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29화 (328/508)

329. 운명에 맞서는 놈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묵천악의 물음에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한데 그 눈빛이 묘하다.

언뜻 보면 살기를 담은 자의 눈빛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죽은 자의 눈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묵천악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물었다.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역시나 대답이 없다.

바닥에 못이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아이.

피로 얼룩진 얼굴은 공허로 가득 찼고, 양손은 아주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종 같은 자세로 반응이 없으니 묵천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듣지 못하는 아이인가?”

그제야 옆을 지나가던 살충대주 고천수가 눈알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쳤다.

“어이, 꼬맹아! 맹주님이 물으시잖아! 대답 안 해?”

“…….”

“이 독한 새끼가……!”

고천수가 우악스러운 손길을 뻗어 아이의 멱살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그만두게.”

맹주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고천수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가서 이 아이를 아는 자를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고천수가 걸어가자 맹주는 다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아이로고.’

아이의 눈빛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살아야겠다는 열망이 빛나다가도, 시체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이 극명한 대비에서 오는 미묘한 기운.

분위기가 바뀔 때마다 아이의 전신에서는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기운이 솟았다가 가라앉곤 했다.

묵천악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시신이 즐비하다.

이곳은 혈사곡(血死谷).

무림공적 제사호 혈사곡주 양춘이 머무는 곳이었는데, 이번에 살충대가 기습하면서 일망타진에 성공했다.

그리고 눈앞의 이 아이는 혈사곡에 납치되어 사로잡혀 있던 아이였다.

마침 고천수가 혈사곡 무인 하나를 질질 끌고 오더니 거칠게 무릎을 꿇렸다.

“이 아이에 대해 말해라.”

강제로 끌려 온 무인이 고천수를 한 번 노려보더니 묵천악을 보고도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개겨?”

따악!

쿠당!

“크윽!”

뒤통수를 얻어맞은 무인이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바닥에 안면을 찧었다.

고천수가 무인의 뒤통수를 지르밟으며 으르렁거렸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게 말로 대하니까 스스로 사람인 줄 아는구나. 너 말고도 말할 사람은 많으니 뒈지고 나서 후회나 하지 마라.”

“크읍! 큭! 말, 말하겠소! 말하겠습니다!”

그제야 고천수가 발을 치우고는 쓰러진 무인의 목덜미를 낚아채 일으켰다.

묵천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구인가?”

“모, 모릅니다. 납치해 온 아이들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해 두지 않습니다.”

그 말은 결국 길거리에서 사라져도 문제없는 아이만 납치를 했다는 뜻이다.

감히 고관대작의 자제는 건드리지 못했을 터.

따악!

듣고 있던 고천수가 무인의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쳤다.

“자랑이다, 이 새끼야.”

“끄응.”

무인이 신음을 흘리는데, 묵천악이 턱짓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이 아이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데, 혹시 더 아는 바가 있는가?”

“제가 납치된 아이들을 관리하는 건 아니라서 잘…… 음?”

무심코 아이를 돌아본 무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 녀석은……?”

“아는 아이인가?”

하지만 무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모릅니다. 다만…… 이 녀석이 본 곡에서 탈출하려고 무인 셋을 죽이고 일곱 명을 병신으로 만든 적이 있습니다. 아주 지독한 녀석입니다!”

“흐음.”

묵천악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의 손은 피로 얼룩이 져 있었다.

분명 조금 전 일어난 난전 속에서도 살인을 저지른 것이리라.

“알았다. 끌고 가게. 그리고 보정각주를 불러와.”

“예, 맹주님!”

고천수가 우렁차게 답하고는 무인을 아무렇게나 낚아채 질질 끌고 갔다.

잠시 후 보정각주가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맹주님.”

“이 아이를 한 번 살펴봐 주게.”

“예, 그럼.”

단아한 차림의 보정각주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이를 보았다. 그는 촛불을 들어 아이의 눈을 한참이나 살피다가 맥을 짚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가 한참 후에야 손을 거두었다.

“묘한 아이입니다.”

“무슨 뜻인가?”

“전혀 다른 기운이 한 몸에 존재합니다.”

“전혀 다른 기운?”

“예. 아무래도 수시로 학대를 받은 탓으로 여겨집니다.”

“흐음. 계속 말하게.”

“신체 곳곳에 학대를 받은 정황이 다분하게 보입니다. 문제는…… 그 학대를 받는 동안 이 아이는 울광증(鬱狂症)에 걸린 것 같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란 소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울광증이 독특한 양상을 지닌 듯합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예, 맹주님.”

보정각주가 입술을 축이고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이 아이는 학대를 받는 동안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본능이었을 겁니다. 이는 학대받는 아이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죠.”

“그래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학대받는 자신은 따로 있고, 스스로를 독하고 강하게 만드는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멸시하고 안하무인처럼 행동하는 자신도 있지요. 이런 식으로 다중의 인격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혹시 그 인격 중 하나가 무공을 익힌 것인가?”

“애초에 체질적으로 무공을 익히기에 좋은 몸을 타고나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깨너머로 익힌 무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호오, 재능이 있단 말이지.”

“예, 맹주님. 아마도 이 아이의 경우는 인격의 분열이 심화될수록 그 재능이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척 위험하겠지요.”

“그렇군. 알겠네.”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정각주가 공손히 인사하고는 물러갔다.

묵천악은 아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의 재능을 내가 일깨워 주마. 앞으로 너의 이름은 무극이다. 한계가 없다는 뜻이지.”

“…….”

“나를 따라오너라.”

묵천악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무극은 그 말만은 따랐다.

* * *

또로로롱.

맑은 소리를 울리며 찻물이 찻잔에 담겼다

시녀가 공손히 읍소하고는 물러가자, 환일문주(幻日門主) 백산이 묵천악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입을 열었다.

“드시지요.”

“그간 잘 지냈는가?”

묵천악은 찻잔에 손을 대지도 않고 물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자네 문파는 본 맹이 비호하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면 지체 없이 말하시게.”

“감사합니다.”

백산은 공손히 대꾸했지만 내심 떨떠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환일문은 원래 사파로 분류되었던 지방방파였다.

한데 묵천악이 맹주가 되면서 환일문을 정파로 인정해주고 무림맹 가입도 승낙했다.

물론 그동안 환일문이 무림맹에 갖다 바친 뇌물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백산은 묵천악 곁에 맹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무극을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신지요?”

“자네가 좀 봐줬으면 하는 아이가 있어서.”

“아이라면 역시…….”

“그렇네. 이 아이일세.”

묵천악이 희미하게 웃으며 무극을 힐끔 보았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시게.”

백산이 손을 뻗어 무극의 손목을 잡았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특이한 아이군요.”

“그렇지. 본 맹의 보정각주 말로는 자아가 분열되어 있다고 하던데. 어떤가? 쓸 만하게 만들 수 있겠나? 자네 문파의 환혼대법(幻魂大法)을 사용해서.”

순간 백산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환혼대법.

바로 이 술법 때문에 환일문은 오랜 세월 사파라는 낙인이 찍혀 핍박을 받아왔다.

실제로 환혼대법은 다소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술법이었다.

환혼대법이란 각종 침과 추궁과혈 등을 통해서 상단전에 영향을 준 다음 정신을 일종의 환각 상태로 이끌어 고강한 무공을 구사하도록 만드는 술법이었다.

대체로 이 술법에 당하면 광증이 심해져 광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한데 무림맹주가 직접 환혼대법을 언급하다니.

게다가 저렇게 어린아이에게 환혼대법을 쓰란 말인가?

“가능하긴 합니다만 이 아이의 경우 특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위험하다면 어떤?”

“자아분열이 더욱 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아이를 다스리기가 까다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열을 키우는 느낌이랄까요?”

“흐음. 하지만 잘만 키운다면 하나가 아니라 열의 수하를 두는 것과 같은 게 아닌가?”

“하지만 이 아이가 견디지 못할 시에는…….”

“일단 시도해 보게.”

“…….”

“모진 환경에서 버티고 버텨 살아남은 녀석이야. 아마 환혼대법도 버텨낼 걸세.”

백산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찻잔만 바라보았다.

사실 환일문이 무림맹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환혼대법을 영구 폐기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백산 역시 환혼대법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약속한 것이었고.

한데 맹주와 이런 대화를 나눌 날이 올 줄이야.

금기처럼 여겨졌던 그 대법을 아이에게 쓰라니.

“자칫 아이가 망양증(亡陽症)에 걸려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네.”

“……!”

“어차피 주운 걸세. 없는 셈 치고 시도하게.”

“맹주님. 대체 무엇을 위해서…….”

“환일문주.”

“예, 맹주님.”

묵천악의 표정이 전에 없이 차갑게 식었다.

그가 백산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사파 나부랭이를 무림맹에 입맹시켜 줬더니, 정말 뭐라도 된 줄 아시는가?”

“……!”

“갑자기 정의와 협의가 넘쳐서 주제와 분수를 잊었나?”

“맹주님, 말씀이 좀…….”

말을 꺼내던 백산은 묵천악의 살벌한 눈초리를 받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묵천악이 손을 뻗더니 탁자 끄트머리까지 찻잔을 밀었다. 찻잔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기억하게. 자네들은 지금 선에 걸친 자들이야. 삐끗해서 헛디디면 저쪽으로 떨어진단 말일세. 제왕의 가문이라 칭송받던 남궁가가 지금 어떤 지경인지는 자네도 알 걸세. 하물며 시골 방파 따위야 슬쩍 밀어내기만 해도…….”

묵천악이 손가락에 힘을 주자 탁자 끝에 걸친 찻잔이 맥없이 떨어졌다.

카차앙!

산산이 깨진 파편 사이로 찻물이 서서히 번져갔다.

꿀꺽!

백산이 굳은 표정으로 찻잔만 내려다보자, 묵천악이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세뇌를 시켜주게. 망가지면 버려도 좋아. 하나 자네라면 잘 해주리라 믿네. 환일문이 억울한 누명을 쓰면 안 되잖은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참, 이 아이 성을 짓지 않았는데…… 자네가 백씨니까 이 아이도 백무극이라 하면 되겠군.”

무극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럼 또 보세.”

* * *

오랜 기억을 더듬던 묵천악이 연기로 자욱한 대연무장을 내려다보았다.

“연막탄은 남궁천의 짓인가?”

“정확하진 않으나, 모용 단주의 계획에는 없었기에 아마 그럴 것으로 추정됩니다.”

총관이 당혹감을 감추며 대답했다.

묵천악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중얼거렸다.

“늘 예상을 깨는 녀석이군. 백무극은 어쩌고 있나?”

“아직 조용한 것 같습니다만 곧 움직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그 아이가 이번에 뭔가를 좀 보여줬으면 좋겠군.”

묵천악이 불안을 억누르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지만 그는 까마득하게 몰랐다.

백무극이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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