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23화 (322/508)

323. 올가미

적서.

언제 어디서든 밟혀 죽을 수 있는 쥐새끼.

언제라도 온몸이 피로 젖어버릴 수 있는 쥐새끼.

그래서 적서다.

하나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는 쥐새끼.

그것 또한 적서다.

적서는 이름이 없다.

어디든 숨어들어 신분을 바꿀 수 있어야 하는 쥐새끼니까.

무림맹 총관, 적서는 노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를 재촉할 문제가 아닌 것 같소만.”

“클클클. 까칠하군.”

“까칠하게 만들지 마셨어야지.”

총관이 불쾌한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중얼거리자,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우리 적서가 무림맹 총관 노릇을 하다 보니 주제를 잠시 잊은 모양이군.”

“황랑(黃狼)도 오랫동안 교를 떠나 있으시더니 감을 잃은 것 같소만.”

“뭐라?”

순간 황랑이라 불린 노인이 눈을 번뜩이고는 총관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살기가 다분히 섞여 있었지만, 총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무공을 깊게 익히지 않은 총관이 이만한 살기에도 끄떡없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심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총관이 황랑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좀 더 조용히 처리할 순 없었소?”

“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더니, 그 방울 소리에 내 귀가 먹게 생겼군. 이젠 정말 그 고양이가 주인으로 보이는가?”

“일 처리에 좀 더 신중을 기해 달란 말이오.”

팟!

순간 황랑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총관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황랑의 손톱이 시커멓게 물들면서 길어지자 총관의 목을 슬쩍 파고들어 피가 배어나왔다.

“적서. 뒈지고 싶은 게냐?”

하나 총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황랑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는 듯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총관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어 버리자, 황랑이 피식 웃으며 손을 놓고 물러났다.

“클클. 장난일세. 기분 나빴다면 용서해 주게.”

시커멓게 물들었던 그의 손톱도 이젠 평범하게 돌아와 있었다.

총관이 선혈이 흐르는 목을 살짝 어루만지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찌 이리 천박한…….’

내심 한숨이 흘러나온다.

오늘따라 기분이 가라앉아서 그런지 황랑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린다.

그렇게 냉랭한 분위기가 흐르는데 마침 입구에서 기척이 들렸다.

황랑이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왔느냐? 백묘.”

“어머, 제가 늦었군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들어서는 여인. 백옥 같은 피부에 유난히 붉은 입술이 어딘지 섬뜩한 그녀는 바로 백묘였다.

그녀가 실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응. 이상하네.”

“뭐가 말이냐?”

“두 분 싸우셨어요?”

“호오, 계집의 직감이라는 거냐?”

“그게 의외로 날카롭거든요.”

백묘가 화사한 미소를 짓자 실내의 공기마저 따뜻해지는 것만 같다.

정말이지 표정 하나 하나로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 버리는 묘한 여인이었다.

황랑이 피식 웃어버렸다.

“그냥 장난을 좀 치고 있었다.”

“황랑의 장난은 재미없어요.”

“그럼 무슨 장난이 재미있는데? 네년이 좀 가르쳐 주든지.”

“그 나이 먹도록 뭐가 재미있는지도 모르면 이미 글러먹은 거죠. 호호호.”

“재수 없는 년.”

백묘가 싱긋 웃어 보이고는 총관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적서.”

“뭐, 그리 오랜만은 아니지 않은가?”

“에이, 볼 때마다 반가운걸요.”

백묘가 혼이 빠져나갈 만큼 아름다운 눈웃음을 짓는다.

하나 총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 매혹적인 웃음 뒤에 얼마나 날카로운 칼이 숨어 있는지 알고 있기에.

백묘가 창가로 걸어가서 밖을 내다보며 무심한 듯 물었다.

“우리 맹주님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그러자 듣고만 있던 황랑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맹주님? 이젠 우리 맹주님이 되었어?”

“그럼요. 지금껏 본 교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분인데. 우리 맹주님이라 불러야죠. 기꺼이.”

“클클. 네년 말이 틀린 건 아니다만, 그래도 어감은 영 별로야. 막말로 맹주나 우리나 서로를 이용할 뿐이잖아.”

“황랑. 그런 사사로운 것까지 따지니까 사람이 옹졸해지고 멀리 보지 못하는 거예요. 이번에 염라단 삼 대주 일도 그렇잖아요. 나이만 드시지 말고 생각도 좀 성숙해지시길.”

“아니, 이것들이 오랜만에 보자마자 왜 지랄들이야? 내가 그렇게 만만한 게냐?”

발끈한 황랑이 손바닥을 활짝 펼치자 시커먼 손톱이 길쭉하게 자라났다.

흑조혈망(黑爪血網)이라는 그의 별호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나 백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랑을 가볍게 무시한 채 총관을 보며 물었다.

“적서, 맹주는 괜찮나요? 요즘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을 것 같은데.”

“흐음. 잘 모르겠네.”

총관의 애매한 반응에 백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적서는 이런 반응을 보일 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맹주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뜻이리라.

“그 맹주가 흔들릴 때가 있나 보군요.”

“솔직히 말하면 맹주님이 다소 불안한 상태인 것 같군.”

“이해 못 할 일은 아니군요.”

확실히 남궁천은 그녀가 생각해도 많은 부분에서 까다로운 상대였으니까.

“맹주의 정서가 무너지진 않았나요?”

“흐음.”

총관이 턱을 괴고는 침음을 흘렸다.

확실히 오늘 맹주의 모습은 평소답지 않긴 했다. 마치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하나…….

‘그렇다고 무너지실 분은 아니지.’

수십 년간 맹을 지켜온 사람이다.

그런데 한낱 약관에 지나지 않은 후기지수 때문에 정서가 무너진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맹주를 가장 측근에서 제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다.

그래, 잠깐의 흔들림이리라.

그도 사람일 테니까.

최근 번번이 계획이 뒤틀리면서 감정적으로 격해질 수도 있지 않겠나?

“맹주님은 그 정도로 약하지 않네. 다만…….”

“다만?”

“남궁천이라는 그 아이를 상대하면서 지나치게 예민해지신 건 사실일세.”

“왜 그럴까요? 고작 후기지수한테.”

“글쎄……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맹주님이 그 아이를 상대할 때만은 진천랑을 대하는 것처럼 보이더군.”

“천하대살성 진천랑?”

“그렇네.”

“흐응. 유일한 혈육이라서 그런가?”

“그렇다기보단…… 그 아이를 보는 시선과 대응하는 방식이 마치 진천랑을 대할 때와 똑같네. 진천랑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흐응. 그렇군요. 그런데 꼬박꼬박 존칭을 쓰시는군요.”

백묘의 말에 황랑이 불쑥 끼어들었다.

“내 말이. 이젠 아예 맹주 사람이 다 된 것 같다니까.”

“호호. 그게 평상시에도 실수를 줄이는 방법일지도 모르죠.”

백묘가 부드럽게 웃으며 총관의 편을 들어주었다.

정말이지 백묘는 알다가도 모를 여인이었다.

잠깐만 틈을 보여도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것 같다가, 또 갑자기 느슨하게 분위기를 풀어버린다.

그래서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만.

백묘가 느슨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다행이네요. 맹주가 그리 쉽게 무너지면 안 되죠.”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아니겠나?

그간 맹주는 이유를 떠나서 마교의 든든한 우산이 되어주었다.

총관이 싸늘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일단은 염라단 삼 대주를 죽인 것부터 처리해 주시게.”

“그러잖아도 적당한 인물을 갖다 놓을 생각이에요. 절정 이상의 고수로 골라둘 테니 알아서 요리하시길.”

한마디로 책임을 덮어씌울 사람을 끌고 오겠다는 뜻.

총관이 그럼에도 불쾌한 듯 황랑을 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다음에는 이런 실수는 하지 마시오.”

“적서가 기고만장했군. 이젠 진짜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모양이야.”

“…….”

“…….”

총관과 황랑의 시선이 살벌하게 마주친다.

냉랭한 기류 속에서 침묵하던 백묘가 얕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계속 이런 분위기 만들 거예요?”

그러자 황랑이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서로 고생하는 처지에 말을 예쁘게 하자는 거지.”

“황랑도 말이 험하긴 마찬가지예요.”

백묘가 핀잔을 주자 황랑이 손을 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계집이 요목조목 따져대니 피곤해서 살 수가 없군.”

총관이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럼 난 이만 가겠소.”

“자네.”

“또 뭐요?”

총관이 눈썹을 치켜 올리고 돌아보자, 황랑이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본분을 잊지 말게. 자네는 본 교가 키운 은마령(隱魔靈)이란 말일세. 뭐, 어쨌거나 자네 임무는 마지막까지 맹주를 잘 보필하는 것이지만…… 균형을 잘 잡으라는 말일세. 여차하면 교에서 지령이 떨어져 남궁천 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한 번 세작은 영원한 세작이라는 걸 잊지 않았겠지?”

“…….”

총관이 침잠한 눈으로 황랑을 보았다.

은마령.

마교가 키운 세작들 중 가장 고강도의 훈련을 받은 특급 세작들을 가리킨다.

한 조직에 수십 년 이상을 머물며 정체를 들키지 않은 채 활동하는 자들.

그들은 정신교육부터 남다르다.

거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으면서 세작 훈련에만 최소 십 년 이상 공을 들이게 된다.

그런 은마령 중에서도 적서는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갖춘 자였다.

그래서 맹주의 총관으로 들어간 것이기도 하고.

한참이나 황랑을 바라보던 총관이 묵묵히 돌아서더니 입을 열었다.

“알고 있소.”

총관이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황랑이 주머니에서 건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어떠냐? 계집아.”

“뭐가요?”

“적서가 흔들리는 것 같은데.”

백묘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설마. 그래 봐야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겠죠.”

“그럼 다행이다만.”

“적서는 은마령이에요. 황랑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독한 훈련과 세뇌를 받은 세작이라고요.”

“그렇겠지. 하나 무림맹 총관의 신분으로 지낸 것도 수십 년이야. 강산이 뒤바뀌어도 한참은 뒤바뀔 시간이지.”

“어설픈 강산이나 그렇지. 태산이나 장강은 그대로인 걸.”

“하기야. 그것도 그렇군. 그럼 나도 신경을 끄도록 하지.”

황랑이 낄낄거리며 말하자 백묘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다음엔 사고치지 마세요. 조용히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을.”

“뭐, 겸사겸사 아니겠느냐? 이참에 적서도 만나보고.”

“그래놓고 의심만 잔뜩 하고?”

“그게 내 일이다. 세작들 감시하고 관리하고.”

“네에, 그렇겠죠. 암요. 그럼 나도 이만 갈게요.”

“수고해라. 그리고 삼 대주를 죽인 흉수는 빨리 찾아놓도록 하고.”

“여기 있는데?”

“장난하지 말고.”

“훗. 알았어요. 적당한 녀석으로 던져두죠,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

말을 마친 백묘가 창가로 다가가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정말이지 표홀한 신법이었다.

황랑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총관이 사라진 문을 보았다.

‘처신 잘하시게. 적서.’

* * *

걸음을 옮기는 총관은 오랜만에 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맹주는 오늘 전에 없이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맹주가 흔들리는 것일까?

확실히 맹주는 남궁천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

남궁천을 남궁천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치 진천랑의 분신이나, 환생으로 보는 것처럼.

무엇이 맹주를 그리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확실히 남궁천을 보면 진천랑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 둘은 부자지간이니까.

‘그건 그렇고…….’

자신은 맹주를 보면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맹주가 마음 깊은 곳까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오랜 세월 붙어 있으면서 맹주의 철학과 이상을 마음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하나…… 나는 은마령이다.’

그 사실은 절대불변이다.

흔들림?

그런 건 없다.

그저 스치는 바람이리라.

그 바람에 이파리는 떨어질 지언정 뿌리가 뽑히진 않는 법이다.

자신이 뿌리내린 곳은 어디까지나 마교니까.

다만 지금은 총관으로서 충실할 뿐.

그게 바로 은마령, 적서다.

생각이 정리될 무렵, 그의 발걸음은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문지기가 다가와서 묻는다.

적서, 아니, 총관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남문각주, 패력궁을 만나러 왔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