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21화 (320/508)

3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소홍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각오했던 바였다.

유현의 성격은 알고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럽지만 무공에 있어서만큼은 진심인 사람.

사문이 봉문을 했음에도 무공 발전을 위해서 징계를 받을 각오까지 하면서 무림맹으로 달려온 도인.

검으로 극의에 다다라 도를 추구하고자 하는 진정한 무림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된다고?’

유현의 온화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은 뱀처럼 차갑고 냉철한 눈빛만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

후우우웅!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살벌한 기운이 진소홍을 스쳐 지나간다.

오싹.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지만, 진소홍은 움츠리지 않았다.

여기서 기세에 밀리면 끝이다.

당당히 맞서야 한다.

‘그래, 나라고 못할 건 없잖아!’

유성추를 다시 한번 그러쥐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우우우웅.

관중들의 환호성도 잦아들었다.

이틀 연이어 견습생들의 수준 높은 비무를 보고 나니, 이젠 아예 모든 이의 관심사가 이 두 사람에게 향한 상황이었다.

누가 먼저 움직일 것인가?

판돈을 건 사람들도 많을 텐데, 불쑥불쑥 소리치는 사람조차 없다.

비무를 치르는 두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만 같다.

진소홍은 왼손으로 정을 들고 오른손으로 비도를 빙글빙글 잡아 돌렸다.

윙윙윙……!

원심력에 의해 비도가 규칙적으로 회전한다.

이건 상대가 공격할 찰나를 가늠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또한 진소홍이 노리는 바다.

거리를 생각한다면 유현은 비도가 전방을 향했을 때 자신에게 파고들 것이다.

그래야 비도가 다시 한 바퀴를 돌며 날아들 때까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같은 순간 유현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노리는 걸까?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

결국 수 싸움이다.

어디까지 함정이며 어디까지 읽을 것인가?

‘진 소저는 상인의 딸이다. 매사 행동 하나하나가 계산적인 경우가 많지. 아마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빈틈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반 박자 빠른 공략을 시도해야겠구나.’

생각을 굳힌 유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음 순간!

타앗!

유현이 날아갔다.

정말이지 봄바람처럼 가벼우면서도 한겨울 삭풍처럼 예리하고 빠르게 날아간다.

쉬이이이이잇!

진소홍이 깜짝 놀라며 물러났다.

‘반 박자 빠르게!’

하지만 진소홍은 유현의 생각을 이미 읽고 있었다.

그녀가 비도를 빙글빙글 돌린 것은 일종의 눈속임!

팟, 쒜에에엑!

오히려 유현을 향해 빛살처럼 뻗어나간 것은 왼손에 들려 있던 정이었다.

유현이 눈을 부릅떴다.

아뿔싸!

방심했다.

‘여기까지 함정이었구나!’

진소홍에게 수를 읽힌 것이다.

아니다.

진소홍의 수는 자신이 생각한 것까지가 맞다.

다만 진소홍은 두 개의 경우의 수를 준비한 것이다.

수 싸움에서 무기 하나를 더 들고 있었던 것이다.

스까앙!

츠츠츠츠츳!

불꽃이 일어나면서 정이 검신에 부딪치며 튕겨 나갔다.

꽤나 묵직한 공격이다.

휘리릭, 쉬이이익!

현란하게 회전한 진소홍이 이번엔 다시 비도를 던져왔다.

공기마저 베어버릴 것처럼 빠르고 위협적이다.

유현이 반사적으로 몸을 눕히면서 피했다.

피츗!

비도가 유현의 가슴 자락을 얕게 베면서 지나간다.

핏방울이 점점이 튀어 오른다.

풀썩!

앞섶이 풀어지면서 장삼이 펄럭이자, 유현의 탄탄한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우오오오!”

유현의 몸에 감탄을 한 것인지, 긴박한 전개에 탄성을 터뜨린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관중 모두들 눈을 부릅뜨고 두 사람의 싸움에 초집중하는 중이었다.

‘역시 쉽지 않구나!’

애초에 진소홍을 무시한 적은 없다.

그녀의 무기는 유성추다.

무인이 유성추를 사용하는 적을 만나기란 흔치 않은 일.

대부분 도검창을 사용하니 유성추에 대한 대비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조금 전에도 그런 까닭으로 당한 것이다.

하지만 핑계 없는 무덤은 없는 법!

카가각!

유현이 재빨리 검신을 거꾸로 세워 대리석 바닥을 찍었다.

그가 회전하자 검첨에서 불꽃이 튀어 오른다.

파팡!

곧 중심을 잡은 유현이 지체 없이 진소홍의 품으로 짓쳐들었다.

샤아아아아악!

마치 매화 한 송이가 바람결을 타고 뻗어오는 것만 같다.

그 움직임이 너풀거리는 듯하면서도 일순간 빠르게 이동하니 종잡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진소홍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고민은 찰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짧았다.

그녀는 며칠 전 남궁천과 예선전에서 싸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남궁천과 함께 유성추를 거미줄처럼 이용하며 협곡을 종횡무진하지 않았던가?

그때 남궁천이 한 말이 있었다.

“유성추는 훌륭한 무기야. 하지만 그만큼 다루기도 까다롭지. 유성추를 무기라고만 생각하지 마. 널 살릴 수 있는 동아줄이기도 해. 모든 생각을 유성추 중심으로 해 봐. 그리고 적을 꺾는 것은 결국 유성추가 아니라 네가 하는 거야. 유성추로 꺾든, 유성추를 이용해서 꺾든. 결국 너야. 더 쉽게 말해줘?”

“응.”

“유성추로 상대를 해치겠다는 생각에 너무 의지하지 말란 거야. 하지만 유성추를 충분히 활용해.”

“그게 뭔 말이야? 더 어렵잖아!”

“유성추는 단순히 상대를 해치는 무기가 아냐. 넌 유성추가 있어서 더 빨라질 수 있고, 더 유연해질 수 있으며, 더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질 수도 있지. 저 폭렬갑처럼 너의 공력을 몇 배로 더 끌어 올려줄 수도 있어.”

“역시 이해가 안 돼!”

당시엔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당장 급박한 상황에 직면하니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유성추를 이용할 것!’

진소홍이 은잠사에 공력을 불어넣자, 저만치 뻗어갔던 유성추가 순간 수직으로 낙하했다.

슈우우우욱!

콰악!

기를 머금은 예리한 비도가 그대로 대리석 바닥에 깊게 박혔다.

파앗!

동시에 진소홍이 경공을 펼치면서 힘껏 당겼다.

슈우우우우웃!

“헛!”

유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처음 유성추에 공력을 불어넣을 땐, 비도를 끌어당겨 자신의 배후를 노린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진소홍의 실수가 되리라 여겼다.

그만큼 자신의 경공이 빨랐기에.

최근 남궁천과 동행하면서 그의 무공은 전체적으로 상승했는데, 특히나 경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탓이다.

이상하게 남궁천은 다른 모든 무공 중에서도 평생 도망만 다닌 사람처럼 경공이 월등하게 뛰어났으니까.

때문에 화산파 독문 절기인 암향표(暗香飄)를 펼치는 유현은 정말이지 귀신같은 몸놀림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 매화이십사수의 제이초인 매화접무(梅花蝶舞)를 펼치니, 잠시만 넋을 놓아도 검신이 지척에 다다라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자신의 배후를 노리는 비도가 날아들기도 전에 유현은 진소홍에게 일격을 날리고 여유 있게 피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경공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앞에 있었던 사냥감이 눈 깜빡할 사이에 공격권에서 벗어난 게 아닌가?

진소홍은 정말이지 빛살 같은 속도로 유현의 근방을 벗어나 비무대 반대편까지 이동했다.

‘유성추를 이용해서 더 빨라질 수 있고!’

정말 빨랐다.

평소 경공만 펼칠 때보다는 두 배 이상 빠른 속도였다.

너무 빨라서 이대로면 장외로 튕겨 나갈 판이었다.

하지만 진소홍은 당황하지 않았다.

‘유성추를 이용하면 더 유연해질 수 있고!’

파바바밧!

바닥에 박힌 비도를 중심으로 그녀가 원심력을 이용해 빙글 돌았다.

일순 발끝이 가벼워졌다.

발이 비무대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이대로 떨어지면 장외 실격이 되겠지만…….

파파파팡!

허공답보를 펼치듯 진소홍이 용천혈로 기를 방출하며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물론 진소홍이 진짜 허공답보를 펼친 것은 아니다.

단지 유성추의 원심력을 십분 활용하여 장외 실격을 피한 것이었다.

“유성추가 있어서……!”

파앙!

순간 진소홍의 몸이 깃털처럼 날아오른다.

“더 가벼워질 수도!”

피융!

바닥에 꽂혔던 비도가 뽑혀 나오면서 그녀에게 되돌아갔다.

휘리리릭!

공중에서 제비를 돈 그녀가 비도를 낚아채고는 재빨리 유현의 정수리를 향해 정을 내리꽂았다.

슈우우우우욱!

“헛!”

파바밧!

유현이 얼른 암항표를 펼쳐 피하자, 정이 그대로 어깨를 스치듯 떨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은잠사에 아직 공력이 실렸다!’

은잠사가 은은한 기운을 품어서 반짝인다.

이는 후속 공격이 계속된다는 신호!

아니나 다를까, 진소홍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유성추가 있어서 더 무거워질 수도 있는 것!”

진소홍은 스스로 깨달은 것을 복습이라도 하겠다는 듯 소리치며 그대로 낙하했다.

쑤아아아아앙!

정말이지 엄청난 속도!

허공으로 솟은 그녀가 천근추의 술법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아니, 그보다 더 무겁고 빠르다.

유성추를 잡아당겨서 그 속도가 배가 되었으니 당연한 이치다.

순간 유현이 검을 들어 올렸다.

물러나서 피하려고 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떨어지는 진소홍보다도 더 빠르게 떨어지는 비도를 본 것이다.

쒸에에에엑!

쩌어어어어엉!

어마어마한 금속성이 터지면서 기풍이 사방으로 훅 불어 나갔다.

뒤이어 떨어진 진소홍!

쉬이이이잇, 빠악!

“크읍!”

진소홍의 발뒤꿈치에 맞은 유현이 한참이나 대리석 바닥을 미끄러졌다.

츠츠츠츠츠츳!

휘리리릭, 착!

진소홍이 얼른 뒤로 물러나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언제 다시 주워 들었는지 그녀의 손에는 유성추가 잡혀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진소홍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먹였다.

자욱한 먼지가 주변을 에워싼다.

‘장외로 떨어지진 않았겠지?’

진소홍이 심호흡을 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유현이 이 정도로 장외까지 밀려나진 않았으리라.

비무대에 피어오른 먼지 탓에 유현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관중석은 또렷이 보였다.

‘남궁천……!’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미동도 없다.

‘역시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진소홍이 다시 긴장을 다지며 유성추를 그러쥐는데,

파아앙!

순간 기풍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먼지 안개를 뚫으며 유현이 불쑥 나타났다.

“헙!”

살기가 실린 것만 같은 매서운 눈빛을 보자 숨이 절로 멎었다.

순간 유현의 신형이 매화 꽃잎처럼 흩날렸다.

쉬이익, 쉭쉭! 쉬쉬쉭!

‘대, 대단……!’

매화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이렇게 아름다운 검술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하나 이 아름다움에 넋을 놓았다간 허공에 흩날리는 매화는 곧 자신의 핏방울로 변할 것이다.

팟!

진소홍이 재빨리 비도를 날렸다.

같은 수법을 통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기에 이번에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런데 찰나지간 유현의 암향표 보법이 기이하게 변형됐다. 그 바람에 검신이 번쩍이며 빛을 터뜨린다.

비도를 던진 진소홍이 순간 눈이 부셔서 멈칫했다.

제오초식 매화낙섬(梅花落暹).

말 그대로 흩날리는 매화가 빛을 마구 튕겨내는 것만 같다.

유현은 화산의 후기지수답게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쉬까아앙!

비도를 쳐낸 유현이 곧바로 암향표의 보법을 어지럽게 흔들어댔다.

파바바바바밧!

제칠초식 매화빈분(梅花頻紛)!

유현의 신형이 어지럽게 흔들리다가 마침내 수어 명으로 쪼개진다.

검로마다 매화가 피어나며 어지러이 흩날린다.

“아……!”

진소홍은 그 순간 패배를 직감했다.

길지 않은 싸움.

‘이 정도의 차이구나.’

새삼 격의 차이를 느낀다.

마침내 지척까지 다다른 유현이 빠르게 오른손을 뻗어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소홍은 죽음의 공포마저 느꼈다.

그만큼 유현의 눈매가 매서웠기에.

하나 마지막 순간 유현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졌다.

툭!

“으윽!”

단말마 비명과 함께 진소홍의 신형이 장외 밖으로 날아갔다.

부드러운 타격이었음에도 공력이 실려 있었기에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이대로 질 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비도를 비무대에 박아 넣고 끌어당겼지만, 그녀의 몸이 먼저 장외에 떨어지고 말았다.

쿠당!

츠츠츠츳!

결국 장외 바닥에 미끄러진 그녀가 엎드린 채 숨을 헐떡였다.

‘하아…….’

명백한 패배.

변명의 여지가 없다.

비무대 위에 선 유현이 포권했다.

“진 소저,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상대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만 좀 깨달으라고.

볼멘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피식 웃으며 포권했다.

“나도 한 수 배웠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사람들의 환호성이 차올랐다.

다만, 단 한 사람.

맹주 묵천악만이 관중석에 선 남궁천을 매섭게 노려보며 보며 중얼거렸다.

“남궁천…… 이 또한 너의 작품인가? 너는 일부러 이런 걸 내게 보여주는 것이냐?”

그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것인지 남궁천의 시선이 순간 맹주에게 향했다.

남궁천이 귀빈석에 선 맹주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맹주, 보셨소? 이젠 이들이 내 동료요. 기다리시오. 이번엔 내가 천천히 옭아매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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