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09화 (308/508)

309.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이세천이 멍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나 남궁천의 살벌한 눈초리를 보니 제대로 들은 모양이다.

하!

이거야말로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 아닌가?

풍전등화 신세인 줄을 모르고 이리 까분다?

여기저기에서 강호신룡이라며 떠들어주니 이 새파란 애송이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닌가?

이세천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탁!

그가 비워낸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무례하군.”

“그래, 주인에게 반말 지껄이는 건 무례한 거지. 그걸 아는 양반이 이러나?”

“허!”

이세천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하나 여기서 흥분하면 자신이 손해다.

이런 애송이의 도발은 의연하게 넘길 수 있어야 한다.

이세천이 남궁천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도 젓가락을 놀려 능파어 구이를 한 점 뜯어 먹었다.

이런 어린아이의 유치한 도발은 최대한 태연하게 넘긴…….

“잘 처먹는구나.”

멈칫.

아니, 진짜 이런 미친놈이……!

정말이지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다.

웬만한 논리로 도발을 한다면, 마찬가지로 논리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한데 이건 뭐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니…….

“그렇게 맛있나?”

“자네와 대화하다 보니 입맛이 떨어지는군.”

“에이,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맛있게 처먹던데.”

하아,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한다.

이건 뭐, 새파란 어린애와 대화하는 기분이다.

아니, 실제로 새파란 어린애지.

그래서인지 대화할 맛도 안 나고, 이런 애송이 앞에서 뒤끝 없는 척하며 술잔을 받아 마신 것도 후회된다.

‘이건 그냥 늪이군.’

정말이지 천뇌당의 지각주인 자신의 대화가 이런 어린애 수준으로 전락하다니.

공자 왈, 맹자 왈 읊으면서 학술적으로 싸워도 성에 차지 않을 판에, 이런 치기 어린 대화나 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다니.

‘뇌가 굳어지는 느낌이야.’

표정을 굳힌 이세천이 젓가락을 내려두고는 말했다.

“나, 지각주일세.”

“알아.”

“총군사를 보필하는 세 명의 지자 중 한 사람이란 말이네.”

“안다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런 내가 홀로 다닐 것 같은가?”

“호위가 있단 말을 하려는 건가?”

“그렇네.”

“호위가 어째서 이곳에 올 때까지 나서지 않았을까?”

“그야 아직 내가 위험하지 않으니까. 하나 자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 호위를 부를 수밖에 없네.”

“불러, 그럼.”

남궁천이 태연하게 말하자 이세천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그래, 굳이 길게 끌 것도 없지.’

생각을 마친 이세천이 허공을 향해 말했다.

“신 호위. 나오게.”

“…….”

“신 호위?”

“…….”

“신 호위!”

그제야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이세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호위의 반응이 없다.

“신 호위를 어떻게 한 것인가!”

이세천이 남궁천을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남궁천이 씨익 웃더니 순간 차갑게 변한 표정으로 명했다.

“앉아.”

“네놈이……!”

“뒈지기 싫으면 앉아.”

“……!”

“마지막으로 말한다. 앉아.”

이젠 남궁천의 전신에서 숨 막힐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세천이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군.”

“그걸 알면 주둥이 조심해야지.”

“신 호위는?”

“안 뒈졌으니 걱정하지 말고.”

남궁천이 다시 술잔을 채워준다.

또로로롱.

맑은 소리가 객잔 내부에 울린다.

“마셔.”

이세천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다가 술잔을 집어 들었다.

거부할 도리가 없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쳐 죽일 기세가 아닌가?

정말이지 살다 살다 무림맹 본단 코앞에서 이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다.

‘이놈은 진짜 미친놈이다.’

비유 따위가 아니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각주인 자신을 이렇게 대하겠나?

남궁천이 팔짱을 끼더니 등을 기댔다.

“신 호위가 그리 보고 싶다니 만나게 해줄까?”

“……?”

“신 호위.”

남궁천이 부르자 순간 천장에서 그림자가 툭 떨어졌다.

이세천의 눈동자가 커졌다.

“신 호위!”

하지만 그의 호위 신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신묵의 얼굴이 어딘지 이상하다.

뺨은 퉁퉁 부어올랐고, 눈자위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으며, 입술은 불어 터졌다.

‘맞, 맞았어?’

이세천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도대체 언제……?”

“그게 중요한가? 자고로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하면, 호위를 항시 눈에 보이는 곳에 대기시켰어야지. 어디서 보고 들은 건 있어서 괜히 은신시켜 졸졸 따라다니게 하니 이 사달이 나지. 이제 보니 각주는 겉멋이 잔뜩 들었군.”

“남궁천……!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신 호위.”

남궁천이 말허리를 자르며 부르자, 신묵이 움찔 떨고는 고개를 숙인다.

이세천이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쫄았어?’

저 신묵이 쫄았다고?

아무리 강호신룡이 강하다지만, 신묵을 저렇게 말 한마디로 위축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뭘 어떻게 당했기에……?

남궁천이 턱짓으로 이세천을 가리켰다.

“저자가 아까부터 나한테 반말을 하네. 기분이 몹시 나쁘다.”

“조치하겠습니다.”

신묵이 깍듯하게 대답하더니 이세천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어……? 신 호위?”

따악! 쿵!

순간 뒤통수에 불이 붙은 이세천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이마를 탁자에 찧었다.

“크윽!”

하지만 무자비한 폭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신묵이 이세천의 목덜미를 덥석 낚아채더니 그대로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컥, 컥……! 켁! 신 호위…… 이게 무슨……!”

퍼억!

쿠당탕탕!

그대로 한쪽 구석까지 날아간 이세천이 피를 토하며 굴렀다.

“쿠웨에엑!”

저벅저벅……!

그럼에도 신묵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가더니 이세천의 목을 움켜잡고는 들어 올렸다.

“커억…… 신 호위…… 정신 차리……!”

짜악!

“끄윽! 신 호위! 자네 정말……!”

짜악!

“크흑! 신……!”

짜악!

신묵이 연신 이세천의 뺨을 후려쳤다.

그때마다 피가 튄다.

어찌나 세게 때리는지 세 번째로 후려쳤을 때는 이가 툭 부러져 나갔다.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 호위.”

움찔!

이번에도 신묵이 어깨를 떨고는 돌처럼 굳었다.

남궁천이 신묵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너무 잔인하잖아. 그러다 말도 못하면 어쩌려고 그래?”

“죄송합니다!”

신묵이 들고 있던 이세천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고는 얼른 돌아서서는 고개를 푹 숙인다.

이 황당한 상황에 이세천은 이제야 두려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부 미쳤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미친놈은 역시…….

“각주, 와서 앉아.”

“끄음……!”

이세천이 신음을 흘리고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따악! 콰당!

다시 한번 뒤통수에 불이 나면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친 신묵이 눈알을 부라렸다.

“대답.”

“가, 가겠소.”

휙!

“가, 가겠습니다! 갑니다!”

그제야 이세천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던 신묵의 손길도 멈췄다.

정말이지 이런 치욕이 없다.

자신의 호위가 자신을 죽일 듯 패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세천이 비틀거리며 걸어와서는 남궁천과 마주 앉았다.

“마셔.”

“…….”

이세천이 신묵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술잔을 가져가서 입에 털어 넣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달기만 하던 술이 꽤나 독하게 느껴진다.

“안주도 먹고.”

남궁천이 웃는 낯으로 탁자에 차려진 산해진미들을 가리킨다.

이세천은 마다하지 않고 동파육 한 점을 집어 입에 쑤셔 넣었다.

양념이 입안의 상처에 닿으니 따갑고 쓰렸다.

이세천이 남궁천을 슬쩍 보고는 물었다.

“재미있…… 습니까?”

“재미있지.”

“뭐가 재미있습니까?”

“나를 애송이로 보던 인간이 지금 내 말을 거역도 못하고 꼬박꼬박 존대를 하잖아. 이런 쾌감이 또 어디에 있겠나?”

“날 죽일 생각입니까?”

“아니. 지각주를 죽였다간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이세천이 남궁천을 다시 보았다.

생각보다 미친놈은 아닌 건가?

아니다. 그걸 아는 놈이 자신을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

역시 생각보다 더 미친놈인가?

“날 죽이지 않을 거면서 이렇게 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말을 듣게 만들려고.”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요?”

“넌 하게 되어 있어.”

“……?”

“너는 안전을 추구하는 성격이지. 그래서 불명회가 어린 내게 좌지우지되는 현실이 불만인 거고. 차라리 불명회를 배신하고 나를 팔아서 좀 더 안전한 방법을 노리려는 거겠지. 그게 아니면 불명회를 네가 삼켜서 더 높은 자리를 노려보거나.”

“……!”

“내가 좀 잘 알지? 너 같은 부류를 많이 봤거든. 원래 배신자들이 그래. 어떤 사명감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란 거지. 대개는 겁쟁이야. 그래서 회유나 협박을 하면 쉽게 말을 바꾼다. 머리 좋은 것들이 특히 더 그렇지.”

“…….”

“지각주니까 잘 알 테지? 맹 내에서 정적을 처리할 때도 자주 써먹는 방법일 테니까. 사람 하나 낙인찍어 골로 보내는 건 일도 아닐 거 아냐?”

“할 말이 뭐요?”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무림공적이 되었다고 들었거든. 주변인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거짓 증언을 하게 만들고 날조해서 대살성이 되셨지.”

“……!”

“알아. 그땐 네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기회를 주려는 거야. 같은 방법으로.”

“같은 방법으로……?”

“잘 처먹더라. 맛있었어? 당가에서 가져온 독인데 효과가 좋은 것 같더라고.”

“……!”

“아, 혼자만 먹은 건 아니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살곡주도 너랑 같은 걸 먹었거든. 뭐, 걔는 덩어리째로 먹었고, 너는 요리에 녹여 먹었으니까 조금 다른 방식이긴 하지. 그래도 같은 독이야.”

“그런…….”

“한 달마다 해독제를 준다. 하지만 해독제 약효도 딱 한 달이야. 물론 말만 잘 들으면 매달 해독제를 지급해 준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그 얼굴이 마치 야차처럼 보일 지경이다.

어찌 이렇게 비열한 인간이 있나?

쾅!

참다못한 이세천이 탁자를 내려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리 비열할 수가! 당신이 그러고도 백도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소? 자고로 전쟁하는 국가끼리도 사신에게 밥상 차려주며 독을 푸는 법은 없소!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면서 독을 풀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퍼억!

콰장창창!

언제 다가온 것인지 신묵이 이세천의 머리를 그대로 탁자에 내리꽂았다.

안면이 피범벅이 된 이세천을 보며 남궁천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서 네가 겉멋만 잔뜩 들었다는 거야. 전쟁 중에 사신들이 얼마나 많이 죽는지 몰라? 그래도 지자라는 소릴 듣는 자가 어디서 얼어 죽을 낭만을 찾고 있어? 다른 걸 떠나서 조직을 배신하려던 인간이 뭐? 비열해? 너는 비열하게 살면서 세상은 정의롭길 바라는 모순이 널 그 지경으로 만든 거다.”

“…….”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알아들었으면 바짝 엎드려서 빌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