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16화 (315/508)

316. 우리 절친이었어?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양규식은 코 옆의 점을 부드럽게 쓸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 되겠구나.’

철비대주 양규식.

철비대는 만년한철 같은 귀한 재료를 수집하거나 기물을 찾아서 철심당에 제공하는 조직이다.

원래 젊은 시절 천라단에 속한 그였지만, 과거 진천랑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서 철비대로 옮겨간 터였다.

오히려 철비대가 그에게 더 잘 맞았는지 세월이 흐르면서 비교적 빠른 승진을 거듭하다가 일찌감치 대주의 자리에 올랐다.

하나 그 이후로는 변화가 없었다.

철비대도 나름 귀한 대접을 받는 조직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의 야망은 조금씩 꿈틀거렸다.

더구나 눈치가 빠르고 다른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는 그였기에 오지로 쏘다니는 철비대에서 자리를 다시 옮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터였다.

그러던 차에 치러지는 적랑단주 선발전.

이건 양규식에게 또 하나의 기회였다.

반드시 우승을 할 필요는 없다.

아니, 우승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모용신이 참가했고, 패력궁도 나서지 않았나?

자신이 그 둘을 이길 거라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저 본선 진출에만 의의를 두었다.

만약 재수 없게 처음 비무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싸우기도 전에 기권을 선언할 생각이었다.

포권을 취하며 멋들어지게 내뱉을 대사까지 미리 준비한 터였다.

한데 이게 웬걸?

첫날부터 그야말로 꿀 조가 아닌가?

자신의 상대는 견습생 둘.

아직도 생각난다.

승천각에서 견습생들을 뽑을 때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던 저 두 사람이.

그사이에 제법 기골이 장대해진 것 같긴 하지만 그래 봐야 약관을 겨우 채운 애송이들이다.

이건 신령이 자신을 굽어 살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본선에 진출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게 목적이었는데, 이런 꿀 같은 기회가 덤으로 생기다니!

이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확실히 각인을 시켜줄 수도 있다.

‘최대한 화려하고 아름답게 이기는 게 관건이다.’

양규식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이 둘을 상대로 멋진 승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뛴다.

그렇다.

멋진 승부처럼 보여야 한다.

이왕이면 저 견습생들의 무위가 상당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견습생이라고 마냥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

저들은 그래도 무연회에서 팔 강까지 진출한 실력자니까.

하지만 그게 뭐?

자신도 어엿한 견습생 출신이다.

그 당시의 경쟁력이 지난번과는 차이가 있다지만, 어쨌거나 양규식도 무연회 팔 강 진출자라는 말이다.

솔직히 요즘 떠들썩한 남궁천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아니, 분명 비무 상대로 남궁천이 있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권을 했을 거다.

양규식은 절대로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으니까.

인정할 건 깔끔하게 인정한다.

“강호신룡과 비무를 하게 되다니 영광일세. 하나 혹여나 비무 도중 그대가 다치기라도 하면 이는 강호의 큰 손실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한창 큰일을 해야 할 그대에게 내 기꺼이 승리를 양보하고 욕심을 내려놓겠네.”

크으, 얼마나 멋진가?

남궁천의 아비인 진천랑을 떠올리면 그 아들이라도 두드려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그래도 덤빌 상대를 가려야 하는 법.

그런데…….

“이런 오합지졸 같은 녀석들이라니. 후후.”

양규식이 저도 모르게 말을 흘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마주 선 윤종승과 팽수혁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역시나 성격 급한 팽수혁이 먼저 태도를 뽑아 들고 소리쳤다.

“아저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

“흐음. 들었나?”

“우리 귀는 가죽이 남아돌아서 달린 줄 알아요?”

“허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나. 별 의미 없이 흘린 말일세. 그리고 초면도 아닌데 아저씨라니. 아무리 비무 상대라지만 최소한의 예는 차리는 게 좋지 않겠나?”

“우리가 구면이라고요? 언제 봤다고?”

그러자 윤종승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지난번에 승천각에서 본 적이 있잖아. 철비대주님이야.”

“으응? 아……! 철비대주님이셨구나.”

“이제 알겠나? 당시 자네들의 반짝이던 눈동자가 눈에 선하군.”

“이제 기억이 나네요! 아, 철비대주님이셨구나. 그랬구나.”

“그래, 내가 철비대주 양규식일세.”

“그렇구나.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도 뽑아주지 않은 철비대주였구나…….”

“으음?”

“흐흐흐. 제발 뽑아달라는 눈빛을 그리 간절히 보냈는데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그 철비대주님이셨구나.”

“끄음. 지나간 일은…….”

“오늘날 칼질의 씨앗이 되는 법이죠.”

팽수혁이 입매를 비틀더니 등에 맨 또 다른 칼을 뽑아 들었다.

지난번 마교가 남궁세가를 침략했을 때 주웠던 혈염도였다.

한 손에는 태도가, 다른 한 손에는 혈염도가 들리니 꽤나 사나운 기세를 풍겼다.

양규식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래서 젊음이 좋은 건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도 낭만으로 보일 때지.”

“알아듣지 못할 소리는 그쯤 하시고. 무기 꺼내시죠?”

팽수혁이 소리치자, 철비대주 양규식이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네. 내 오늘 자네들에게 예의를 가르쳐 줘야겠군.”

“그러시죠. 저는 대주님이 그때 인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가르쳐 드릴 생각이니까.”

“허! 패기는 칭찬함세.”

철비대주가 헛웃음을 짓는 사이, 귀빈석에서 커다란 깃발이 펄럭였다.

동시에 관중석에서 함성이 차올랐다.

“와아아아! 시작이다!”

“견습생들 힘내라! 강호신룡의 뒤를 이어라!”

“무림맹도 이제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어리석은 소리! 구관이 명관이다!”

“지지 마라, 철비대주!”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양규식은 단전에서부터 공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스슥.

발걸음을 옆으로 옮기자, 팽수혁과 윤종승도 옆으로 이동한다.

‘훗, 긴장했구나.’

확실히 견습생들이 잔뜩 긴장했다는 게 느껴진다.

양규식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기권하는 게 어떻겠나?”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립니까?”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는 것도 무인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일세.”

“그럼 그런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할 텐데.”

팽수혁이 서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양규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들이 강호신룡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강호신룡은 아니지만 우리는……!”

“자네들은?”

“어…… 음…… 우리는…… 음…… 뭐지?”

팽수혁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윤종승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친구지, 뭐.”

“그렇다! 우리는 강호신룡의 친구들이오!”

“후후후. 그저 친구라는 이유로 자네들이 신룡이 된 건 아니잖은가?”

“그저 친구가 아니란 말이오! 말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저 친구가 아니면 뭔가?”

“어…… 그…… 절친?”

“…….”

“…….”

“그렇군.”

양규식이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애들은 문제다.

조금 친한 사람이 대단한 위업을 세우면, 그것을 마치 자기가 세운 것처럼 착각한다.

그래서 못난 사람일수록 그런 말을 많이 한다. 내가 아는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내 친구가 어쩌고저쩌고…….

‘철부지들.’

양규식도 지난 무연회 때 이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았더랬다.

제법 잘 싸우긴 했다.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었다.

하나 그래도 아직은 자신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지 않은가?

양규식이 걸음을 멈추고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관중석도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자네들은 친구 사이니까 나를 두고 서로에게 칼을 겨누기도 애매할 터. 둘이 한꺼번에 덤비게.”

“음……?”

“합격술이든 차륜술이든 원하는 대로 하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받아들이지.”

“…….”

“…….”

순간 팽수혁과 윤종승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인 듯 서로를 보았다.

팽수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이오?”

“그렇네.”

양규식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하는데, 이번엔 윤종승이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싫은데요.”

“그래, 당연히 싫겠…… 어엉? 싫어? 싫다고?”

“예. 싫어요.”

“아니, 왜? 둘이 동시에 날 공격하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싫다고요.”

양규식이 눈만 크게 끔뻑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지금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 신나게 달려들어야 하는데?

그리고 자신은 그 두 사람을 적당히 상대하다가 멋지게 때려눕혀야 하는데.

양규식의 반응이 그러거나 말거나 윤종승은 팽수혁을 돌아보고 물었다.

“너도 싫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싫지!”

“역시 우린 그렇게 하기 싫어요.”

아니, 저것들이 지금 제정신인가?

아니면 아직 어려서 낭만 따위를 찾는 건가?

정당한 비무를 통해서 의협심을 과시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어른으로서 냉정한 세상을 좀 더 알려줘야 하지 않겠나?

“너희들의 의협심은 잘 알겠네. 그래도 삼파전인데 둘이 편을 먹는다는 게 꺼림칙할 수도 있겠지. 하나 세상은 너희들 생각보다 훨씬 가혹해. 그러니 내가 기회를 줄 때…….”

하지만 윤종승과 팽수혁은 이미 양규식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할래?”

“내가 상대한다.”

“그것도 싫은데?”

“그럼?”

“나도 싸우고 싶어.”

“안 돼. 양보 못 해.”

“나도 싫어.”

“그럼 가위바위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것들이…… 신룡과 어울려 다니더니 주제도 모르고 미쳐 돌았나?

결국 양규식이 사자후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놈들! 내가 그리 우습게 보이더냐!”

“아저씨. 아니, 대주님.”

“뭐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뭐?”

“금방 정할게요.”

팽수혁의 말에 양규식은 정말이지 혼이 털릴 지경이었다.

멋진 한판 승부는 이제 다 날아갔다.

‘저것들이 나를 앞에 두고 가위바위보를 해?’

아닌 게 아니라 윤종승과 팽수혁은 이쪽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서로 가위바위보를 하는 게 아닌가?

마침내 팽수혁이 쾌재를 불렀다.

“아싸! 내가 이겼다! 그럼 저건 내가 맡는다?”

“쳇, 할 수 없지.”

저거……?

지금 ‘저거’가 나란 건가?

양규식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팽수혁이 혈염도를 어깨에 척 걸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태도를 늘어뜨린 채 걸어 나왔다.

“아저씨.”

“나, 철비대주다.”

“아, 철비대주님. 이제 시작하죠.”

“후후. 흐흐흐흐. 흐흐하하하하!”

양규식이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희번덕였다.

“오냐, 네놈들이 감히 나를 능멸했겠다? 이것이 계획적인 격장지계든 뭐든 박살을 내주마. 이렇게 된 이상 내 너희들에게 강호의 무서움을 몸소 깨닫게 해주겠다!”

파앙!

양규식의 신형이 바람처럼 쏘아져 나갔다.

후우우우웅!

‘너희들은 모른다. 기물의 재료를 찾기 위해서 오지를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익힌 실전형 경공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세월의 깊이를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냐? 후회나 하지 말……!’

순간 양규식의 눈이 커졌다.

‘이런 미친…… 맞부딪쳐 와?’

놀랍게도 팽수혁이 어느새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혈염도!

쩌어어엉!

검이 혈염도를 막아내자, 이번에는 옆구리에서 태도가 날아든다.

“이이익!”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며 막았다.

쩌어어어엉!

슈우우우우욱.

콰다아아아앙!

단 이격에 포탄처럼 튕겨 나간 양규식이 저만치 벽에 처박힌 채로 눈을 허옇게 까뒤집었다.

장외실격.

한 견습생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관중석의 함성이 하늘을 떨쳐 울렸다.

“우와아아아아아!”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 속에서 팽수혁이 씨익 웃으며 윤종승을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 우리끼리 한번 붙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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