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우리 절친 아니었어?
“……!”
팽수혁이 눈살을 푹 찡그렸다.
살을 베는 감각 대신 커다란 충격과 함께 폭음이 들렸다.
파파파파파팟!
포탄처럼 튕겨 나간 팽수혁이 발끝에 공력을 실어 천근추의 수법으로 중심을 잡았다.
콰가가가가각!
대리석 바닥이 밀려 나가면서 기다란 자국을 남겼다.
무연회와 달리 이번 비무대는 대리석을 깔아서 꽤나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비무대 끝까지 밀렸다가 아슬아슬하게 멈춘 팽수혁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고는 윤종승을 보았다.
“너…… 그거 뭐냐?”
윤종승은 저도 놀란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끝을 보고 있었다.
검은 장갑.
“어…… 이거…… 장갑인데.”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도대체 뭔 장갑이기에 이런 괴력이 나와?”
“음……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는데…….”
윤종승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한편 이 과정을 지켜본 총관이 눈을 번쩍 뜨고는 맹주를 돌아보았다.
“맹주님, 저것은…….”
“폭왕이 남긴 것이군.”
“그런……! 저것 역시 사전에 신고가 되지 않은 병장기입니다. 실격시키고 압수할 수 있…….”
“놔두게.”
“예?”
“어제도 말했다시피 허용 범위가 넓어야 나중에 우리가 할 일도 많아지는 걸세. 오히려 잘된 셈이지.”
“끄음. 알겠습니다.”
“재미있군. 폭렬갑을 주워서 제 동료에게 줬단 말이지?”
묵천악이 차갑게 식은 눈길로 관중석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남궁천에게 향했다.
‘가소로운…….’
모르긴 해도 이건 남궁천이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이리라.
지금쯤이면 남궁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남궁천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하긴, 이쯤에 와서도 모른다면 바보천치라고 봐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맞부딪쳐 오고 있다.
가문에 대한 충성심인가? 아니면 철부지의 도발인가?
아무래도 좋다.
도망가는 녀석은 지긋지긋하다.
제 아비로도 충분했다.
이건 색다른 재미가 아닌가?
거기에 경고까지 보내?
“후후후후!”
묵천악이 나직이 웃었다.
그 모습을 총관이 불안한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맹주가 저런 웃음을 지을 때는 정말로 유쾌해서라기보단 억눌린 분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묵천악이 착 가라앉은 음성을 흘렸다.
“총관.”
“예, 맹주님.”
“저 아이…… 그러니까 남궁천은 지금 내게 경고하는 것일세.”
“무슨 말씀이신지요?”
“생각해 보게. 저 폭렬갑은 당연히 남궁천을 통해서 저 아이에게 흘러 들어갔을 걸세.”
“그렇겠지요. 폭왕과 싸운 게 남궁천이었으니까요.”
“그렇네. 폭렬갑을 사용하면 내가 모르겠는가?”
“모를 수야 없지요.”
“그렇지. 그럼에도 윤종승이라는 저 아이에게 폭렬갑을 주어서 비무 대회에서 사용하게 만들었네. 그건 결국 내게 보내는 경고지.”
“경고라면 어떤……?”
총관이 짐작도 못하겠다는 듯 조심스레 묻는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감히 무림맹주에게 경고를 보낸단 말인가?
묵천악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남궁천을 죽이려는 방식을 그대로 내게 돌려주겠다는 뜻이겠지.”
“허!”
총관이 기가 찬다는 듯 헛바람을 뱉어냈다.
“치기 어린 정도가 지나치군요.”
“글쎄. 치기 어린 행동일지, 아니면 정말로 그럴 만한 녀석인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 하지만 난 이걸로 확실히 알았네.”
“무엇을…….”
“남궁천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는 막연한 불안감에 저 아이를 지우려고 했지만, 이젠 확신하게 됐지. 저 아이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돼.”
“맹주님의 뜻대로 될 겁니다.”
총관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대꾸했다.
묵천악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총관이 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우습게도 모든 관중이 윤종승과 팽수혁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비무대에서도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는데, 유독 저 두 사람에게 관심이 쏠려 있는 듯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저 둘이 강해서인가?
아니면 변화를 가져다줄 젊은 피라서?
‘그도 아니면…….’
총관의 시선이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남궁천에게 향했다.
‘자네의 영향인가?’
모르겠다.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나 그만큼 남궁천은 이제 그에게도 커다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처음 맹주가 남궁천을 그토록 의식할 때는 좀 과하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남궁천은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변화가 남궁천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꽈아앙!
그의 상념을 깨트리듯 다시금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마침 윤종승과 팽수혁이 격돌하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장비발을 내밀어도 이 몸을 이길 수는 없다!”
팽수혁이 거칠게 소리치며 태도와 혈염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도가 정확한 길을 따라 흘러간다.
윤종승은 경신법으로 피하면서도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해! 갑자기 이도류(二刀流)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벌써 이만큼 적응하다니.’
아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나는 노력을 했으리라.
아닌 게 아니라, 팽수혁은 매일같이 두 개의 도를 들고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수련을 해왔다.
찢어진 손바닥에 굳은살이 생기고, 다시 또 찢어지길 반복했다.
그 결과 팽수혁은 지금 양손으로 각각 다른 도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른 것이다.
“까불지 말라고!”
쑤아아아아앙!
검붉은 도기를 머금은 혈염도가 다시 횡으로 베어 들어왔다. 철혈적성도법의 철혈회풍 초식이다.
윤종승이 얼른 가문절기인 와도련보(蛙渡蓮步)를 밟으면서 껑충껑충 물러났다.
팟! 팟! 팟!
“쥐새끼 같은! 네 장비발로 내 노력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제 팽수혁의 전신에서는 은근한 살기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기실 하북팽가의 도법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거의 실전형 도법이 주를 이루다 보니 상대를 가려가며 살기가 드러나진 않기에.
파밧!
철혈회풍 초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오른손에 들린 태도가 혼원벽력도의 만장벽력(萬丈霹靂) 초식을 구사했다.
짜르르르르릉!
그대로 세상을 갈라 버릴 듯 떨어져 내린 태도!
동시에 대리석 바닥에 기다란 균열이 번개처럼 뻗어나갔다.
쿠콰콰콰콰콰콰!
“헛!”
파바밧!
윤종승이 이번에도 와도련보를 이용해 이리저리 도약했다.
와도련보의 특징이라면 도약하는 장소가 대개 예상 밖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경우가 많은데, 놀랍게도 만장벽력의 기운이 와도련보를 추격하듯 뻗어오는 게 아닌가?
쿠콰콰콰콰콰!
각도를 꺾어가며 끝까지 뻗어오는 만장벽력기에 놀란 윤종승이 얼른 쌍장을 뻗어냈다.
“하아앗!”
기합성과 함께 단전에서 솟구친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갔다.
콰콰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윤종승의 몸이 대여섯 장이나 떠밀렸다.
쿠르르르르!
역시나 대리석 바닥에 기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만약 재빨리 천근추를 펼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장외 실격을 당하고 말았으리라.
“헉, 헉……! 쿠웨에엑!”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윤종승이 결국 피까지 토하면서 무릎을 짚었다.
상승무공을 연이어 퍼부은 팽수혁도 호흡이 차오르는 건 마찬가지.
“이 정도로 힘을 써야 할 줄은 몰랐다. 확실히 너도 많이 성장했구나.”
“나름…… 헉, 헉……! 애썼으니까.”
윤종승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팽수혁이 미간을 꿈틀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끝까지 갈 생각인 것 같군.”
“당연히. 오히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호오, 이젠 도발까지?”
“그냥 내 솔직한 생각이야.”
척!
윤종승이 말을 마치고는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지만 더 이상 공포 때문이 아니다.
조금 전의 충격으로 근육이 놀란 탓이리라.
단전에서 끌어 올린 공력을 족삼음경(足三陰經)을 따라 흘려보내니 그나마 떨림이 조금 진정된다.
호흡까지 고르고 나니 정신이 맑아진다.
고통은 진즉 잊었다.
싸우면서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걸까?
온 힘을 다해 대결하는 이 순간이 살짝 즐겁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말 마음에 안 드네.”
팽수혁이 칼 두 자루를 척 늘어뜨리고는 중얼거렸다.
윤종승이 미간을 슬쩍 구기자, 팽수혁이 양손에 공력을 주입하면서 말을 이었다.
“어째서 네놈 따위에게…….”
“내가 그렇게 쉬워 보였나?”
“그게 아니라! 어째서 네놈 따위에게……!”
“내가 어때서?”
“왜 네놈 따위에게!”
파앙!
다시 팽수혁의 발끝에서 어기신풍이 펼쳐졌다.
쒸아아아앙!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두 개의 도신!
붉고 검은 도신 두 자루가 몸을 찢어버릴 기세로 날아든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기절하고도 남았으리라.
하지만 윤종승은 본능처럼 몸을 움직였다.
파바밧!
‘두 개의 도신 사이를 비집고 간다!’
한 사람이 칼날 두 개를 휘두르다 보면 반드시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잖아도 패도적인 팽가의 도법이 오직 강공일변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 틈을 노려야 했다.
팟!
처음에는 의외성을 노려서 와도련보를 이용해서 물러난다. 곧이어 연화낙수(蓮花落水) 보법을 이용해 도신 두 자루가 교체하는 순간을 파고든다!
쉬이이이이잇!
윤종승의 신형이 칼바람처럼 비집고 들어간다.
팽수혁이 눈을 부릅뜨고는 버럭 외쳤다.
“어째서 네놈 따위에게만 그런 장비를 주냔 말이다! 남궁처어어언!”
“어……?”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윤종승은 살짝 삐끗할 뻔했다.
다행히 얼른 정신을 다잡고 두 자루의 도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 모든 과정이 적당한 시간으로 느릿하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분명히 나도…… 성장했다!’
윤종승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공력을 운기했다.
슈우우우웃!
뜨끈한 공력이 수태양소장경의 혈맥을 따라 질주하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그만큼 기도에 예민해졌다는 뜻이리라.
마침내 손끝에 다다랐을 때, 공력이 다섯 가닥으로 나뉘면서 손가락 하나하나에 집중된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이르러서는 폭렬갑의 영향을 받아 강하게 분출한다.
콰콰콰콰콰아앙!
“크읏!”
혁련장을 펼친 윤종승도 놀라서 눈살을 찌푸렸다.
폭렬갑의 영향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기에.
하나 이번 일격이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막았어!’
윤종승의 예상대로 팽수혁은 넓적한 태도로 혁련장을 완전히 막아낸 상황.
태도에 막강한 공력을 실은 탓에 뒤로 크게 밀려나지도 않았다.
대신 팽수혁의 눈이 야수처럼 날카롭게 빛나면서 앙칼진 목소리가 터졌다.
“왜 그 녀석이 너한테만 선물하냔 말이다! 나는 절친 아니었냐고오옷!”
샤아아아악!
윤종승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가늘고, 빠르다!’
지금껏 강맹한 공격과 차원이 다르다.
이래서야 마치 화산파의 검법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혈염도가 정말 얇고 예리하게 들어온다.
팽수혁이 눈을 부릅떴다.
‘끝이다, 종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