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올가미
“아버지…… 천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남궁화가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남궁검을 슬쩍 돌아보았다.
하지만 남궁검이라고 그 내용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워낙 유별난 아이가 아니던가?
격장지계를 펼치는 것일 수도 있고, 뜻밖에도 진중한 대화를 나누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남궁천의 말을 들은 모용신이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격장지계든 뭐든 간에 비무에 있어서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렇게 비무대 위의 두 사람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
남궁검이 흠칫거리더니 눈살을 슬쩍 구겼다.
곧이어 아주 짧은 순간 남궁검의 전신에서 살기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찰나에 지나지 않았기에 바로 옆에 선 남궁화만 겨우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버지……?”
일시적으로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한기를 느낀 남궁화가 깜짝 놀라서 남궁검을 보았다.
남궁검의 시선은 여전히 비무대로 향해 있었지만, 어딘지 의식은 다른 쪽을 향해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침 남궁검이 전음을 흘렸다.
[움직이지 마라.]
“……!”
남궁화는 곧장 남궁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는 대신 곧바로 비무대로 시선을 옮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전음을 이용해서 물었다.
[고수인가요?]
[그렇다.]
[저를 노리는 건가요?]
남궁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남궁화가 미간을 좁히고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수많은 사람이 밀집해 있는 관중석.
그런데 그중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남궁검이 고수라고 말할 정도면 적어도 초절정의 영역에 올라 있으리라.
그리고 남궁검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확한 위치까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일 테고.
‘그런데 왜 하필 나를……?’
그 의문의 답을 준 사람은 남궁검이었다.
[아무래도 널 인질로 삼은 모양이다.]
[……!]
그제야 남궁화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결국 적들은 자신을 이용해서 남궁천을 잡으려는 것이다.
‘이런 비열한……!’
남궁화가 저도 모르게 귀빈석의 맹주를 올려다보았다.
[모른 척해라.]
[아, 예, 아버지…….]
다행히 맹주는 남궁천에게 집중하는 것인지 이쪽을 보지 않았다.
순간 감정적으로 욱하는 바람에 실수할 뻔했다.
[천이가 흔들리진 않겠죠?]
[우리가 믿는 만큼, 녀석도 우리를 믿길 바라야겠지.]
[네.]
[천이 걱정은 말고 너부터 대비를 하는 게 좋겠다.]
[네, 아버지.]
전음을 마친 남궁화가 기감을 최대한 펼쳐서 주변을 더듬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인 데다 무인의 수가 상당하다 보니 누가 자신을 노리는 것인지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남궁검은 남궁표와 손우곤에게도 전음을 흘려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대비하도록 했다.
관중석에서 분주한 대응이 이뤄지는 동안, 남궁천은 굳어버린 듯 말을 잃은 모용신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왜 말이 없어요? 진짠가 보네.”
피식.
모용신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이번엔 남궁천이 굳은 표정으로 모용신을 보았다.
“그 웃음은 인정한다는 의미인가?”
“좋을 대로 생각하게.”
“그럼 인정한다는 뜻으로.”
“그런데 말이야.”
“……?”
“자네 말대로 맹주께서 자네를 없애려고 하신다면, 남궁가는 온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말 그대로일세. 자네 말대로 내가 자네를 죽일 작정으로 이곳에 올라왔다면, 불씨로 남을 남궁가도 위험하지 않겠는가?”
모용신의 표정에 서늘한 웃음이 서린다.
반대로 남궁천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모용 단주.”
“아까부터 말이 짧군.”
“어차피 여기 오른 이상 계급장 떼고, 밥그릇 떼고 붙는 거니까.”
“해서?”
“당신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자꾸 건드리고 있어.”
“그렇긴 하지. 하나 이미 건드려 버린 것을 어쩌겠나?”
모용신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자,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궁세가 사람들이 있는 곳을 힐끔 보았다.
그 시선을 읽은 모용신이 나직이 뇌까렸다.
“저기 저 여자가 네 이모였던가? 이름이 남궁화였지?”
“……!”
“이제 알겠나? 맹주님이 올가미를 던질 때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않아. 선택하게. 네 어미의 뒤를 따를 자가 누구일지. 자네인가? 아니면 저 여자인가?”
“한마디로 고분고분 뒈지라는 거네?”
모용신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남궁천이 머리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마치 좌절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모용신은 내심 싸늘한 웃음을 그렸다.
‘이제 알겠느냐? 세상은 네 생각처럼 단순하게 흐르지 않는다. 강호는 비정한 곳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를 얻어내야만 하는 곳. 그게 바로 강호다. 너는 강호를 깨닫기 전부터 너무 설쳤다.’
오늘 남궁천은 비무대에서 죽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죽진 않더라도 단전을 깨트려 영구히 무공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모용신이 쐐기를 박듯 입을 열었다.
“무의미한 저항은 이제 멈추도록. 네 아비도 결국 그 올가미를 벗어나진 못했으니.”
“……닌데.”
“뭐?”
“아닌데?”
남궁천이 고개를 들고 모용신을 노려보았다.
순간 모용신이 흠칫거리고는 물러날 뻔했다.
고개 든 남궁천의 얼굴이 어딘지 광기에 질린 듯했기에. 어찌 보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분노에 차서 당장 울 것 같기도 한 표정.
‘중압감에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가?’
남궁천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말을 뱉었다.
“맹주의 그 올가미. 이미 여러 번 빠져나가 봤거든.”
“이미 여러 번……?”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난 순순히 뒈질 생각이 없어.”
“너…… 저 여자가 목숨을 잃어도…….”
“됐어. 네 말대로 내가 실컷 얻어터지다가 뒈지면? 아니, 뭐 단전이라도 부서지면? 우리 이모가 ‘아이고, 내 조카가 날 살리려다가 잘 죽어줬구나. 참 고맙고 착하다’ 하고 함박웃음이라도 지을 것 같나?”
“…….”
“내가 아는 한 우리 이모는 그럴 사람이 아냐. 오히려 내가 당당하게 싸워주길 바라겠지.”
“그렇다고 저 여자의 죽음을 상관하지도 않겠다는…….”
“죽긴 누가 죽어? 그들이 날 믿는 만큼, 나도 그들을 믿는다.”
말을 마친 남궁천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중해졌다.
그 순간 모용신은 더 이상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틀렸군.’
그렇다면 신호를 보내야 한다.
지금까지 한 말이 단순한 겁박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수밖에.
다행히 거리는 지척이다.
모용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훌륭한 조카군. 하나…….”
모용신의 손이 검파로 향한다. 그와 동시에,
“무책임하구나!”
말을 쏟아내면서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었다.
쒸아아아아앙!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용신은 발검을 하는 것과 동시에 결과를 예상했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상대는 검파에 손을 얹지도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일격필살이다.
하나 그간 남궁천의 기지로 보았을 때 어쩌면 목숨은 건질 수도 있으리라.
‘네놈이 내 공력의 흐름을 미리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흑사검법의 발검술을 당하진 못할 터!’
한데 그의 예상을 깨는 일이 벌어졌다.
쩌까아아아앙!
놀랍게도 남궁천은 벽라검을 뽑아 들고선 모용신의 흑연검(黑軟劍)을 받아낸 게 아닌가?
‘이걸…… 막아?’
모용신의 표정이 일순 흔들렸다.
그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중들은 열띤 함성을 내질러댔다.
“우오오오오! 시작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비무가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남궁검과 남궁화도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화야!”
“네, 아버지!”
파라라라라라라!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지를 때, 남궁검은 남궁화를 끌어당기며 돌개바람처럼 회전했다.
삐비비비비잉!
역시나 예리한 세침들이 가느다란 소리를 울리며 두 사람을 마구 스쳐 지나갔다.
티티티잉!
세침 몇 개가 남궁검의 장력에 튕겨 하늘로 날아갔다.
“역시 한 놈이 아니구나!”
“한 명은 제가 찾았어요!”
“가라!”
“네, 아버지!”
남궁검과 남궁화가 동시에 각각의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주님! 저희도 찾았습니다!”
“가겠습니다!”
남궁표와 손우곤도 버럭 소리치며 인파를 헤집으며 달려갔다.
관중석 복판에서 갑자기 분주한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잔뜩 흥분해서 들뜬 관중들의 눈길을 끌 만큼은 아니었다.
한편 벽라검으로 검신을 막아낸 남궁천은 모용신에게 바짝 다가서며 싸늘하게 웃었다.
“거, 성격 더러우시네. 말하다 말고 갑자기 칼질이라니.”
“……!”
모용신은 대답 대신 곧장 공력을 끌어올렸다.
다음 순간 연검이 휘청 휘어지더니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벽라검을 휘감으며 뻗어나갔다.
퀴리리리리링!
비록 첫 공격은 실패했지만, 이번만큼은 먹혀들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빠르게 뻗어간 뱀 대가리가 그대로 남궁천의 손등을 물어뜯었다.
콱!
‘끝이군. 이대로 곧장 품을 파고든다면…….’
연환식을 준비하던 모용신은 순간 눈을 부릅뜨고는 얼른 연검을 들어 올렸다.
쩌까아아앙!
이번에도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면서 모용신의 몸이 휘청거렸다.
“큿!”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모용신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찌나 강맹한 공격이었는지 아직도 손이 저릿하게 울리는 것만 같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어째서? 분명 손등을 찍었을 터인데?’
분명 검봉이 남궁천의 손등을 찍었다.
한데 남궁천의 손이 멀쩡하지 않은가?
‘아……!’
뒤늦게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모용신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랬군. 기물을 착용하고 있었구나. 네 어미가 사용하던 신룡갑인가?”
“생일 선물로 받은 거라서. 헤헤.”
남궁천이 속없는 사람처럼 웃는다.
빠직.
모용신은 이마에 핏대가 솟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저 녀석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수준이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슬쩍 관중석을 보니 남궁화를 노린 공격도 제대로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
“내가 뭐랬어요?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니까.”
“안심하기엔 아직 이를 텐데.”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면 누가 안심하게 될지 두고 봐야겠지!”
“바라던 바!”
파파앙!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을 차면서 튀어 나갔다.
모용신이 순간 흑연검으로 바닥을 쓸었다.
콰가가가각!
파편과 먼지가 풀썩 일어나면서 주변을 안개처럼 감쌌다.
그 바람에 지켜보던 관중들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그러는 사이 다시 육중한 금속성이 대연무장을 흔들었다.
쩌어어엉!
어느새 검을 맞댄 남궁천과 모용신.
삐비비비비잉!
찰나 먼지를 뚫으며 세침 수십 개가 남궁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휘리리리릭!
남궁천이 재빨리 몸을 회전하며 세침을 피했다.
그 일련의 동작이 몹시 화려한 데다 신속해서 모용신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음 순간, 남궁천이 그대로 모용신에게 쇄도했다.
까앙!
다시 한번 금속성이 터지면서 검을 맞댄 두 사람.
남궁천이 히죽 입매를 비틀었다.
“재미있는 짓을 하려고 하네. 그럼 이번엔 내가 더 재미있는 짓을 보여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