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첨산은 한참이나 미동도 하지 못했다.
고막을 찢을 듯 솟구친 함성에도 그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지금 일어난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비무가 끝나면 윤종승을 찾아가서 다독여 줄 생각이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고 말해줄 참이었다.
비무 내용이 어떠하든 그렇게 말해줄 생각이었다.
그 비무를 회피하지 않고 맞선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용기라고 생각했으니까.
윤종승은 자신의 아들이다.
아들의 무위를 자신이 모를까?
아니, 몰랐다.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사이에 이렇게 강해졌을 줄은 몰랐다.
무연회 때도 깜짝 놀라게 하더니, 오늘은 거품을 물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
무연회 때보다 두 배, 세 배는 강해진 것만 같다.
분명 무연회 때만 생각해도 아들은 팽수혁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마침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멍하니 돌아보니 금왕이 자신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는다.
“네……?”
멍하니 되묻자 다시 금왕이 뭐라고 말한다.
이번에도 들리지 않아서 눈만 끔뻑이는데, 금왕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다음 순간 주변의 온갖 잡음이 쏟아지듯 뇌리를 울렸다.
“우와아아아아아!”
윤첨산은 당황했다.
이, 이렇게나 많은 함성이?
관중 모두가 아들을 보며 손을 흔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억지로 아들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이젠 아니다.
관중들 모두가 아들 윤종승을 영웅처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마침내 웃음을 거둔 금왕의 목소리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감축드립니다. 윤 가주님.”
“아…… 고맙…… 고맙습니다.”
윤첨산의 목소리가 잔뜩 젖었다.
마침 시선을 돌렸더니 늘 칼날처럼 냉정한 표정을 짓던 남궁검의 얼굴도 들어온다.
잘못 본 건가?
남궁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는 것 같다.
그런 남궁검이 지금까지는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축하를 건네왔다.
“축하하네. 윤 가주.”
“남궁 가주…….”
“썩 좋은 승부였네.”
“……!”
별것 아닌 그 말 한마디가 윤첨산의 명치를 때렸다.
감동의 폭풍이 단전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기분이다.
결국 윤첨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어흑……! 으흐흐흑! 남궁 가주님……! 만금진인! 정말 감사합니다! 으흐흑! 저, 저 아이가…… 저 윤종승이 바로…… 바로 제 아들입니다! 어흐흐흑!”
눈물이 폭포수처럼 흐른다.
멈추질 않는다.
이 눈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승리한 아들이 대견스럽기 때문일까?
승리를 했지만 상처투성이의 아들이 안쓰럽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그간 아들을 믿어주지 못하고 매번 냉엄하게 몰아붙였던 자신에 대한 원망일까?
모르겠다.
아마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눈물이리라.
윤첨산은 깨달았다.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과 이야기가 스며 있다는 것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순간 그 감정들이 차고 넘쳐 눈물로 흐른다는 것을.
“축하드려요, 윤 가주님. 오늘은 마음껏 기뻐하세요.”
남궁화가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넨다.
이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또 자신이 그간 저질렀던 잘못이 사무치도록 부끄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래, 오늘만은 기뻐하자.’
윤첨산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관중석을 돌아보면서 사자후를 실어 외쳤다.
“여러분! 저 아이가 바로 제 아들입니다! 제가 저 아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아아! 어흐흐흑! 제가 바로 저 녀석의 아비입니다! 크흡! 으허헝!”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상황.
체면이 망가지고 있지만 아무렴 어떠랴.
오늘 하루는 팔불출이 되리라.
‘아들아! 고맙다. 네가 나의 아들이어서 너무나 자랑스럽구나!’
윤첨산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 * *
부녀는 말이 없었다.
탁자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입맛이 없는 듯했다.
아니, 딱히 입맛이 없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서 음식을 먹는 속도가 더디고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금왕 진득랑이었다.
“입맛이 없는 것이냐?”
“아니요.”
“너도…… 오늘 있었던 비무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냐?”
금왕의 질문에 진소홍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아버지도 그 생각을 하는 중이셨어요?”
“그래. 참 대단한 비무였다.”
“네…… 그랬죠.”
진소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정말이지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비무보다도 그녀에겐 공부가 되면서도 감동적인 승부였다.
“윤종승이 이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것이 무림이다. 그것이 세상이고. 그런 이변이 없다면 강자는 두려울 것이 없을 테지.”
“아버지는 어떠신가요?”
“무엇이 말이냐?”
진득랑이 부드러운 눈길로 딸을 보았다.
이렇게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눈 것도 오랜만인 듯했다.
요즘은 공교롭게도 무림맹 행사를 통해 자주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금왕으로 불리시잖아요. 강남에서는 아버지를 쫓아올 재력가가 아무도 없다고 하고요.”
“부인하진 않으마.”
“그런 아버지도 두려움이 있을까요? 아버지가 그러셨죠? 돈이 돈을 버는 속도는 사람이 버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고요. 그럼 아버지는 영원불멸 최대 자산가이지 않을까요?”
진득랑이 부드럽게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두었다.
“홍아, 너에게 아주 귀한 보석이 있다고 하자. 하지만 너는 아주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지. 네 발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다. 그럼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아…… 다리가 후들거리고 오금이 저려올 것 같아요. 놓치지 않기 위해 손을 더 꽉 쥐겠죠.”
진득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다. 누구나 높은 곳에 오르면 오를수록 내가 가진 것을 잃게 될까 봐 더욱 경직되고 신경 쓰게 된다. 소중한 걸 잃을 위험도 그만큼 커지지.”
“그렇다면 우린 왜 높은 곳을 올라가야 하는 거죠?”
“그만큼 그걸 지킬 힘을 얻으니까. 높은 곳에 오르면 더 많은 세상을 보고 깨달을 수 있으니까.”
“아…….”
“낮은 곳에 있으면 마음은 편하겠지. 그리고 타인의 실수나 못마땅한 점을 찾아서 지적질이나 할 것이다. 그걸로 분풀이를 하거나 스스로가 더 잘났다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되는 거고.”
“동네 왈패들처럼요?”
“바로 그렇다. 높은 곳에 올라서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반드시 존재하지. 낮은 곳에 안주하는 자들은 절대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으니.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높이 오른 자들은 대체로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하지.”
“그래서 올라야만 하는군요.”
“올라야만 더 강해질 수 있다. 더 손에 힘을 쥐게 되고, 더 정신을 집중하게 되지. 낮은 곳에 머무는 자들은 스스로에겐 관대하면서 남에게만 엄한 한량들이니라. 그러니 그들이 떠드는 소리에 신경 쓰지 마라. 까마득하게 높이 오르면,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들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그땐 그저 너 자신과의 싸움일 뿐이야.”
“……!”
진소홍이 깨달음을 얻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단순한 이치이지만 아버지를 통해 들으니 생동하는 진리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진득랑이 화주를 한 잔 마시고는 미소 지었다.
“내일 있을 비무가 많이 두려우냐?”
“네. 유현 도장은 강한 사람이니까요.”
“다른 상대보다 오히려 유현 도장을 신경 쓰는구나.”
“그게…… 그 다른 상대는 이미 기권을 했다고 들었어요.”
“기권을?”
“네. 아무래도 앞서 남궁천과 윤종승의 비무를 보고 마음을 돌린 모양이에요.”
금왕이 실소를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군. 그럼 내일은 너와 유현 도장만 승부를 보게 되겠구나.”
“네, 아버지.”
“만약 자신이 없다면 기권을 해도 좋다. 향상심을 가지는 건 좋지만, 현재 자신의 위치를 알고 준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개구리도 움쳐야 뛰는 법이지.”
진소홍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야 진소홍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기권하지 않을 거예요.”
“괜찮겠느냐?”
“네. 오늘 윤종승 비무를 보면서 많이 느꼈어요. 윤종승은 넘어지고, 엎어지고, 떨어지면서도 악착같이 오르고 있어요. 전 그동안 너무 많이 움츠렸던 것 같아요. 이젠 도약을 해보려고요.”
“무리하진 말아라.”
“네, 아버지.”
“결코 쉬운 승부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위로 올라가야 하잖아요. 각오하고 있어요.”
진소홍이 싱긋 웃는다.
진득랑이 술잔을 매만지다가 여린 미소를 지었다.
왠지 눈물이 슬쩍 고이는 것 같다.
언제 딸이 이렇게 컸던가?
후원에서 금괴 멀리 던지기 놀이를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비인 나도 주지 못한 것을 남궁천이 주는구나.’
왠지 딸이 이젠 자신의 품을 벗어난 것 같아서 마음 한편이 씁쓸하다.
언젠가 아내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내가 우리 딸에게 더 이상 해줄 게 없는 날이 오면 어쩌지?”
“금왕이 그런 소리를 하면 온 세상이 화낼 거야.”
“그래도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잖아.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닐 때도 있으니.”
당시 아내는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로 이렇게 말했다.
“그땐 그냥 믿어주면 돼. 세상 누구도 주지 못할 든든한 믿음을. 오직 당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을.”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이라.’
희미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실망스러워서가 아니다.
왜 그걸 진작 깨우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여보, 만금을 다루는 내가 아직도 딸을 다루는 건 서툰가 보오.’
상념에서 빠져나온 진득랑이 진소홍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오늘 한 잔만 마시자꾸나.”
“네, 아버지.”
“내일 치를 멋진 비무를 기대하마.”
진소홍은 지금껏 아버지가 보여주지 않았던 신뢰의 눈빛을 보고는 멈칫거렸다.
곧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운차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
* * *
비무 대회 사흘째.
유현과 진소홍이 비무대 하나를 차지한 채 마주 보고 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인파가 모여서 하늘을 떨쳐 울릴 듯 함성을 보내오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치 진공 상태에 놓인 것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
“기권하지 않으셨군요.”
유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표정에 더 가까웠다.
진소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좀 더 나를 알아보고 싶어서.”
“참…… 신기하죠?”
“뭐가?”
유현이 관중석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무심결에 시선을 좇은 진소홍은 그가 남궁천을 본다는 것을 알았다.
유현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같은 이유거든요.”
“그랬구나.”
“우리 모두 남궁천 소협을 만난 이후로 뭔가 바뀐 것 같아요.”
“그렇네.”
“이전에는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싸웠다면, 언제부턴가 싸우는 이유가 나를 알기 위해서가 되었죠.”
확실히 그렇다.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서 타인을 분석하고 약점을 파고들었던 적이 있다.
한데 지금은 아니다.
모든 신경을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진소홍은 이 비무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현보다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다.
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참 대단해 보입니다. 남궁천 소협은.”
“그러게 말이야.”
“그러니 저는 더욱 분발하려고 합니다. 이 비무,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유현의 전신에서 살기에 가까운 투기가 확 일어났다.
진소홍이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유성추를 그러쥐었다.
“바라던 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