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17화 (316/508)

317. 우리 절친이었어?

이변이었다.

기실 양규식은 적랑단주에 오를 정도로 무공이 고강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세월과 무림맹에서 실전을 통해 쌓은 경험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견습생 둘을 가볍게 상대하리라 여겼다.

한데 단 두 번의 도격을 맞고 장외로 나가떨어졌다.

운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 차.

게다가 이 대 일로 싸운 것도 아니다.

단 한 명의 공격을 얻어맞고 장외로 튕겨 날아갔다.

벽에 처박힌 양규식은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당연히 사람들은 광기에 찬 함성을 내질렀고, 대연무장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렇듯 이변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웃지 못하는 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팽수혁과 같은 무대에 선 윤종승이었다.

꿀꺽.

윤종승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들것에 실려 나가는 양규식을 보았다.

‘대단하구나.’

새삼 감탄이 흘러나온다.

방금 전 팽수혁의 일격은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 일격을 받았다면?

과연 두 다리로 비무대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기분이다.

“후우우.”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팽수혁이 피식 웃으며 부른다.

“종승아.”

“어…… 응?”

“쫄지 마라. 너도 어엿한 무인이잖냐?”

“그, 그렇지.”

“그럼 덤벼.”

“아…….”

“하지만.”

“응?”

“상대를 인정하는 것도 무인으로서 지녀야 할 용기이자 자질이다.”

“그, 그래…….”

“네가 날 이길 순 없다. 지금이라도 깨끗하게 인정하고 내려가도 된다.”

“아…… 응.”

윤종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윤종승도 덩치가 작은 편은 아닌데, 마주 선 팽수혁을 보니 들소 앞에 선 쥐가 된 심정이다.

확실히 팽수혁의 실력은 엄청나다.

예전에도 감히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

과연 자신이 맞설 수 있을까?

그간 안 본 사이에 팽수혁의 무공이 더 강해진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나도…….”

“어엉? 뭐라고?”

팽수혁이 태도와 혈염도를 양쪽 어깨에 척 걸치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윤종승이 어깨를 슬쩍 움츠렸다가 용기를 내듯 입을 열었다.

“나도…… 강해졌어.”

“으응? 뭐라고 했냐?”

“나도 강해졌다고.”

“호오?”

팽수혁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윤종승을 보았다.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우두둑 꺾더니 이내 인정했다.

“맞아. 우리 종승이도 많이 강해졌지. 더 이상 용천관 호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그 정도는 아냐. 훨, 훨씬 강해졌다고.”

“그래서? 요지가 뭐야? 나랑 붙어보겠다는 거냐?”

팽수혁이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리자, 윤종승이 어깨를 움츠리고는 중얼거렸다.

“그, 그건…….”

윤종승이 우물쭈물거린다.

팽수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종승아. 한마디면 된다. 그냥 ‘기권’이라고 말하면 돼. 이건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다. 이미 말했지만 무인은 상대를 인정하는 용기도 필요한 법이다.”

“…….”

윤종승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두렵다.

두 다리로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떨린다.

이게 과연 무인의 자세일까?

무인이라면 눈앞의 거악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아도 두 눈 부릅뜨고 맞설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상대를 인정할 용기?

정말 자신은 용기가 없어서 지금 망설이는 것일까?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

윤종승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관중석을 힐끔 돌아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이쪽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물에 잠기기라도 한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의식이 그저 멍하다.

온 세상이 침묵에 잠기니 오히려 떨림은 잦아들었다.

그러던 중 윤종승의 눈길이 아버지 윤첨산과 정확히 마주쳤다.

‘아버지…….’

‘종승아!’

윤첨산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아들을 보았다.

철부지 같기만 했던 아들.

늘 야단치고 혼내기만 했는데, 어느새 저리 커서 적랑단주 선발전에 참가하게 된 것일까?

그런데 하필 상대가 하북팽가의 후기지수라니!

팽수혁이 상대를 단 이격에 날려 버릴 때 그는 직감했다.

아들의 상대가 아니구나.

‘아들! 이 아비는 네가 자랑스럽다. 지금 누구보다 떨리고 두려울 테지. 이해한다. 이 아비는 평생 그런 자리에 올라서 본 적이 없었다. 툭 까놓고 말해서 황산윤가가 이만큼 올라온 것도 남궁세가의 몰락을 틈타 어부지리를 노린 것이었다. 하나 너는 다르다. 네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 이 아비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이 아비는 널 응원한다. 지금 기권하더라도 너는 여전히 내게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그러니 너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해라!’

윤첨산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자식이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한때는 자신이 아들을 가르쳤다고 생각했다.

하나 아들은 자신보다 훨씬 영특했다.

스스로 세상을 깨우치고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아들을 보며 세상 이치를 배우고 있었다.

아집과 편견으로만 살아왔던 기나긴 세월.

그게 자신의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했건만.

아니었다.

삶의 방식은 다양했다.

그걸 아들이 깨우쳐 주었다.

마침내 윤첨산이 목청껏 소리쳤다.

“아들! 이 아비는 너를 믿는다! 설령 그 길 끝에 패배가 있더라도! 너의 선택과 너의 용기와 너의 각오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한다!”

목소리가 전달됐을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시끄러운 데다 하필이면 비무대와 거리가 좀 있으니까.

하지만 윤종승은 아버지의 표정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소리친 내용을 똑똑히 들을 순 없었지만, 그 표정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가슴으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

그때였다.

마침 가까운 관중석에서 불쑥 외치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윤종승! 힘내라!”

“너는 우리 희망이다! 여기서 지지 마라!”

“이왕 여기까지 왔다면 끝까지 싸워서 멋진 모습 보여줘!”

멍했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가자, 관중석 앞으로 달려와 소리치는 생도들이 보인다.

‘용천관 생도들?’

그러고 보니 같은 반 생도들이다.

한때 자신을 호구라며 놀리던 녀석들.

그런데 지금은 그들 모두 선망의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며 외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게 강한 자의 여유라는 걸까?

이젠 저들이 별로 밉지 않다.

예전 같았으면 얼굴만 봐도 밟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발끈했을 텐데.

그렇게 다시 시선을 옮기는데, 마침 남궁천이 보인다.

팔짱을 낀 채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는 남궁천.

이상하게 그 얼굴을 보니 갈등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야! 뭐 하냐?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거냐?”

팽수혁의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이 귀가 아프게 들려왔다.

“아…….”

윤종승의 초점이 점점 또렷해지자, 팽수혁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하지 마라. 나도 동료를 때리긴 싫으니까.”

“아니. 괜찮아.”

“뭐?”

윤종승이 피식 웃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시커먼 장갑이었는데, 팽수혁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거 뭐냐?”

윤종승이 시커먼 장갑을 손에 끼며 대꾸했다.

“두고 보면 알 거야.”

“뭐?”

팽수혁은 윤종승의 분위기가 어딘지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고는 표정을 굳혔다.

“너…… 나랑 정말 해보려는 거냐?”

“응.”

윤종승이 단답으로 대꾸하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그래, 이게 바로 자신이 원하는 거다.

그 길 끝에 설령 패배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지금은 끝까지 싸워보는 거다.

윤종승이 표정을 잔뜩 굳히고는 말했다.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어.”

“하!”

팽수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윤종승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용천관 공식 호구였던 윤종승이 이제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다.

“호구 탈출하니까 이젠 너도 내가 우습게 보이는 거냐?”

“우습게 보지 않아. 그래서 더 내 한계를 알고 싶을 뿐이야.”

“이 나를 상대로 말이지?”

윤종승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팽수혁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하늘을 우러러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윤종승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화가 난 것일까?

하긴. 용천관 공식 호구였던 자신이 맞서 싸우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셈이니 부아가 치밀지도.

한데 한참을 웃어젖힌 팽수혁이 입매를 말아 올린 채 윤종승을 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으응?”

“너 말이다. 그래, 그 정도 배짱은 되어야 내 절친이라고 할 만하지. 아주 마음에 들어.”

“어…… 그래.”

“단!”

“……?”

팽수혁이 태도를 척 내밀더니 윤종승을 가리켰다.

“네가 정 그렇게 얻어터지고 싶다니 손속에 사정은 두지 않을 것이다. 각오는 해라.”

윤종승이 두 눈에 힘을 주다가 다부진 미소를 지었다.

“바라던 바야.”

윤종승이 단전에서부터 공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팽수혁도 다리를 척 벌리고는 기수식을 취했다.

하북팽가의 특성상 기수식이 전혀 기수식 같지가 않았다.

마치 동네 왈패들이 껄렁거리며 서 있는 자세처럼 보인다.

하나 실전형 도술을 펼치는 하북팽가다.

저런 어정쩡한 자세에서 어떻게 돌변할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기를 가다듬자 주변의 웅성거림도 잦아든다.

“오, 저 두 사람 싸운다.”

“윤종승이 정말로 팽수혁과 싸우기로 한 모양이네.”

“이제 우리가 알던 종승이가 아냐.”

생도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곳에는 용천관 생도뿐만 아니라 무맹관이나 정협관 생도들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정협관 생도 중에는 모용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지켜보고 있었다.

‘저 녀석이 정말 팽수혁과 싸운다는 건가?’

모용강이 살짝 어이없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그의 기억에 윤종승은 용천관 출신 중에서도 가장 약골이었다.

반면 팽수혁은 남궁천 다음으로 강한 녀석이었다.

한데 저 둘이 싸운다고?

정협관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다.

누군가 자신이나 당우기에게 칼을 겨눈다면?

역시 상상할 수 없다.

정협관은 서열이 완벽하게 고착화되어 있다.

한데 용천관은 도대체 뭔가?

호구였던 놈이 강호신룡이 되질 않나, 또 다른 호구였던 놈이 이인자에게 도전하질 않나?

‘개판이구만.’

모용강의 시선이 자연히 옆으로 돌아갔다.

그는 저만치 서서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지켜보는 남궁천을 보았다.

‘저것도 네 작품이냐? 도대체 네 주변에는 왜 하나같이 정상적인 인간이 없지?’

그러거나 말거나 비무대에서는 이미 두 사람이 기 싸움에 들어간 상태.

서로를 노려보며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기는 윤종승과 팽수혁.

마침내 팽수혁이 바닥을 차며 먼저 움직였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무인이라면 객기와 구분할 수 있었어야 했다!”

쉬이이이잇!

팽수혁의 신형은 그야말로 쏜 화살 같았다.

커다란 덩치가 바람처럼 달려가니 지켜보는 이들이 모두 헛바람을 삼킬 정도다.

윤종승 또한 마찬가지!

‘헉, 빠, 빨라!’

이것이 하북팽가의 어기신풍이라는 것인가?

하북팽가의 경공이 이렇게 빠르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오! 남궁천, 넌 진짜 이 녀석에게 무슨 깨달음을 준 거냐?’

확실히 남궁천은 자신에게만 깨달음을 준 게 아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대단하지 않나?

그래도…… 그래도……!

‘남궁천을 만나면서 발전한 것은 너뿐만이 아냐! 그래도…….’

“그래도 나는 한때 그 녀석의 진짜 절친이었다고!”

윤종승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팽수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팽수혁의 눈동자가 커졌다.

‘오히려 달려들어?’

조금 전 양규식에게 써먹은 자신의 수법을 배우기라도 한 것인가?

그렇다면 녀석의 실수다.

그게…….

“아무나 한다고 되는 줄 알아?”

팽수혁이 단숨에 일도를 휘둘렀다.

철혈섬패!

붉은 기운이 도신에 맺히면서 사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쉬이이이잇!

꽈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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