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남궁천은 탁자에 앉아서 흑선이 제공한 서류를 넘겨보고 있었다.
본선에 진출한 자들의 대략적인 정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무림맹 소속은 정보가 꽤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역시 가장 경계해야 할 자가 패력궁인가?’
알려진 명성에 비해 정보가 너무나 빈약하다.
다만 소문만큼은 무성하다.
흑선이 정리한 소문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았다.
열 살 때 무림공적 괴혈도(怪血刀)를 화살 한 대로 잡음.
열두 살 때 무림공적 신마천일(新魔千日)을 화살 한 대로 잡음.
열아홉 살 때 무림공적 고루색마(骷髏色魔)를 화살 세 대로 죽임.
스물한 살 때 무림공적 일검도살(一劍屠殺)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죽임.
…….
…….
서른두 살 때 모든 요직을 거부하고 남문각주로 남음.
이 중 어느 정도 사실일지 모르지만, 남궁천은 대부분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 여겼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지.’
예선전에서 잠깐 눈을 마주쳤을 때 느낀 것이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확실히 패력궁만큼 강한 존재감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가 갑자기 왜 적랑단주 선발전에 참가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적어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어떤 악의를 보진 못했다.
‘뭐, 정말로 강호가 뒤숭숭하니 나선 것일 수도 있고.’
흑선은 주로 무림맹 참가자들에 관한 정보를 자세히 적어두었는데, 무림맹을 감시하는 불명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무림공적에 대한 정보도 꽤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이 역시 무림맹 내에 존재하는 정보를 빼돌렸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리고 거기에는 지각주인 이세천도 한몫 거들었을 테고.
‘그러고 보니 지각주는 좀 괜찮으려나 모르겠군.’
어제 신묵에게 엉망진창으로 얻어터진 이세천은 눈물 콧물까지 쏟아내며 제발 살려달라고 빌어댔다.
제삼자가 본다면 측은지심이 절로 들 만큼 잔혹하게 맞았다.
하지만 남궁천은 신묵을 전혀 말리지 않았다.
신묵이 그만큼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것은, 그 역시 그만큼 맞았기 때문이기에.
어설픈 공포를 심어주게 되면 언젠간 그 공포감에도 적응되게 마련이다.
마치 같은 냄새를 오랫동안 맡으면 그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순응 현상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러니 확실히 해야 한다.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의 처절한 공포를 느끼도록.
‘자고로 지자를 말로 설득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없지.’
그들은 그러잖아도 자기 과신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상식 밖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생각을 거둔 남궁천이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그가 멈칫거리고는 문밖을 향해 물었다.
“누구요?”
그러자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할아버지? 이모님?”
뜻밖에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자는 남궁검과 남궁화였다.
남궁검의 칼날 같은 표정과 무뚝뚝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내뱉는 말에는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진다.
“일찍 일어났구나.”
“예, 두 분,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오늘 본선을 치르는 첫날이 아니더냐? 손자가 큰일을 치르니 당연히 와볼 일이다. 준비는 잘 되어 있느냐?”
“예, 나름대로 신경을 썼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은 하지 않는다. 널 믿는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대화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많이 체감하는 사람은 남궁화였다.
‘아버지와 천이가 정말 많이 가까워졌구나.’
확실히 두 사람이 여행을 다녀온 후로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남궁화가 뿌듯한 심정을 가누며 은근히 남궁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러지 말고 진짜 온 이유를 말씀하셔요.”
“진짜 온 이유요?”
남궁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남궁화와 남궁검을 번갈아 보았다.
남궁검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창밖의 먼 산을 보며 말했다.
“괜히 더 심란할 수도 있다.”
“그래도 축하할 건 해야죠, 아버지.”
축하?
남궁천이 점점 모를 표정이 되어 쳐다보자, 남궁검이 다시 헛기침을 하더니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커흠, 흠! 받아라.”
“어…… 예. 이게 뭡니까?”
“오다 주웠다.”
오다 주워?
뭘 이런 걸 주워 오지?
오다 주웠다고 하기에는 세공으로 잘 다듬어진 목함이 아닌가?
남궁천이 무심히 목함의 덮개를 열어보니 두터운 비단 위에 새하얀 비늘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순간 남궁천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남궁화가 슬그머니 끼어들며 말했다.
“언니가 생전에 쓰던 거야. 신룡갑(神龍匣)이라는 기물이야.”
“……그렇군요.”
남궁천이 목소리를 쥐어짜듯 말하자 남궁검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냐?”
“아닙니다.”
“한데 표정이 안 좋구나.”
“아뇨. 그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요.”
남궁천의 목소리에 남궁검과 남궁화가 서로를 잠깐 바라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남궁천이 부활한 후로 너무나 거침없이 살아왔기에 제 어미에 대한 그리움마저 잊은 것만 같았다.
한데 지금 모습을 보니 또 아닌 모양이다.
남궁천이 천천히 신룡갑을 꺼내 들고 어루만졌다.
남궁화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신룡갑은 웬만한 검기까지 막아낼 수 있는 기물이야. 가세가 기울었을 때 그걸 팔았다면 큰돈이 되었겠지만, 언니의 유물이어서 아버지가 끝까지 지킨 거였어.”
“그렇군요.”
“한번 착용해 볼래? 신룡갑을 끼고 적당량의 공력을 주입하면…….”
“……저절로 수축하거나 늘어나서 손의 크기에 딱 맞춰지죠.”
남궁천이 무심히 흘린 말에 남궁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룡갑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니?”
알다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남궁선에게 이 신룡갑을 선물한 게 바로 자신인데.
이렇게 신룡갑을 만지고 있자니, 마치 남궁선의 손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남궁천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뭐, 책으로 배웠으니까요.”
말을 마친 남궁천이 신룡갑을 꺼내 들어 손에 끼웠다.
그러자 그가 말한 대로 얇디얇은 장갑이 저절로 수축하면서 손의 크기에 꼭 맞았다.
워낙 투명하다 보니 실제로 장갑을 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남궁천이 포권을 하며 예를 갖추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늘에서도 네 어미가 지켜볼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한데 갑자기 이런 선물을 제게 건네시는 이유가…….”
그러자 남궁화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너 정말 모르고 있었어?”
“뭘요?”
여전히 남궁천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짓자, 남궁화가 싱긋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 스무 번째 생일.”
“아…….”
그런 건가? 오늘이 생일인가?
남궁천은 스무 해 전 오늘, 남궁선이 홀로 아이를 낳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선아, 오늘따라 네가 더욱 보고 싶다.’
남궁천이 어딘지 아련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자, 남궁화가 얼른 말을 뱉었다.
“본 가에 소가주실을 완공했어. 생일에 맞춰 완공하려고 애를 많이 썼단다.”
남궁천이 빙그레 웃었다.
“고맙습니다, 이모님.”
“나 역시 준비한 것이 더 있다.”
“또요?”
“어차피 비무 대회가 오후에 시작되니, 몸을 좀 풀어도 좋지 않겠느냐?”
“그 말씀은…….”
“비무를 해보자. 무공을 봐주겠다.”
남궁검의 말에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좋습니다, 할아버지. 저도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물론이다.”
* * *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 방 먹이겠다.”
“그래도 생일인데 너무한 것 아냐?”
윤종승의 말에 팽수혁이 발끈해서 되받아쳤다.
“너무하긴? 생일이니까 한 방 먹여야지. 자고로 생일에는 두드려 맞아야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이다. 그리고 남궁천이 먼저 우리를 불렀잖냐?”
“흐음. 그래도 생일이라서 부른 게 아닌 것 같은데. 유현 도장 생각은 어때?”
그러자 유현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글쎄요. 생일에 액땜이라는 걸 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래서 유현 도장도 남궁천과 한바탕하려고?”
“본선을 앞두고 가벼운 수련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남궁천을 죽여 버리진 않을 테니까요. 생일상을 제사상으로 만드는 건 친구로서 도리가 아니니.”
“어…… 그래…….”
뭔가 초점이 이상하잖아!
윤종승이 해쓱한 표정을 짓자, 유현이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생일 때 칼침을 맞는 건 오랜 전통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언제부터!
“그냥 요혈을 피해서 살짝살짝 찔러대는 정도면 혈액 순환에도 도움이 되고 좋을 겁니다.”
“어…… 그래…….”
확실히 언제부턴가 이것들이 남궁천만큼 미쳐가는 것 같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견습생들은 귀왕객잔에 다다랐다. 그런데 마침 객잔 후원에서 요란한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쩌엉!
다르르르르……!
어찌나 큰 소음인지 주변의 기왓장과 창문이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견습생들이 서로를 번갈아 보다가 얼른 걸음을 놀려 전각 뒤로 돌아갔다.
객잔 후원에서는 남궁천과 남궁검이 대련을 하고 있었다.
“오…… 남궁검 가주님이 직접 생일 칼침을……!”
팽수혁이 감동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현과 윤종승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
남궁검과 남궁천의 대련이다.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남궁화가 세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켜봐도 좋다는 뜻.
“검이 썩 좋구나.”
“덕분입니다.”
남궁검의 말에 남궁천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편 남궁검은 내심 놀란 심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사이에 마기를 완전히 제압했구나.’
사실 오늘 대련을 하자고 한 것은 남궁천이 흡수한 천마신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비무 도중에 마기를 풀풀 휘날리기라도 하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기에.
한데 지금 남궁천은 완벽하게 마기를 제압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불가해한 성장 속도군.’
이젠 대견함을 넘어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쩌면 남궁선보다도 더한 기재가 아닌가 싶다.
“좋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마.”
“받아보겠습니다.”
남궁천이 대답과 동시에 서서히 기수식을 취한다.
남궁검도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단전에서 공력을 뽑아 올리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오……!
남궁검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읽혀질 정도다. 심지어 살기마저 느껴진다. 그만큼 실전을 염두에 두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것이리라.
“본선을 앞두고 다칠 수도 있다.”
“주의하겠습니다.”
남궁천이 담담히 답한다.
남궁검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곧 있을 본선은 생사비무로 진행된다. 당연히 적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들 것이다. 그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마기를 확실히 다스려야만 한다.
남궁천도 한 번쯤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견습생들을 부른 것인데, 마침 남궁검이 대련을 해주겠다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에 있겠나?
한편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윤종승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소곤거렸다.
“저거…… 좀 위험한 거 아냐?”
팽수혁과 유현도 긴장한 표정으로 아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태어나서 처음 겪을 정도로 막강했기에.
일격에 절정고수도 양단 낼 것만 같은 강인한 기세이지 않은가?
‘강하다. 두 사람…… 엄청나게 강해!’
팽수혁과 유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번쩍!
남궁검의 전신에서 빛이 터졌다. 다음 순간 남궁검은 이미 남궁천의 지척에 다다라 일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엄청난 금속성에 이어 기파가 사방으로 불어 나갔다.
후우우우우우웅!
“크읏!”
먼지바람이 휘몰아치니 견습생들이 얼른 팔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팽수혁이 윤종승에게 넌지시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갈까? 우리도 본선 참가해야지? 첫날부터 지각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