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25화 (324/508)

325. 올가미

뚝딱. 땅! 땅!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묵천악은 철정각 후원을 거닐면서 착 가라앉은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서성였을까?

마침 그의 곁으로 한 청년이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맹주님.”

“왔느냐?”

묵천악이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청년은 가만히 서서 맹주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묵천악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대신 그는 저만치 철정각에서 일하는 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림맹의 모든 병장기가 제조되는 곳.

뜨거운 용광로에 쇳덩이를 녹이고, 그것을 틀에 담아 꺼냈다가 쇠망치로 두드리고 다시 고인 물에 담금질을 한다.

무림맹이 얼마나 바쁜지 알고 싶다면 철정각을 들르라는 말이 있다.

철정각이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병장기가 닳고 망가질 일이 많았다는 뜻이니까.

“무극아.”

마침내 묵천악의 입이 열렸다.

그때까지 잠자코 서 있던 백무극이 슬쩍 돌아섰다.

여전히 백무극은 어딘지 맹한 표정이었지만 맹주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깍듯했다.

“예, 맹주님.”

“나는 종종 이곳에 와서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왜 그런지 아느냐?”

“철정각이 분주하면 그만큼 무림맹이 강호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니까요.”

백무극이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묵천악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하나 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지.”

“…….”

“저기 뭐가 보이느냐?”

맹주가 철정각 한쪽에 쌓인 고철더미를 가리켰다. 백무극이 무심한 눈길을 던지고는 보이는 대로 대꾸했다.

“이가 부러지고 무뎌진 쇠가 보입니다.”

“그래. 쓸모없어진 병장기를 저렇게 분리해 둔 것이다. 저 쇳덩이들의 운명을 알고 있느냐?”

“용광로에 던져집니다.”

“그렇다. 아름답지 않으냐? 쓸모없는 것들을 다시 새롭게 만든다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저 반사적으로 대꾸한 말이었기에 영혼이 담기진 않았다.

묵천악도 백무극과 깊이 있는 대화를 기대한 건 아니라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무극아.”

“예, 맹주님.”

묵천악이 고개를 돌려 백무극을 보았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내 뜻대로 휘두르는 병장기조차도 날이 무뎌지면 저리 되는 법이다. 그나마 병장기는 재활용이 가능하다. 녹이고 다시 태어나는 게 가능하지. 하나 사람은…….”

“…….”

“고쳐 쓰는 법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

“……명심하겠습니다.”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게냐?”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맹주님에게요.”

그제야 묵천악이 만족한 듯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백무극이 그 뒤를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랐다.

“내일 남궁천이 비무를 치를 것이다.”

“예.”

“상대는 모용신 단주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를 노려서 네가 맡은 일을 하도록 해라.”

“비무 중에 말씀입니까?”

“그렇다. 너만 나서진 않을 것이다.”

“하면?”

“많은 이들이 남궁천을 노릴 것이다. 네 임무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모용신 단주를 거드는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

“…….”

“너는 그간 내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기억해라. 이가 부러지고 무뎌진 검은 결국 저 용광로에 던져지는 신세라는 것을.”

“예.”

백무극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자, 묵천악이 그대로 걸음을 옮겨 철정각 후원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백무극이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철정각의 용광로를 물끄러미 보았다.

문득 그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염병할, 그러게 진작 남궁천을 죽였어야지.”

일극이었다.

무극이 무심한 듯 대꾸했다.

“죽일 수는 있고?”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지!”

“해봤잖아.”

“실패했으니 다시 해야지!”

“몇 번을 해도 똑같아. 남궁천은 강해. 지금은 더 강해.”

“그래서 쫄았냐? 병신아.”

“시끄러워.”

“쫄았네, 쫄았어. 으이구, 병신. 이래서야 무슨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거야? 맹주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이번에도 실패하면 우릴 그냥 버린다잖아? 버리기만 하면 다행이지. 만약 진짜로 저 쇳덩이처럼 용광로에 던져 넣기라도 하면…….”

일극이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내 차분해진 무극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쫄았나?”

“쫄긴 누가 쫄아, 인마!”

“쫄았네. 병신.”

“야, 아니라니까! 뒈질래?”

“내가 뒈지면 너도 뒈지는 거야.”

그렇게 백무극은 철정각 후원에서 혼잣말을 연신 이어갔다.

만약 지나가는 누군가 보았더라면 필시 그를 광인이라고 여겼으리라.

* * *

대연무장에 또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열기.

“자아! 드디어 오고야 말았습니다! 강호신룡과 청랑단주 모용신 대협의 대결! 여러분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 아아!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우리의 운명은 어디로 흐를 것인가? 이번 대회로 이 두 사람의 운명뿐만 아니라, 우리의 운명도 바뀐다! 걸고, 걸자! 돈 놓고, 돈 먹자! 자자, 돈 걸고 더 재미있게 응원하자!”

관중석을 돌아다니며 호객행위를 하는 노름꾼들이 넘쳐난다.

그만큼 오늘 비무 대회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장안의 화제인 강호신룡과 현 무림맹 최고 무력 집단 수장인 청랑단주의 대결.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리라.

실제로 사람들의 예측은 정확하게 반반으로 갈라섰다.

경험과 노련함을 중시하는 자들은 대체로 모용신을 지지했고, 신선한 바람을 우선시하는 자들은 남궁천이 이길 거라며 기대했다.

그럼에도 실제로 돈을 걸고 도박하는 자들은 모용신의 승리를 점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돈을 잃어도 좋으니까 강호신룡이 이겼으면 좋겠군. 뭔가 무림맹에 신선한 바람이 불었으면 한달까?”

“하하. 나도 마찬가질세. 하나 냉정하게 보면 강호신룡은 아직 후기지수에 지나지 않잖나? 아마 이기긴 어려울 거야.”

“그래도 지금껏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나?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

“그건 그렇지만 이 기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군.”

“이래서야 돈을 건 나보다 자네가 더 인색하잖아?”

“그런가? 아무튼 나도 강호신룡이 이기길 바라네. 이변은 언제나 재미있으니까.”

왁자지껄 관중들이 떠드는 중에도 시종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무대를 내려다보는 이가 있었으니…….

“준비는 끝난 건가?”

귀빈석에 앉은 묵천악이 총관에게 물었다.

총관이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예, 모두 각자의 자리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모용 단주에게도 상황을 잘 설명했겠지?”

“물론입니다.”

“별말은 없던가?”

“예, 맹주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모용신이 마음에 든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비정한 강호의 생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흔해 빠진 위선자들과는 확실히 다르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총관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저어…… 맹주님.”

“말하게.”

“조금은 느긋하게 생각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으음?”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총관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린다.

묵천악은 잠시 총관을 물끄러미 보았다.

총관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먼저 꺼낸 적은 없다. 아니, 정말 오래전 진천랑에게 비선향 대부분을 잃고 이성을 잃었을 때 이런 모습을 보였었지.

당시에도 총관의 직언이 아니었다면 아마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큰 실수를 했으리라.

‘그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중에 균열이 가고 있었던 건가?’

문득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총관.”

“예, 맹주님. 듣고 있습니다.”

총관이 더욱 허리를 숙인다.

본인이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것에 대해 바짝 긴장한 태도다.

묵천악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맙군.”

“그저 소신의 쓸데없는 기우로 맹주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자네는 내가 흔들릴 때마다 늘 다잡아주었지.”

“과찬이십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오늘 우리가 사냥에 성공할 것 같은가?”

총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입을 열었다.

“그간의 남궁천을 보면 확률은 반반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반반이라. 그리 높지 않군.”

“하나 맹주님께서는 아직도 많은 수를 남겨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조금 더 여유를 가지셔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잘 알겠네.”

묵천악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총관이 내심 가슴을 쓸었다.

‘다행이군. 아직 정서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어.’

하지만…….

오늘은 맹주가 사냥에 성공하기 위해서 정말 공을 많이 들였다.

만약 오늘도 실패한다면 맹주의 심리적 압박감은 이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가 될 것이다.

총관이 난간으로 걸어가서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남궁천과 모용신이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비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남궁천…… 자네는 오늘도 넘길 수 있겠는가?’

어떤 의미에서든 오늘의 비무 대회 결과가 남궁천과 맹주에게는 특이점이 될 확률이 높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천중에 떠오른 태양이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총관이 깃발을 콱 움켜쥐었다.

모든 준비는 끝난 상태.

이제 관중석의 모든 사람들이 총관을 올려다보고 있다.

총관은 관중석 사이사이에 섞여든 맹주의 사람들을 가볍게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펄럭!

그가 깃발을 세차게 휘둘렀다.

“우와아아아아아!”

“강호신룡 이겨라!”

“청랑단주의 위엄을 보여주어라!”

관중석에서 함성이 솟구쳐 올랐다.

* * *

“대단한 인기군.”

모용신이 싸늘한 웃음을 그렸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단주님도 만만치 않으신대요?”

모용신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안 된다고 하면 안 물어보실 건가요?”

“그건 아니지.”

“어차피 그럴 거면서. 뭔데요?”

시종 껄렁거리는 자세에도 모용신은 싸늘한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왜 적랑단주 선발전에 참가한 건가?”

“그야 본 가를 대표해서 무림맹 최고 조직을 이끌고, 나아가 본 가의 위상을…….”

“그런 상투적인 대답을 원한 게 아니네. 좀 더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군.”

“…….”

남궁천이 모용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진심을 몰라주네.”

“너는 본 맹에 의해 척살당한 대살성의 혈육이지. 그런 자네가 적랑단주가 된다면 본 맹의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건가? 나는 이런 모험을 어째서 한 것이냐고 묻는 걸세.”

“그럼 그 전에 나도 하나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저벅저벅 걸어왔다.

비무에 참가한 사람이 검도 꺼내 들지 않고 상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자 지켜보는 관중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남궁천의 행동이 뜻밖이긴 했지만 모용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바로 앞까지 다다른 남궁천이 이내 싸늘한 웃음을 그렸다.

“맹주가 날 죽이라고 시키더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