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우리 절친 아니었어?
팽수혁에게 이런 예리한 공격이 가능했던가?
우직하면서도 거침없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팽수혁 아니었던가?
찰나지간에 불과했지만, 윤종승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 일격을 맞았다간 틀림없이 꽤 심각한 부상을 입으리라.
물론 재기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병상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더구나 지금은 생사비무가 아니던가?
누구 하나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비무 대회다.
‘그래, 나만 바뀐 게 아니야.’
‘그래, 너만 바뀐 게 아니야!’
팽수혁은 혈염도를 휘둘러 가면서도 오래전 남궁천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남궁세가에 마교가 침입하여 사투가 벌어졌던 날. 팽수혁이 혈염도를 주웠던 그날 나누었던 대화였다.
“이도류를 구사하겠다고?”
“그렇다.”
“혈염도를 갖고 싶어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냐?”
“그, 그런 게 아냐! 내가 무슨 무턱대고 칼 욕심만 내는 인간으로 보이냐?”
“응.”
“아닌데!”
“그럼 말고.”
“아무튼! 나는 오래전부터 이도류가 되고 싶었다.”
“이유는?”
남궁천이 빤히 바라보며 묻는 말에 팽수혁은 먼 산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그거야…… 멋있으니까?”
“진심이냐?”
“그래. 진심이다.”
“확실히 너답다.”
“무슨 뜻이냐?”
팽수혁이 눈을 가늘게 뜨자,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단순무식하다는 뜻이지.”
“싸우자.”
“됐고. 뭐, 하북팽가가 이도류라. 사실 나쁘진 않지.”
“오, 정말이냐?”
“그래. 원래 실전 도법으로 유명한 하북팽가잖아. 실제로 전시에는 무기가 될 만한 거라면 닥치는 대로 주워 들고 휘두르는 법. 그렇게 파생한 게 바로 하북팽가의 도법이니까 이도류가 아니라 삼도류라도 이상할 건 없지.”
“흐음. 그렇군. 그런데 어째 단순무식한 도법이라는 말을 돌려 하는 것 같다만?”
“흐음. 확실히 좀 똑똑해진 것 같기도 하고.”
“뭐야, 이 새끼야?”
팽수혁이 당장에라도 칼부림을 할 듯 으르렁거렸지만, 남궁천은 가볍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이도류가 된다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잘 해봐라.”
“그래. 그런데 그게 끝이냐?”
“그럼?”
“그러니까…… 그 뭐냐…… 뭔가 떠오르는 건 없고?”
“뭐가?”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너에게 배우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그저 네가 내 말을 듣고 나서 어떤 영감을 얻었다면 그게 궁금할 뿐이다. 내 덕에 네가 영감을 얻은 거니까!”
“뭔 개소리야?”
“윽. 그, 그러니까…… 젠장! 이도류를 사용하려면 뭐 꼭 알고 있어야 한다거나…… 주의할 게 있다거나…….”
“…….”
“뭐, 뭘 그렇게 봐?”
“그냥 솔직하게 말해.”
“뭐, 뭘!”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뭐, 뭔 개소리야? 내가 언제 가르쳐달 라고 했…….”
“그럼 수고.”
“어어? 야! 야 인마!”
“…….”
“니미럴. 가르쳐 줘.”
그제야 남궁천이 걸음을 멈추고 팽수혁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약 올리듯 묻는 남궁천을 보며 팽수혁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젠장, 가르쳐 달라고!”
“흐음. 뭐, 네가 저어어엉 그렇게 매달리니까 어쩔 수 없지. 그간 정이 있으니까.”
“빌어먹을.”
“뭐라고?”
“아니, 뭐…… 고맙다고.”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마치 귀여운 아들뻘을 보며 웃는 것 같아서 팽수혁은 기분이 묘했다.
남궁천이 턱짓으로 혈염도를 가리켰다.
“어떻게 생겼냐?”
“잘 빠졌지.”
“그래, 그럼 그건?”
남궁천이 다음으로 가리킨 것은 태도였다.
“투박하지만 강인하지.”
“그래. 그럼 그렇게 다뤄.”
“뭐? 그게 뭐야?”
“투박한 건 투박하게. 예리한 건 예리하게.”
“아…….”
“하북팽가의 도법이 실전형이라고 해서 모든 걸 거칠고 투박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는 거야. 머릿속에서 실전형 도법이라는 생각을 지워. 이게 지금 네 머릿속에 잘못 각인이 되어서 실전이란 곧 거칠고 패도적인 느낌만 남은 것 같으니까.”
“아, 알았다.”
“하북팽가는 적응형 도법이다.”
“적응형 도법.”
“그래. 무수한 실전을 겪으면서 그때그때 일어나는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게 다듬어진 도법이지.”
“과연!”
“그렇다면 무조건 거칠고 패도적일 게 아니라, 그 도의 특성에 맞게 휘둘러야겠지. 하북팽가의 도법이라면 가능하다. 그래서 이도류, 삼도류도 어색할 게 없다는 거고.”
“……!”
팽수혁이 입을 딱 벌리고 그대로 바위처럼 굳었다.
모든 깨달음과 이치는 이렇듯 단순하다.
하나 깨달음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느냐, 마느냐로 결정된다.
단순한 이치도 누군가에게는 깨달음으로,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잡소리로 들리는 법.
지금 이 순간 남궁천의 이 한마디는 분명 팽수혁의 마음을 꿇고 들어왔다.
‘하북팽가의 도법은 실전형일 뿐만 아니라 적응형 도법이다!’
그 한마디는 확실히 팽수혁의 마음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촤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이 귀를 파고든다.
손끝에서 살을 베는 감각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런 감각은 낯설다.
지금까지는 벤다는 느낌보다는 찢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게 하북팽가의 도법이었다.
한데 생각을 바꾸고 깨달음을 얻고 나니 이 낯선 감각도 익숙한 것처럼 느껴진다.
다만…….
‘얕다.’
좀 더 깊숙하게 베었어야 했는데, 그 찰나간에 윤종승이 와도련보를 이용해서 물러난 것이다.
“큭!”
옆구리를 쥔 윤종승이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구겼다.
하나 쉴 틈은 없다.
팽수혁은 그대로 태도를 후려왔다.
쑤아아아아앙!
이번엔 무겁다.
혈염도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날아든다.
‘젠장!’
윤종승이 어금니를 꽉 씹었다.
이렇게 끝일까?
주먹을 불끈 말아 쥐니 폭렬갑의 착용감이 더 여실히 느껴진다.
예선전을 치렀던 날, 남궁천은 자신을 찾아와서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라.”
“어? 이게 뭐야?”
“오다 주웠다.”
“뭘 이런 걸 다 주워?”
“싫으면 다시 가져가고.”
“아, 아니! 안 싫어!”
윤종승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폭렬갑을 받았다.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오늘부터 그거 끼고 죽어라 연습해라. 그리고 비무 대회 때 끼고 나가라.”
“왜? 그래야 하는 이유가?”
“날 노리는 맹주에게 경고하려고.”
“뭐야? 그냥 선물이 아니라, 네 목적에 날 이용하려는 거야?”
“싫으면 다시 가져가고. 팽수혁에게 주지, 뭐.”
“아니! 안 싫다니까! 싫지 않다고!”
“그런데 왜 군말이 많아?”
“끄응. 알았어. 그런데 이게 뭐 하는 건데?”
“네 공력을 훨씬 강하게 증폭시켜 줄 거야.”
“오오, 그래? 이게?”
“그래. 나름 장인의 솜씨니까.”
“그렇군.”
“대신 적응해야 한다. 안 그러면 손가락 다 부러진다.”
“알았어! 열심히 연습해 볼게!”
“그리고…….”
“응!”
윤종승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남궁천이 그런 윤종승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혁련장 하나로는 부족해.”
“어…… 알아.”
“오늘부터는 매일 기를 발출하는 연습만 해라. 나머지 시간에는…….”
“……?”
“많이 보고 느껴라.”
“뭘?”
“이것저것. 가까운 연못에라도 가서 하루 종일 멍 때려서 깨달음이라도 얻든지.”
“그, 그게 다야?”
“그래. 그게 다야.”
남궁천이 손을 흔들고 걸어가자, 윤종승이 얼른 소리쳤다.
“잠, 잠깐만! 왜 하필 연못인데?”
“그거야 너희 가문절기인 혁련공이 연꽃에서 영감을 얻은 것 아니냐? 아무래도 연못에 가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상성이 잘 맞을 테지.”
“아…….”
윤종승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게 간단하다고?’
깨달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멍 때리기만 하면 저절로 탁 생기는 뭐 그런 거였나?
그럴 것 같으면 세상 모든 사람이 천하제일고수가 되지 않았을까?
때마침 남궁천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너무 쉬운 것 같아?”
“어…… 뭐, 조금.”
“그래, 쉽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 쉬운 걸 잘 안 해. 그래서 어려운 거다. 학관에서 공부하는 애들 중 우등생이 몇 명이나 되지?”
“일 할…… 정도?”
“그런데 그 우등생이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것 같나? 아니야. 그냥 할 걸 할 뿐이야. 대부분은 하라는 공부를 안 하는 거고. 그러니 그냥 하면 된다. 세상 살면서 상위 일 할 안에 들어가는 거? 그냥 본분에 따라 하면 돼. 그럼 안 하는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니까. 그러니 너는 그냥 하면 돼. 거기에 진짜 노력까지 더하면 상위 일 푼이 되는 거지.”
“……!”
그날 이후로 윤종승은 매일같이 연못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긴 했지!’
상념에서 빠져나온 윤종승이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아직도 태도가 날아드는 중이다.
하지만 과연 통할까?
깨달음은 별것 아니었다.
날씨가 추워진 탓에 개구리 따위는 볼 수 없었지만,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개구리 떼가 입수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단전에서 뽑아낸 공력을 어찌 운용할지, 또 그것을 어떻게 분산할지, 또 어느 정도의 세기로 발출할지!
‘단순한 혁련장으로는 안 된다!’
표정을 굳힌 윤종승이 단전에서 공력을 뽑아 올렸다.
그리고 애써 눈앞에서 날아드는 칼날을 무시했다.
“으아아아아아!”
마침내 기합성이 터지면서 윤종승이 양손을 무차별적으로 뻗어냈다.
그래, 처음으로 창안해 낸 무공 초식이 아닌가?
이럴 땐 멋들어지게 초식명을 불러줘야겠지!
“와군입지(蛙群入池)!”
수태양소장경을 따라 뻗어가던 공력이 일순간 수십 개로 쪼개지며 군락을 이루는 것만 같다.
게다가 공력의 이동이 특이해진다.
마치 개구리 떼가 팔짝팔짝 뛰듯이, 툭툭 끊어지듯, 하지만 순간의 속력이 몹시 빠르게 이어진다.
마침내 내뻗은 폭렬갑 끝에서 혁련장 수십 발이 쏟아진다.
퍼퍼퍼퍼퍼퍼펑!
일장을 뻗어도 수십 가닥의 공력이 폭사한다.
“크읏!”
팽수혁이 당황한 듯 물러났다.
콰콰콰콰콰쾅!
하지만 윤종승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쌍장을 무수히 퍼붓는다.
일장에도 수십 발의 공력이 폭사하는데, 그걸 다시 수십 장 뻗어낸다.
손바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날아가던 태도가 마침내 튕기더니 팽수혁의 손바닥을 찢으며 장외까지 날아갔다.
“크아아악!”
이어진 건 무차별적인 폭격이었다.
윤종승은 무아지경 속에서 장을 뻗어댔다.
팽수혁은 속절없이 전신을 얻어맞았다.
두 사람의 기합성과 비명이 처절하게 어우러졌다.
“으아아아아!”
“끄아아아악!”
콰콰콰콰콰콰쾅!
얼마나 손을 뻗었을까?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뻗은 일장이 정확히 팽수혁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퍼퍼퍼퍽!
일장에도 타격감은 여러 번 이어진다.
“크억!”
피를 토한 팽수혁이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쿠당탕탕!
한참을 미끄러진 팽수혁이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채로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니미럴…… 나한텐…… 저런 거…… 안 주고…… 절친은…… 개뿔…….”
“헉, 헉, 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윤종승도 어느 순간 기운이 다한 것인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비무대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쓰러진 셈.
관중석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러면 누가 이긴 거지?”
“먼저 깨는 사람이 이긴 거 아닌가?”
“언제 깰 줄 알고?”
웅성임이 이어진다.
윤첨산은 눈시울을 잔뜩 붉힌 채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남궁천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묵묵히 쳐다보기만 한다.
‘멍청한 놈. 무리하지 말라니까.’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엇! 일, 일어난다!”
“윤종승이다! 윤종승이 먼저 일어난다!”
사람들의 말대로 비척거리면서 일어난 사람은 다름 아닌 윤종승이었다.
“헉, 헉, 헉……!”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린다. 팔은 떨어질 것만 같다.
처벅…… 처벅…….
쓰러질 듯 말 듯 움직인 윤종승이 팽수혁의 발목을 잡고는 질질 끌고 갔다.
마침내 윤종승이 팽수혁을 장외로 밀어내자, 쿵 소리와 함께 육중한 덩치가 밖으로 떨어졌다.
팽수혁 장외 실격.
기적이 일어났다.
관중석에 앉은 모든 사람의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다음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열띤 함성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