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누가 누굴 도와?
“그런데 말입니다.”
총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차를 마시던 맹주가 총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을 마저 하라는 지시였다.
총관이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남궁천이 그만큼 신경이 쓰이시고, 또 그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라면…… 더 강한 자들에게 사냥을 지시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더 강한 자들에게?”
“예. 남궁천 죽이기에 참가하는 무인들 다수가 예선전에서는 남궁천을 사냥하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그렇겠지. 내가 그리 지시했으니까. 행여나 고 각주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
“하지만 맹주님이 그처럼 신경 쓸 정도의 남궁천이라면…… 고 각주를 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고 각주가 이끄는 무인들도 모두 당할 수 있을 텐데요.”
“그렇겠지.”
“네?”
“자네 말대로 남궁천이 고 각주는 물론, 그 졸개들까지 모두 죽일 수도 있단 말이네.”
“그걸 짐작하시면서도 왜…… 아……!”
뭔가 한 가지 생각이 스친 총관이 흠칫거리고는 맹주를 보았다.
묵천악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는가?”
“만약 고 각주가 실패한다면…… 차라리 남궁천이 고 각주와 그 부하들을 전부…….”
“죽여주길 바라는 걸세.”
“……!”
“그것도 압도적으로.”
“그, 그렇군요.”
총관은 등줄기를 타고 솟구치는 한기를 느꼈다.
맹주 묵천악.
정말 무서운 자가 아닌가?
고천수는 진정한 장기 말에 지나지 않았다.
묵천악이 찻잔을 내려두며 말을 이었다.
“어느 쪽이든 좋은 걸세. 고 각주가 독초가 되어 남궁천을 죽여줘도 좋고. 남궁천 그 자신이 독초가 되어도 좋고.”
“……!”
“전자일 경우에는 모든 정리가 끝날 테지. 하나 후자일 경우 남궁천은 과연 천하대살성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테지.”
“그땐 제 아비의 전철을 밟게 되겠군요.”
“그럴 수밖에. 고 각주를 비롯한 그 수하들만 해도 수십 명일세. 한데 그들을 이 대회에서 다 죽여 버린다면?”
“세상이 등을 돌릴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네. 나는 남궁천에게 책임을 전혀 묻지 않을 걸세. 그러나 세간의 여론은 다르게 흘러갈 것이야. 대회 도중 적랑단주 자리에 눈이 먼 후기지수가 맹에서 한솥밥을 먹는 자들까지 잔혹하게 도륙했다면? 강호는 과연 남궁천을 인정해 줄 것인가?”
“그런 심계가 있었군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야 심계지.”
“하면 남궁천은 이런 덫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요?”
“모르겠네. 그 아이에 대해서 정말 모르겠네. 하나 그 아이가 궁지에 몰린다면 충분히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네. 그 아이는 가끔 대살성의 기운을 풍기니까.”
“피가 이어졌기 때문일까요?”
“글쎄. 피가 이어졌다기보단 마치…… 그 자신이 진천랑처럼 보일 지경이더군.”
“그 정도로…….”
“그러니 내가 이렇게 경계를 하는 걸세. 예전에 총군사가 그러더군. 진정한 적과 싸울 때는 칼로만 싸울 수 없다고. 모든 환경을 총동원에서 경우의 수를 전부 막아 버려야 한다고. 스치는 바람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야.”
“과연 지금 상황이 그러합니다.”
총관이 허리를 숙이며 하는 말에 맹주가 식은 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두고 보자고. 과연 그 신룡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 * *
“허어, 거참.”
남궁표가 한숨을 내쉬고는 집결지 마당을 서성거렸다.
벌써 증표를 찾은 무인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모두 증표를 찾은 자들이다.
남궁표가 집결지로 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결지에 도착한 무인은 극소수였다.
물론 패력궁 천무류는 이미 본선 진출 증표를 접수하고는 한쪽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졸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 모습만 봐도 여유가 넘치는 것 같았다.
모르긴 해도 참가자 중에서는 그가 가장 먼저 도착했으리라.
신궁이라는 소리를 듣는 만큼 시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테니까.
그야말로 매의 눈으로 증표를 찾아내지 않았겠나?
그 외에는 세 명 정도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표는 살수와 불명회원들을 이끌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누구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증표를 찾아낼 수 있었는데, 이미 그들 수중에 들어온 증표만 다섯 개였다.
한데 집결지로 돌아와 보니 문제가 생겼다.
남궁천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소가주는 어딜 간 거지?’
남궁표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서투른 발걸음에서 초조함이 뚝뚝 묻어난다.
‘소가주,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가? 자네는 그저 가만히 집결지에서 기다리다가 우리가 찾아온 증표만 받아서 내면 될 것을!’
설마 남궁천을 노리는 것들에게 당한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면…… 아까 들었던 폭음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산사태? 아니지. 지진이 일어나서 땅속으로 꺼진 건 아니겠지?
남궁표가 손톱을 딱딱 물어뜯기 시작했다.
온갖 생각이 다 든다.
혹시나 이미 증표를 제출하고 귀왕객잔으로 돌아간 건 아닌지 알아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끄음.”
남궁표가 불편한 심경으로 침음을 흘리자, 살수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어르신, 조금만 기다려 보시지요. 분명히 시간에 맞춰 올 겁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으음. 한 식경 남짓입니다.”
“한 식경 남짓이라고? 벌써 그렇게 됐단 말이야? 조금 전에 해가 저물지 않았나?”
“조금 전은 아니고요.”
살수가 정정해주자 남궁표는 더욱 빠른 속도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뭔가 일이 생긴 게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늦을 리가 있겠느냐? 설마 누군가에게 당한 건 아니겠지? 방금 그 폭음 소리는 뭐였을까? 갑자기 땅이 무너져서 매몰이 되었다거나…….”
“어르신, 진정하시지요.”
살수가 다시 차분한 어조로 말했지만, 남궁표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걸음을 성큼 옮겼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직접 찾아가봐야겠다!”
“그러다가 길이 엇갈리면 괜히 고생만 하십니다. 혼자 계신 것도 아니니 반드시 돌아오실 겁니다.”
어찌 된 것이 남궁천에 대한 믿음이 남궁표보다도 살수들이 더 큰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남궁천이 살곡을 단 하루 만에 접수해 버리는 기현상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살곡의 표적이 되고도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 살곡의 주인이 된 남궁천이다.
한데 이런 곳에서 죽는다고?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하나 언제부턴가 남궁천을 금이야 옥이야 대하게 된 남궁표는 걱정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때마침 접수원이 남궁표를 보며 소리쳤다.
“증표 접수 안 할 겁니까?”
“커흠.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게.”
“뭐, 좋을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자정이 넘도록 접수를 하지 않으면 실격 처리라는 것만 유념해 주십시오.”
“아 글쎄, 알고 있다니까!”
남궁표가 괜히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는 뒷짐을 졌다.
그때 마침 한 무리의 무인들이 집결지로 우르르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을 본 살수가 나직이 외쳤다.
“어르신! 주군과 함께 있던 자들입니다!”
“오오! 그렇구나!”
남궁표가 한달음에 달려가서 손우곤을 찾아 물었다.
“손 대주! 소가주는 어디에 있는가?”
“아……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여기라니? 자네들과 함께 있지 않았나!”
남궁표가 다그치듯 소리치자, 손우곤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가 비량을 비롯한 견습생들과 흑선을 돌아보았다.
그들 모두 표정이 한결 어두워지면서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남궁천이 아직 안 왔다니. 제발 큰 사고를 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나 남궁표는 다른 의미로 조바심이 생겼다.
“아니, 소가주를 지키겠다며 함께 있지 않았나? 그런데 왜 소가주만 안 보인단 말이야!”
“고정하십시오, 어르신. 주군은 무사할 겁니다.”
손우곤이 얼른 진정시켰지만, 남궁표는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고정을 하게 생겼나? 저 목란산에 우리 소가주를 노리는 자들이 얼마나 득실거리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발 뻗고 기다릴 수나 있겠어?”
‘발 뻗고 기다릴 수는 없겠죠. 행여나 그놈들을 죄다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요.’
손우곤이 목구멍에 차오른 말을 삼키고는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그런데 때마침 이번엔 언덕 아래에서 호화스러운 사두마차가 올라오는 게 아닌가?
“워어, 워!”
사두마차를 멈추고 마부석에서 장정 두 명이 내렸다.
그들은 바로 귀왕과 귀소이였다.
귀소이가 귀왕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공자님이 우릴 보시면 기뻐하시겠죠?”
“당연히 그럴 것이다. 대회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가실 때 편안한 마차로 이동하면 얼마나 좋겠어?”
“옳습니다요. 부디 저희들 성의를 생각하셔서 봉급도 조금 올려주심 좋겠네요. 흐흐.”
“바로 그거지. 우린 그걸 노리는 거다. 그사이에 많이 배웠구나.”
“형님 덕분입니다요.”
“그나저나 공자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건가?”
마침 저만치 선 손우곤을 알아본 귀왕이 얼른 걸음을 옮겼다.
“대주님, 공자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까요?”
“아직일세. 자네들이 여긴 어쩐 일인가?”
“그저 공자님이 편히 숙소로 이동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중을 나왔습지요.”
“잘했군. 아마 곧 오실 걸세.”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남궁표가 불쑥 나섰다.
“허어. 그리 태평하게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네. 손 대주, 자네라도 가서 찾아보게. 내가 이곳에 있을 테니.”
“이 넓은 목란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어차피 시간이 다 되었으니 곧 나타나실 겁니다. 그저 사고만 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으응? 그건 무슨 소린가?”
“아무튼 어르신, 너무 걱정 마십시오. 주군은 무사할 겁니다.”
이 묘한 대화를 들으면서 귀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귀소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는 손짓하더니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서 속삭였다.
“아무래도 공자께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그러게요. 이제 일각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아직도 보이지 않으니…….”
“만약 공자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헉. 그럼 우린 이제 어쩌죠? 공자님 덕분에 우리가 개과천선하고 이렇게 새 출발을 하게 됐는데…….”
“물론 시작은 그랬지. 하나 귀왕객잔을 이리 키운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더냐?”
“그건 그렇지요.”
“어쨌거나 만약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우리도 대비를 해야겠다.”
“어떻게 말입니까요?”
귀왕이 진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지분 정리를 해야겠지.”
“지분 정리라면…….”
“귀왕객잔의 지분을 모조리 가져간 그 독사 같은…… 아니, 은인 같은 분이 돌아가셨으니…….”
“그럼 역시 귀왕객잔의 진정한 주인은 형님이 되시는 건가요?”
“커험, 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귀왕객잔은 우리 모두의 것이지.”
“아…….”
“나는 그 독사와…… 아니, 은인과 다르다. 내 지분은 오 할만 가질 생각이다.”
“하면 나머지 오 할은?”
“너희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오오, 형님! 역시 형님은 대인배이십니다!”
그러자 귀왕이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그시 감으며 부처 같은 미소를 지었다.
“허허, 그 무슨…… 그게 당연한 것이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고생하지 않았느냐? 그걸 인정해야지. 누군 그 개고생을 눈곱만큼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가 누군데?”
“누구긴 누구겠느냐?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인간이지.”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거참, 우릴 개처럼 부려먹고 소처럼 일 시켜서 돈은 다 챙겨가는 잘난 은인이지 않느냐?”
“그렇구나.”
“그래. 그런데 그 은인이 이번 예선전에서 사고로 죽기라도 했다면…….”
“했다면?”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이야, 얄짤없네.”
“당연하지.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법. 죽음 앞에서는 얄짤없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아니, 뱀 새끼를 키웠네. 아주.”
“응? 네가 왜 뱀을 키워?”
그제야 귀왕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슬쩍 돌아보았다.
한데 귀소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열심히 손짓을 하는 게 아닌가?
이놈이 갑자기 벙어리가 됐나?
“뭔 말이냐? 이놈아.”
그런데 대답이 옆에서 들렸다.
“뭔 말이긴. 오늘은 피곤한데 뱀탕을 끓여 먹어야겠단 소리지.”
“으응?”
그제야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귀왕이 뻣뻣해진 목을 돌렸다.
어느새 온 것인지 남궁천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물부터 올려라?”
“아…….”
귀왕이 어버버하는 사이 저만치에서 감격에 찬 남궁표가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