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올가미
달그락.
패력궁 천무류가 찻잔을 내려두며 총관을 물끄러미 보았다.
“총관께서 이리 누추한 곳까지 어찌 오셨소?”
“허허. 누추하다니요. 감히 누가 천 각주가 계신 곳을 누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총관께서 들락거릴 정도로 화려한 곳도 아니긴 하지.”
총관이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무류는 말없이 차만 마셨다.
별것 아닌 말 한마디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남자다.
강인해 보이는 외모에 다부진 표정.
겉으로 보면 중년의 사내로 보이지만, 그의 나이는 실상 자신과 비슷할 것이다.
‘패력궁, 천무류.’
이 사람을 맹주의 측근으로 감아 버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쉽지 않은 일일 터.’
그런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되새기던 적서는 이제 완벽한 무림맹 총관이 되어 있었다.
총관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무 대회는 좀 어떻습니까?”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소만.”
역시 칼 같은 사람.
아니, 활을 쓰니 화살 같은 사람인 건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철시가 되어 명치에 박혀 드는 것만 같다.
불필요한 말은 다 없애려는 느낌이랄까?
하나 그럴수록 돌아가야 한다.
자칫 화법에 끌려가면 아무것도 못 한다.
‘우선은 맹주님의 뜻을 슬쩍 보여야지.’
그렇다고 그 속내까지는 들켜서는 안 될 일.
“맹주님은 각주가 적랑단주 선발전에 참가한 사실에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렇소?”
시큰둥한 대답.
정말이지 속을 모를 사람.
총관이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물었다.
“오래전부터 각주님께 요직을 권해왔는데, 번번이 거절하시더니 이번엔 어찌 참가하신 건지요?”
“그저 흥미가 동했소.”
“흥미라면 어떤……?”
“내게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미처 몰랐군.”
총관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또 화살을 날리는군.’
총관이 자연스럽게 찻잔에 손을 가져가며 대꾸했다.
“저야 늘 각주님께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각주님의 궁술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냥 터놓고 말합시다. 총관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정말이지 빈틈이 없는 자구나.’
하나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야 있겠나?
그것은 상대가 원하는 대화다.
자신이 원하는 대화가 아니다.
화법에 이끌려가지 않는 것이야말로 은마령이 지녀야 할 자질 중 하나가 아니던가?
총관이 이미 준비한 답을 내놓았다.
“사실 맹주님은 이번 선발전에서 당연히 각주님이 우승할 것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걸 어찌 확신하시고?”
“각주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비무대회에 참가자들 중에 각주님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강호의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이오.”
“물론 그렇긴 하지요. 하나 예상은 해볼 수 있는 일이지요. 더구나 천뇌당에서도 각주님을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고 있습니다.”
“천뇌당이 신령은 아니잖소.”
정말이 대화하다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이렇게 말이 안 통해서야.
그래도 인내심은 누구보다 뛰어난 총관이었다.
그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면 각주께서는 이번 대회에서 특별히 두각을 보이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모르겠소. 다른 사람이 싸우는 건 보지 않아서.”
“다른 참가자의 비무를 견식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소.”
허! 대단한 자신감이군.
총관이 내심 탄성을 흘렸다.
하나 패력궁이라면 그만한 자신감을 가져도 되리라.
“다만…….”
천무류가 말을 이어가자, 총관이 귀를 세웠다.
“다만?”
“모용신 단주가 제법 강하다고 듣긴 했소. 이미 청랑단주이기도 하고.”
“그렇지요. 모용 단주도 강하지요.”
“만약 모용 단주가 적랑단주가 되면 청랑단은 어찌 되는 거요?”
“아마 부단주가 맞게 될 것입니다. 시기상으로 현재는 적랑단주의 부재가 더욱 큰 문제인 만큼 그렇게 조율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혹시 청랑단주의 자리에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없소.”
이미 예상했던 답인지라 총관은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그럼 모용 단주를 가장 견제하시는군요?”
피식.
천무류가 가볍게 웃음을 흘리더니 총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총관.”
“말씀하시지요.”
“총관께서 보기에는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어찌 들으면 굉장히 광오한 말이었다.
마치 모용신도 자신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총관이 턱을 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요. 선뜻 떠오르는 자가 없군요.”
“아쉽군. 총관의 생각이 궁금했는데.”
“저는 그저 차기 적랑단주가 되실 분을 미리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만약 내가 총관의 말대로 정말 적랑단주가 된다면 그때부턴 관심을 꺼주시오.”
“어째섭니까?”
“나는 내 조직을 밖에서 간섭하는 걸 싫어하니까.”
됐다.
총관의 눈빛이 아주 잠깐 반짝였다.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던 대화에서 희미하나마 빛을 본 기분이다.
언뜻 흘려들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방금 패력궁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맹주님께도 잘 전달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귀한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얼마 전.”
“예?”
“남문 인근에서 염라단 삼 대주의 시체가 발견됐소.”
“예, 알고 있습니다. 맹에서도 흉수를 찾기 위해 서두르는 중이지요.”
“혹시 오늘 날 찾은 건 그 때문이 아니었소?”
“그건 아닙니다. 남문이 뚫린 것도 아니고, 염라단에서 벌어진 일이니 일차적 책임 소재는 염라단주에게 있지요.”
“그렇소?”
“혹 그게 신경 쓰였다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일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삼 대주를 그리 만든 흉수가 신경 쓰이는 것일 뿐이오.”
“아…….”
“염라단 삼 대주는 절정고수지. 한데 손도 쓰지 못한 채 당했소. 병장기에 당한 것도 아니오. 밟혀서 죽었소.”
“…….”
“보통 상대가 아니오.”
“그렇군요.”
“강호가 꿈틀거리고 있소.”
“그렇지요.”
총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멈췄다.
“각주님.”
“듣고 있소.”
“그래도 그 꿈틀거림에는 다행히 좋은 부분도 있지 않습니까?”
“좋은 부분?”
“가령 강호신룡이라거나.”
총관의 말에 천무류의 눈자위가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물론 총관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신경은 쓰고 있구나.’
그러고 보면 참으로 대단한 녀석이 아닌가?
이제 약관에 지나지 않은 후기지수 하나가 맹의 여러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다니.
천무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아이의 등장은 놀랍긴 하지.”
“말이 나온 김에…… 천 각주님은 어찌 보십니까?”
“남궁천이라는 그 아이 말이오?”
“예, 실은 맹주님께서도 강호신룡에 거는 기대가 커서요.”
“나 또한 그 아이에게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소. 하나 그 아이가 내 상대가 된다면 손속에 사정을 둘 생각은 없소.”
“그럼…… 여의치 않을 땐 생사결로 이어질 수도 있을까요?”
총관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자칫 남궁천을 죽여주길 바란다는 마음이 드러나서는 안 되기에.
다행히 천무류가 거기까지 눈치채지는 않은 듯했다.
“이미 비무가 시작된 순간부터 생사결이오. 누구 하나가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지 않는다면 죽어야겠지.”
“기권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 아이가?”
천무류가 되묻더니 피식 웃었다.
“그 신룡이 기권할 것 같소?”
“아니군요.”
“내가 최근 강호신룡의 비무를 지켜보진 않았지만, 그 아이와 승부를 지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요. 남궁천은 절대로 꺾이지 않을 눈빛을 가졌으니.”
됐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
이미 패력궁은 남궁천과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가?
‘가끔은 단순히 무공에만 심취한 자들이 다루기 쉬울 때가 있다니까.’
지금 패력궁의 심리는 무인으로서 우열을 가려보고 싶은 욕망에 가까우리라.
이유야 어쨌든 그런 각오가 맹주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부디 각주님께 무운이 따르길 빌겠습니다.”
“살펴 가시오.”
총관이 희미한 웃음으로 답례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 * *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궁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남궁천과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던 남궁검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왜 이리 소란이더냐?”
“가주님! 내일 소가주와 한판 붙을 녀석이 기권을 했답니다.”
“기권을?”
남궁검이 남궁천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남궁표를 돌아보았다.
“그게 사실이더냐?”
“예, 형님. 크하하! 우리 소가주의 무위를 보고 겁에 질린 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럼 다음 비무 상대는 누구냐?”
“그게…… 좀 까다롭긴 한데…… 모용신 단주입니다.”
“모용신이라.”
남궁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몇 개월 전 만났던 모용신을 떠올렸다.
확실히 쉽지는 않은 상대다.
그 역시 강호신룡이라는 별호를 들으며 무림맹 생활을 시작한 자였다.
어린 나이에 청랑단주 자리까지 올랐고, 맹주의 총애를 받는 자.
“아무래도 이번 비무 상대가 기권을 한 게 좀 찜찜하구나.”
남궁검의 말에 남궁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찜찜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 녀석이 우리 소가주의 진면목을 제대로 본 것일 뿐인데요.”
“그리 간단하면 좋겠지만, 만약 이것 역시 맹주의 안배라면…….”
“설마 일부러 모용신과 싸우게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남궁표가 미간을 잔뜩 구기며 말하자, 남궁검이 진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개 같은 맹주가……!”
“당장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우선은 차분하게 지켜보자.”
“그것들이 어떤 비열한 수를 쓸까요?”
남궁검이 침음을 흘리다가 대꾸했다.
“글쎄다. 전에 말한 대로 비무대 밖에서도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제야 남궁검이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괜찮겠느냐?”
“예, 어차피 예견한 일이잖아요. 맹주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건 꽤 초조하다는 증거겠죠.”
“모용신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일부러 기권을 시킨 거라면, 네가 모용신과 싸울 때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예, 할아버지. 감안하고 있을게요.”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너 자신을 믿어라. 우리 역시 너를 믿으니.”
남궁검의 말에 남궁표가 눈에 힘을 잔뜩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확실히 낯설지만 나쁘지 않네.’
남궁천이 밝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할아버지.”
남궁천의 시선이 창밖 무림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맹주, 조금 더 발악해보시오. 그래야 사냥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전생에 당신이 이런 재미를 느꼈던 건가?’
어느새 남궁천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