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초대받지 않은 자들
시끌시끌.
웅성웅성.
무림맹 대연무장 관중석을 빽빽하게 채운 사람들이 저마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
역시나 돈을 걸고 도박하는 자들이 넘쳐났고, 관중석 중간중간 먹거리를 들고 다니는 장사치들이 호객행위를 했으며, 아빠 목마를 타고 마냥 신나서 어깨춤을 추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무림맹 대연무장은 잔치 분위기였다.
몇몇 이들은 술병을 나발째 불면서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떠들어댔다.
“이번 대회는 정말 볼 게 많겠어!”
“강호신룡도 참가한다지? 지난번 무연회도 재미있었는데, 이번에는 한층 더 강한 자들이 모였으니 훨씬 볼거리가 많겠어.”
“그러게 말일세. 우리 같은 평민이 언제 무인들 싸움을 구경이나 해보겠나?”
“맹주님도 참 대단하시지. 적랑단주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채용하시겠다니. 적당히 인맥을 이용해서 자기 사람으로 심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일세.”
“그러니까 강호 무림이 오늘날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이겠지!”
“맞네, 맞아!”
모든 이야기는 결국 맹주를 찬양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드는 말을 들으며 내심 코웃음 치는 자도 있었다.
‘태평성대는 무슨! 북쪽이 흑도 세력으로 득실거리는 것도 모르는가? 마교 놈들은 바로 발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판국에. 쯧!’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자는 다름 아닌 황산윤가주 윤첨산이었다.
그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윤종승 또한 적랑단주를 선발하는 본선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종승이는 어디에 있는 거지? 이 기특한 녀석이 또 이런 일을 벌이다니.’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예선전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입이 귀에 달라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선전만 통과하더라도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적랑단원으로 선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본선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준다면 대주 자리까지도 넘볼 수 있으리라.
‘우리 아들이 적랑단주라니…… 으흐흐.’
윤첨산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엇? 금왕이?’
놀랍게도 무연회에서 만난 적이 있던 금왕이 관람석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 아닌가?
역시나 관람석 한쪽을 아예 통째로 사들이기라도 한 것인지 휘장까지 치고 탁자까지 놓아서 완전히 다른 공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난번에는 남궁 가주 때문에 아쉽게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흑도 무리가 득세를 하고 있지만, 천만다행히 아직은 북쪽 지역에 한해서다.
강남으로는 금왕의 금력이 여전히 대단한 상황.
보아하니 기다란 탁자 주변으로 빈자리가 몇 개 있었다.
‘자고로 기회가 왔을 때 뻔뻔하게 밀어붙일 용기가 필요한 법이지! 아들아, 이 아비는 비무대 밖에서 아비의 방식대로 싸우마!’
마음을 굳힌 윤첨산이 금왕이 앉은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마침 휘장 옆에 선 호신위가 윤첨산을 힐끔거렸지만, 아는 얼굴이어서 그런지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강남의 큰손을 이렇게 또 뵙습니다. 황산윤가 윤첨산입니다.”
“어? 반갑습니다. 저번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지요?”
“오오, 역시 기억해 주시는군요. 하하! 제 아들이 오늘 본선에 참가하게 되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한데 또 이리 귀한 분을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합석을 해도 될까요?”
그러자 금왕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죄송하지만 오실 분이 계셔서요. 오, 마침 오시는군요.”
당황한 윤첨산의 시선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휘장 안으로 막 들어서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검과 남궁화, 그리고 남궁표였다.
‘또 남궁검 가주인가! 도대체 왜 이렇게들 친한 거야?’
윤첨산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자, 금왕이 남궁검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 윤 가주님이 합석을 원하시는데 같이 앉아도 괜찮을까요?”
아니, 그걸 왜 남궁검 가주에게 물어?
윤첨산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차마 표현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기다렸다.
남궁검이 예의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가 괜찮다면 나는 상관없소.”
“그렇군요. 여봐라. 여기 윤 가주님께도 자리 하나 마련해 드려라.”
“예!”
금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종들이 얼른 적당한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급하게 만든 자리여서 그런지 그들이 앉는 의자와는 높이도 낮고 한쪽 구석에 위치해 있어서 격이 떨어져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먼저 합석을 권한 입장에서 싫은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끄음. 감사합니다.”
그렇게 휘장 내 구석진 자리에 앉은 윤첨산이 부러운 시선으로 남궁검과 금왕을 힐끔 보았다.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찌나 진중한 표정인지 감히 자신이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끄응. 아들아, 이 아비는 너만 믿으마.’
윤첨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대연무장 복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 관중석에서 천둥 벽력같은 함성이 차올랐다.
“우와아아아아아!”
“나온다!”
“본선 참가자들이다!”
과연 대연무장 한복판으로 본선에 참가할 무인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예선전에서 수백 명의 무인들이 참가했던 만큼 본선에 진출한 무인도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모두 마흔여덟 명.
그런데…….
“왜 너희들이 여기에 있는 거냐?”
남궁천이 눈살을 잔뜩 구기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팽수혁과 윤종승, 그리고 유현과 진소홍이 어색한 웃음을 배시시 흘린다.
심지어 그들 뒤에는 비량도 서 있었다.
팽수혁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적랑단주는 너만 되라는 법 있냐? 나도 내 한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참가한 거다!”
“나, 나도!”
“마찬가지야.”
윤종승과 진소홍이 얼른 따라 말했다.
그다음으로 모두의 시선을 받은 유현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저는 그저…… 수련을 위해서입니다만. 죽여도 되는 생사비무이기도 하고…….”
마지막 말을 덧붙이지 마!
견습생들이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소리칠 때, 비량이 손뼉을 짝짝 쳤다.
“자자, 이렇게 본선까지 올라온 이상 다들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결과를 얻자. 이 기회에 다 같은 소속이 되는 것도 좋잖아?”
모두들 결의를 굳힌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이들이 본선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증표를 찾아 나섰던 남궁표가 총 다섯 장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비량은 스스로 찾아낸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각자가 각오를 단단히 다지는 사이 다시 관중들의 함성이 솟아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귀빈석.
그곳에는 무림맹주 묵천악이 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묵천악은 함성이 잦아들 때까지 잠시 기다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맹을 찾아준 여러분께 감사드리오.”
나직하지만 공력이 실린 목소리는 수많은 관중들의 귀에 또렷하게 박혀들었다.
“모두 알다시피 본 맹은 최근 흑도 세력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소. 하여, 오늘 이렇게 새로이 적랑단주를 선발하는 행사까지 치르게 됐소. 굳이 이렇게 큰 행사를 치러서 적랑단주를 선발하는 이유는, 아직 본 맹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대외에 알리는 것과 동시에 공정하고 투명한 임용을 위해서요. 그러니 참가한 모든 무인들은 아낌없이 본인의 기량을 뽐내어 만인이 납득할 수 있도록 절정의 무위를 보여주시오. 그리하여 무한을 비롯한 강호의 전역이 바로 무림맹의 치안 아래에 안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길 바라겠소.”
“우와아아아아아!”
맹주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관중들이 하늘이 떠나갈 듯 함성을 터뜨렸다.
이후 진행을 맡은 총관이 나타나 소리쳤다.
“예선전을 통과한 이는 모두 사십팔 명!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본선에 진출한 관계로 지금부터 치러질 일 차 비무는 삼인일조로 이루어질 것이오! 비무대는 보시는 바와 같이 모두 네 곳! 일 차 비무는 오늘부터 하루에 네 개 조씩 동시에 진행될 거요. 그럼 지금부터 대진표를 공개하겠소!”
총관이 말을 마치자 귀빈석 아래로 커다란 두루마리가 후루룩 펼쳐지면서 큰 글씨로 적힌 대진표가 드러났다.
대진표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각양각색이었다.
우선은 본선 진출자가 많다고 해서 삼인일조로 비무를 하게 될 거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중에서도 남궁표는 유난히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쾅!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친 그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형님! 저것들이 일부러 이러는 겁니다! 애초에 삼인일조를 계획한 걸 거라고요! 저 대진표를 짜려고!”
“흐음.”
남궁검은 말없이 대진표를 보기만 했다.
남궁천과 같은 조로 묶인 자는 다름 아닌 현 살충대주 조춘과 시골 문파 출신인 정엽이었다.
하나 정엽이라는 자의 진짜 정체는 바로 적면도 양일강이었다.
남궁표가 이리 분개하는 이유도 불명회를 통해 이러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충대주 조춘은 맹주에게 있어서 입안의 혀 같은 녀석입니다. 게다가 저 정엽이라는 놈의 진짜 신분은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저 둘이 작당을 해서 우리 소가주를 협공할 게 분명합니다.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 삼인일조로 비무를 한다니! 이게 뭔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고요!”
남궁화도 은근히 걱정을 드러냈다.
“아버지, 지금이라도 기권을 하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남궁천에게 적당히 상대하다가 위험하면 물러나게 하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요?”
피식.
‘웃으셨어?’
남궁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남궁검을 보았다.
남궁검은 여전히 대진표에 눈길을 둔 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이뿐만 아니라 꽤 재미있어 보이는 조가 많구나.”
“아버지!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잖아요. 당장 천이를…….”
“그만두게 하라는 말이냐?”
“아…… 그렇게 해야…….”
“할 수 있겠느냐?”
“예?”
“네가 천이를 저기서 나오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뇨…….”
“하면 내 말은 들을까?”
“아…….”
남궁검이 시선을 돌려 저만치 서 있는 남궁천을 보았다.
“그 아이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다. 천이는 이미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켜보자. 저 아이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
남궁화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진소홍으로부터 대략의 내용을 전해 들은 금왕은 이들의 대화를 대충이나마 알아들을 수는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또한 한쪽 구석에 앉은 윤첨산은 오로지 윤종승의 대진표만 살피느라 이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만 남궁표 곁에 선 손우곤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중얼거렸다.
“역시 제가 참가할 걸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남궁표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자네가 참가하면 절대 같은 조로 편성되지 않았을 걸세. 차라리 여기서 지켜보면서 유사시를 대비하는 게 나을 걸세.”
“설마…… 비무 도중에 개입이라도 하라는 말씀인지요?”
남궁표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
“저들이 꼼수를 부려 소가주를 위험에 빠트린다면, 이쪽에서도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을 테지.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남궁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
손우곤이 흠칫거리고는 남궁검을 보았다.
남궁검은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인 만큼 비무에 끼어드는 건 반대할 줄 알았다.
한데 옳은 말이라니?
“하나.”
남궁표와 손우곤이 다시 남궁검을 보았다.
남궁검이 나직이 뇌까렸다.
“우리가 비무에 직접 끼어들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남궁검이 깊어진 눈으로 남궁천의 등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 오전 남궁천과 검을 섞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저 아이는 자네들 생각보다 훨씬 강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