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05화 (304/508)

305. 누가 누굴 도와?

섬광이 번쩍이는 순간 고천수는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우습게도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떠올랐는데, 가장 먼저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불꽃이 튀는 대장간이었다.

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튀어 오르는 불꽃.

시커먼 쇠망치가 붉게 달아오른 날붙이를 두드릴 때마다 불꽃이 하늘하늘 춤을 추듯 튀어 올랐다.

어린 고천수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아름다웠다.

그래서 고천수는 아버지처럼 대장장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다.

하지만 보통 대장장이는 아니었다.

무림맹에서 지급되는 모든 병기류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철정각주(鐵正閣主)였다.

고천수는 아버지가 제조하는 모든 병기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맹에서 입수한 정체불명의 무기를 분석하던 아버지는 폭발 사고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마교의 무기였는데, 그 속에 폭약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른 채로 다루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실의에 빠진 고천수를 키워준 것은 지금의 맹주였다.

“네 아버지를 집어삼킨 화마를 네가 직접 다스려 보아라.”

그때부터 고천수는 폭약에 빠져서 지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아버지를 집어삼킨 화마를 직접 다루겠노라 다짐했다.

폭약을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문둔갑술을 익히게 됐다.

맹주는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고천수는 맹주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렇게 연구에만 몰두하다 보니 점점 폭약의 끝없는 강함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고천수는 폭약과 내공의 조화를 잘 이룬다면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폭기를 다룰 만한 물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웃었다.

제대로 된 공력을 쓰지 못하는 자나 병장기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천수는 개의치 않았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아치우는 강호인들이 아니던가?

한데 자신은 그 길을 폭약에서 찾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십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서 온갖 희귀한 재료를 넣어 만들어낸 것이 바로 폭렬갑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어지간한 사람은 고천수를 상대할 수 없었다.

나이가 서른이 되기도 전에 일찍이 폭왕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무림맹에서도 고천수의 능력을 높이 사서 살충대주로 발탁했다.

살충대는 모든 대 중에서도 가장 요직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어지간한 각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리.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진천랑을 만났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처절한 절망감을 안겨준.

‘빌어먹을……!’

떠올리기도 싫은 날이다.

얼굴 절반이 타들어갈 때의 끔찍한 고통이란.

그런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서 복수를 이룬 것이다!

맹주님, 보고 계십니까?

이 고천수가 천하대살성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침내 진천랑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크하하하하핫!”

고천수가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진천랑! 너는 천하를 조롱하고 만인을 공포에 떨게 하며, 무자비한 살인을 저질렀다! 이에 본 맹은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 나, 폭왕의 손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크하하하!”

협곡 내에 폭왕의 앙천광소가 쩌렁쩌렁 울린다.

푸스스스스……!

희뿌연 연기가 서서히 걷혀간다.

고천수의 두 눈이 기대로 부풀었다.

이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

매캐한 연기가 걷히면서 자신이 저지른 참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이걸로 진천랑은 최소 상반신이 날아가고 없으리……!

“……!”

고천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두 눈을 가득 채웠던 광기는 오히려 더 커졌다.

“진, 진천랑!”

고천수가 갈라진 목소리를 꽥 내질렀다.

눈앞에는 찢어진 시체만 남았어야 했다.

한데 진천랑은 그 자리에 고즈넉하게 서 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니, 얼굴에 핏방울이 좀 튀긴 했다.

한데…… 저 피는 누구……?

의문도 잠시.

“크헉! 끄으으으읍!”

뒤늦게 아찔한 고통이 뇌리를 들쑤신다.

이나마도 감각이 늦은 것은 광기에 취한 탓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고천수는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양팔을 바라보았다.

없다.

오른손도 없고, 왼손도 없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떨어져 나간 손을 찾아보았다.

저만치 서리가 내려앉은 폭렬갑이 보인다.

자신의 손이 그대로 끼워진 채로.

“어, 어째서……? 이게 어떻게 된?”

“어휴, 무모한 짓을 하니까 그렇죠.”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박자박 걸어왔다.

한데 그 모습조차 고천수에게는 진천랑이 하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리고 남궁천이 천진한 표정으로 내뱉는 말들 모두 과거 진천랑의 목소리로 들렸다.

“그렇게 무식하게 폭약을 펑펑 날려대니까 정신이 멀쩡할 수가 있겠나? 나도 귀가 멍멍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인데. 골이 흔들릴 때마다 멍청해지고 말걸?”

“이익……! 진천라아앙!”

고천수가 허리를 꺾으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쿠르르르릉……!

그 괴성에 협곡 일부가 흔들리더니 무너져 내린다.

남궁천이 이맛살을 구기고는 중얼거렸다.

“정신 차리세요, 아저씨. 난 아버지가 아니라고요.”

사실 내가 맞지만.

그러고 보면 참으로 묘하지 않나?

광기에 사로잡힌 자가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을 보고 있다니.

어쩌면 이 세상은 미쳐야만 진실이 보이는 것인가?

남궁천이 그런 잡생각을 하는 사이, 두 눈이 피처럼 붉어진 고천수가 비틀거리며 으르렁거렸다.

“내 손을 어찌 한 것이냐? 진천랑!”

“내가 어찌한 건 아니고, 아저씨 스스로 그런 거죠. 조금 전 빙공을 익힌 수하를 죽이셨죠? 그때 순간적으로 극한의 빙공이 폭사했어요. 그 바람에 폭렬갑이 차갑게 식었을 거예요. 그 상태에서 갑자기 폭기를 터뜨리면? 쾅.”

남궁천이 주먹 쥔 손을 활짝 펼치면서 말을 이었다.

“얼어붙은 물건에 갑자기 열기가 더해지면 깨지게 마련이죠.”

“이익……! 진천랑! 네가 날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애초에 아저씨를 이길 생각도 없었어요. 저는 방어를 했을 뿐.”

“닥쳐라! 너는 날 이길 수 없다! 나는 지지 않았다!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정의는 결코 불의에 지지 않는다!”

광기에 찬 고함을 내지른 고천수가 어느 순간 입을 꽉 다물었다.

“양손도 없는 상황에서 뭘…….”

말을 하려던 남궁천이 흠칫거리고는 고천수를 보았다.

단전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솟구쳐 오른다.

다음 순간 고천수가 남궁천을 보며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진천랑. 나는 너에게 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 폭왕을 무너뜨릴 수 없다. 오직 나 자신이 아닌 한.”

“이런 미친…… 소홍!”

남궁천이 경공을 펼쳐 물러나자 진소홍이 재빨리 남궁천의 손을 잡고 유성추를 쏘았다.

삐이잉!

그와 동시에,

꽈아아아아아아앙!

순간 고천수의 전신에 매인 철통에서 어마어마한 폭기가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구구구궁……!

하늘이 떨리고 땅이 무너져 내린다.

협곡이 메워진다.

쿠르르르릉!

진소홍은 연신 유성추를 쏘아내면서 마치 거미줄을 잡고 이동하듯 계속해서 날아올랐다.

어느 정도 허공으로 솟아올랐을 때는 떨어져 내리는 돌덩이를 박차면서 솟구쳤다.

파바바바밧!

그렇게 암벽 중턱에 튀어나온 부분까지 솟아오른 두 사람이 겨우 멈춰 서서 아래쪽을 보았다.

희뿌연 먼지가 온통 자욱하다.

진소홍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자폭을 한 모양이야.”

“그릇된 집착이 낳은 결과지. 이미 오래전부터 미쳐 있던 자야.”

“고 각주님을 본 적이 있어?”

“그냥 들은 이야기야.”

남궁천이 대충 얼버무렸다.

하나 남궁천은 그 오래전에 자신을 추격해 오던 고천수가 그때부터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맹주가 심어준 광기이리라.

“가자.”

“응. 이제 돌아가는 거야?”

“아니. 폭렬갑 찾아야지. 그냥 저렇게 묻혀 버리기엔 아까운 물건이니까.”

“아…….”

말을 마친 남궁천이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 * *

쿠구웅……!

아스라이 폭음이 들려왔다.

물론 공력이 심후한 자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득한 소리였다.

하나 목란산 기슭의 호화 객잔에서 머물고 있던 맹주 묵천악은 그 소리를 분명 들었다.

“이 정도면…… 결말이 지어졌겠군.”

“고 각주가…… 해냈을까요?”

총관이 빈 찻잔에 찻물을 따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글쎄. 해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애초에 고 각주에게는 큰 기대를 걸지 않으셨군요.”

“장기를 둘 때는 다양한 말을 이용해야 하는 법 아니겠나?”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말해보게.”

총관이 창밖의 먼발치를 바라보다 물었다.

“고 각주가 그만한 원한을 가진 이유가 뭘까요?”

“원래 고 각주는 감성적인 사내지. 그런 사내는 늘 발화점이 있게 마련이야. 그 발화점에 불똥만 떨어뜨려 주면 돼.”

“하면 그 불똥을 떨어뜨린다는 건…….”

“나는 가볍게 한마디만 해줬을 뿐일세.”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요?”

“고 각주가 화상을 입어 얼굴 절반이 타들어갔을 때, 그에게 이렇게 말했지.”

묵천악이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입을 열었다.

“진천랑이 결국 너에게도 네 아비의 길을 걷게 만들었구나.”

“아…….”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네.”

“무엇입니까?”

“하나는 패배감을 확실하게 심어줬다는 것이지.”

“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 패배감을 제 아비와 나눠 가지게 한 것이지. 그 순간, 고 각주의 패배는 혼자만의 패배가 아닌 것이야. 부자가 쌍으로 한 사람에게 당한 것 같은 심리적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네.”

“하면…… 고 각주가 남궁천에게 저렇게 집착하는 것도…….”

“자신이 느낀 그 연대 감정을 상대에게도 이입시키는 거지. 내가 아비와 운명을 같이했듯, 너도 네 아비와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는.”

“아……!”

총관이 탄성을 흘리면서 입을 딱 벌렸다.

그러다가 그가 흠칫거리고는 맹주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 한 가지.

“설마…… 그 오래전부터 맹주님은 남궁천을 의식하신 건지요?”

그럴 리가 없다.

당시 남궁천은 갓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때다.

먼 훗날을 생각해서 진천랑을 제거하고 그 아들에게까지 복수의 감정을 남겨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건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총관.”

“예.”

묵천악이 희미하게 웃었다.

달빛에 비친 그 얼굴은 어딘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일의 결실이라는 것은 사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일세. 나는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하여 그날 씨앗을 뿌려둔 것일세.”

“……!”

총관은 아직도 자신이 맹주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했다.

“뿌려둔 씨앗이 쓸 만한 독초였을지, 그저 잡초였을지 곧 결과가 나올 테지. 이왕이면 쓸 만한 독초였길 바랄 뿐.”

맹주가 서늘한 미소와 함께 찻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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