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운명에 맞서는 놈들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더 재미있는 것?”
이 녀석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나?
모종의 불안감이 싹트는 와중에 모용신은 문득 자신의 심리 상태를 깨닫고 피식 웃어 버렸다.
‘어이가 없군.’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지금 상황은 아무리 봐도 자신에게 유리한 게 아닌가?
먼지로 시야를 가리고, 세침이 날아들고, 남궁화가 위협을 받고 있다.
물론 남궁화가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넘겼다곤 하지만 아직은 자신이 만든 판이다.
한데 이제 약관에 지나지 않은 후기지수 한마디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가소로운…….’
그러고 보면 남궁천은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다.
모든 상황에서 압도당하고 있음에도 말 몇 마디로 자신을 이만큼 신경 쓰게 만들다니.
“물에 빠져도 주둥이는 뜰 녀석이구나.”
“글쎄…… 주둥이만 뜰지 공중부양을 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오냐, 그럼 어디 그 재미있는 짓을 해보아라.”
십중팔구 허세라고 생각한 모용신이 싸늘한 웃음을 그리며 턱짓을 했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후회할 텐데.”
“그건 내가 보고 판단하지.”
“좋아, 그럼.”
순간 남궁천이 왼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공력이 담긴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모용신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이 녀석, 진짜 무슨 수가 있는 건가?’
* * *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하나도 보이지 않잖아?”
“조용히 해봐! 소리라도 들어보게!”
관중들이 너도나도 소리친다.
그런 와중에도 불명회주 흑선은 착 가라앉은 눈길로 비무대를 응시하기만 했다.
먼지가 피어올랐으니 곧 신호가 떨어질 터.
아니나 다를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나왔다.
따악!
‘신호다!’
흑선이 손을 들어 수신호를 내렸다.
순간 관중석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불명회원들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강호신룡! 이겨라!”
“청랑단주! 구관이 명관이라는 걸 보여주어라!”
그들은 소리만 내지르는 게 아니라 손에 잔뜩 들고 있던 찢어진 종잇조각을 마구 집어 던졌다.
찢어진 종이는 응원 도구로 많이 사용했기에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게 바람잡이들이 설치기 시작하니 관중들도 덩달아 신이 나서 함성을 내지르며 천과 종이를 찢어 던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힘내라!”
“무림맹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그렇게 종이 파편이 어지럽게 휘날리는 가운데 마침 누군가 폭죽을 섞어 던졌다.
삐익, 팡!
느닷없는 폭죽이었지만, 역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응원 도구쯤으로 여기는 분위기.
그런데 폭죽은 하나가 아니었다.
삐이익, 삐이익, 파팡!
파파파팡!
순식간에 대연무장 위로 폭죽이 마구 터지면서 매캐한 연기가 주위를 자욱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비무대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폭죽 연기까지 퍼져 나가니 관중석은 한 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제야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니미럴! 누가 폭죽을 터뜨리는 거야?”
“그만! 그만하라고! 안 보이잖아!”
“쿨럭, 쿨럭! 이놈의 연기!”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약속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소가주님을 노리는 자들을 색출한다!”
“존명!”
손우곤의 명령에 창응대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또한 남궁표가 이끌고 온 살곡의 살수들도 관중들 사이로 스며들 듯 흩어졌다.
샤샤샤샤샥!
* * *
파파파파팡!
여기저기에서 폭죽이 터지면서 주변이 자욱한 연기로 덮일 때, 관중석에 서 있던 모용강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이건……?’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한데 모용강은 형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연막은 비무대에 한정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건 남궁천 쪽인가?’
모용강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침 옆에서 누군가 모용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세.”
“먼저 가시죠.”
모용강이 돌아보며 대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청랑단 부단주 최팔.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비무대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겠네.”
“…….”
걸음을 성큼 옮기던 최팔이 문득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모용강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형님을 의심하지 말게.”
“……?”
“자네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단주님을 존경하네. 뭐가 옳은 것인지 모를 때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게. 그런 후에 결과를 보란 말일세. 그럼 그게 결국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최팔이 관중석 난간까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이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모용강은 최팔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뭐가 옳은지 모를 때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세상 편하게 사는군.’
모용강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비무대 쪽에서는 간간이 검을 섞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소리만 들어도 싸움이 어떤 양상으로 흐르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지금은 호각지세를 보인다.
‘정말이지 남궁천…… 너는 대단한 놈이구나.’
형님은 일찍이 맹주와 뜻을 함께했다. 맹은 남궁천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런 만큼 남궁천이 이 비무 대회에서 우승할 가능성은 없었다.
딱 여기까지가 그의 운명이었다.
한데…….
‘난 지금 뭘 망설이는 거지?’
어젯밤 모용신이 자신을 찾아왔다.
모용신은 냉엄한 눈길로 숙소를 한 번 훑어보고는 자신에게 물었다.
“뭐 하고 지내느냐?”
온정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매일 수련하면서 맹에서 견식을 하고…….”
“뭐 하고 지내느냐?”
대답을 가로지르며 같은 질문이 다시 날아왔다.
까득.
모용강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련하고 있습니다.”
“뭐 하고 지냈느냐?”
“…….”
모용신은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모용강이 착 가라앉은 눈길로 모용신을 보았다.
방 안을 훑어본 모용신이 모용강에게 걸어왔다. 실내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도저히 가족이 만난 자리 같지 않았다.
모용신은 뱀처럼 차가운 눈길이 모용강의 전신을 훑었다.
모용강이 씹어뱉듯이 물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겁니까?”
“원하는 대답? 너는 단 한 번도 내 원대로 행동하지 않았는데, 그런 질문을 하니 새삼스럽구나.”
“그만 좀…….”
“한심한 놈.”
“……!”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내일 비무 대회에서 내가 남궁천을 상대한다.”
“그래서요? 제가 나가는 것도 아닌데 왜 제게 기회라는 겁니까?”
“닥치고 들어라.”
모용강이 입술을 꾹 씹으며 노려보자,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을 이어갔다.
“너뿐만이 아니다. 내일은 남궁천을 노리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때 네가 두각을 보이도록 해라. 하면 맹주님 눈에 들 수 있을 테니.”
“남궁천과 형님이 비무하는 것 아닙니까? 언제 어떻게 노리라는 겁니까?”
“비무 중에 연막을 뿌릴 것이다. 물론 비무대에만 뿌려질 터. 그때 재량껏 너는 남궁천을 공격하면 된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모용강의 말에 모용신이 눈을 더욱 가늘게 여미고는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냐?”
“남궁천 정도면 형님 혼자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모른다.”
“……!”
모용강이 흠칫거리고는 모용신을 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적어도 모용신은 남궁천을 충분히 꺾을 수 있다고 할 줄 알았다.
한데 모르겠다니.
남궁천이 그 정도로 강하다는 건가?
모용강의 눈동자가 흔들리는데, 모용신이 예의 그 차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중요한 건 남궁천이나 나의 실력이 아니다. 반드시 내일 남궁천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네 손으로 이루란 말이다.”
“형님이 직접 하시죠.”
“물론 나도 할 것이다. 모르겠느냐? 아마 넌 손댈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남궁천을 노릴 것이니까. 그럼에도 내가 너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
“그래도 동생이니까 말해주는 거다.”
“동생이라서…….”
모용강이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모용신이 미간을 좁혔다.
“왜 웃지?”
“동생에게 참 좋은 걸 가르쳐 준다 싶어서요.”
“내가 이곳에 올라선 비결을 너에게도 알려주는 것이다. 그게 싫으냐?”
“글쎄요. 형님의 방식이 옳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심한. 강호에서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결과가 누구의 손에서 어떻게 나왔는지가 중요할 뿐. 판단하기 어려울 땐 그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럼 나중에 저절로 판단이 될 테니.”
“생각해 보지요.”
슈우우욱, 콱!
일순 모용신의 손이 빛살처럼 뻗어 나와 모용강의 턱을 움켜잡았다.
거친 동작과 달리 모용신의 표정은 감정이라곤 조금도 깃들지 않은 것처럼 냉랭할 뿐이었다.
“누가 네게 생각을 하라고 했지?”
“……!”
“다시 말하지. 조금이라도 본 가에 헌신하겠다면, 또 맹의 일원으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고 싶다면, 내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궁천을 죽여라. 물론 너 따위가 해내기에는 어렵겠지만, 발악이라도 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거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팍!
쿠당!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진 모용강이 턱을 쥐고는 기침을 쏟아냈다.
모용신은 한심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무심한 투로 말을 뱉었다.
“너는 내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게 본 가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지. 그 운명을 거부하지 마라.”
‘빌어먹을 운명 같은 소리!’
상념에서 빠져나온 모용강이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언제부턴가 모용신은 아버지보다도 더 지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아마 모용신의 친모이자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 병사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모용신은 동생 모용강을 무척이나 아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죽은 후로 모용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모용강을 보는 눈에는 늘 독기가 가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시선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한 시선을 온몸으로 받는 남궁천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다.
남궁천은 지금도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정한 운명을 거부한다는 듯 모용신과 검을 맞대고 있다.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남궁천……! 넌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싸울 수 있는 거냐?’
이따금씩 비무대에서 불꽃이 터진다.
호각지세.
‘나도…… 내 운명을 거부할 수 있을까?’
꾹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 *
대연무장 아래로 내려선 최팔은 비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연막탄이 대연무장을 가득 채우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오히려 잘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몇 걸음을 옮기던 그가 곧 멈춰 서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자욱한 연무 너머에서 그림자들이 나타나더니 이내 최팔을 가로막으며 섰다.
최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들은……?”
“또 보네요.”
팽수혁과 윤종승, 그리고 유현과 진소홍이 씨익 웃으며 서 있었다.
팽수혁이 태도와 혈염도를 양 어깨에 척 걸치고는 말했다.
“빨리 끝냅시다. 우리도 비무 끝낸 지 얼마 안 돼서 삭신이 쑤시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