다했어야 했다.
그런데…….
“……!”
다음 순간 모용신은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스스슷.
놀랍게도 남궁천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용의 형상처럼 강맹하게 날아갔던 흑연검의 강기가 애꿎은 허공만 찌른 상황.
휘리리링! 휘리리링!
갈 곳을 잃은 용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걸…… 피해?’
아니, 이래서야 피했다기보단 원래 없는 곳에 검을 내질렀다고 해야 옳지 않겠나?
도대체 어떻게! 정말 공력을 빤히 읽지 않고서야!
가만…… 공력을 읽어?
순간 머리끝이 쭈뼛 섰다.
‘설마 이 녀석도 초견파공안을?’
바로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뭘 그렇게 생각해?”
“……!”
콰득!
“컥!”
남궁천의 손이 모용신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전에 없이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읊조렸다.
“너는 애초에 너무 선을 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