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누가 누굴 도와?
쿠르르르……!
협곡 일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희뿌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진소홍과 남궁천은 암벽에 매달린 채 숨을 죽이고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푸스스…….
다시 어디선가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소리.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돌아갔다.
하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초견파공안이 발동하자 희뿌연 먼지 속에서도 어렴풋한 빛이 시야에 들어온다.
푸른색 빛이다.
‘저건 아니야.’
고천수를 따라다니는 백발 사내의 기운이다.
그는 빙공을 익힌 자였다.
하면 고천수는 다른 곳에 있다.
폭기를 사용하는 고천수는 기본적으로 화계 속성이기에 붉은빛을 띤다.
‘쳇, 폭왕은 이게 문제라니까.’
고천수는 폭기를 사용할 때가 아니면 단전에서 공력을 일절 뽑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기를 사용하지 않는 기문둔갑술을 이용해 최대한 기척을 죽인다.
따지고 보면 폭약을 매설하는 행위부터 기문둔갑술의 일종이니 당연한 대응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커다란 덩치가 쥐새끼처럼 움직인다는 게 영 웃긴단 말이지.’
거기에 주변에 잔뜩 매설해 둔 폭약 때문에 지상에서는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확실히 귀찮은 녀석이야.’
사실 폭왕 정도 되는 자가 폭약을 매설하면서 흔적을 남기는 실수 따위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관 장치나 진법 같은 기문둔갑술은 남궁천과 절대적인 상극이었다.
물론 전생이었다면 이런 협곡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바짝 경계를 했을 테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새 삶에 너무 적응해 버렸어.’
아무튼 폭왕은 남궁천에게 확실히 귀찮은 존재다.
진소홍이 남궁천을 슬쩍 돌아보았다.
[이제 어쩌지?]
전음을 흘리자 남궁천이 실눈을 뜨고는 생각에 잠겼다.
섣불리 움직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아주 작은 움직임만 보여도 폭왕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거기냐!”
콰콰콰콰앙!
그저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 곳일 뿐인데도 폭왕이 무차별적으로 폭기를 날려대니 협곡이 그대로 매몰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이왕 이렇게 됐으니 교란책을 써보자고.]
[어떻게?]
[날파리처럼 귀찮게 해보자는 거지.]
[그다음에는?]
[저쪽을 이용해 봐야겠어.]
남궁천의 시선이 협곡 한쪽으로 향했다.
진소홍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그쪽에 뭐가 있는데?]
[머리 하얀 녀석.]
[아…… 그건 어떻게 안 거야?]
[보이니까.]
[보인다고?]
진소홍이 눈을 끔뻑이고는 남궁천의 시선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뿌옇게 퍼진 먼지 안개만 보일 뿐이었다.
남궁천이 설규 쪽을 보다가 전음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작전을 얘기해 줄게.]
한참 동안 대략적인 내용을 전해 들은 진소홍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너는 날 얼마나 믿지?]
[글쎄. 내가 모든 걸 걸고 너에게 투자한 만큼은 믿지. 이래 봬도 상인의 딸이라 사람 보는 눈은 있거든.]
[그렇다면 널 믿어.]
[왜?]
[네가 투자한 내가 널 믿고 있으니까.]
[……!]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진소홍이 이내 피식 웃었다.
[알았어!]
한편 먼지 안개에 갇힌 폭왕 고천수는 어깨까지 들먹이며 씨근거렸다.
어째서인지 남궁천을 상대하는데 과거의 아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만 같다.
지금껏 그가 매설한 폭약을 이렇게 잘 피한 인간은 진천랑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천랑이 떠오른다.
남궁천이 그 아들이기 때문일까?
마치 진천랑과 싸우고 있다는 기분마저 든다.
“연놈들! 어디냐?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면 살아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사자후가 터져나간다.
한데 단순한 사자후가 아니다.
그가 익힌 무공은 모든 공력을 폭발시키는 폭렬기공(爆裂氣功)이다. 사자후로 전달된 목소리는 당연히 폭기를 머금고 있다.
퍼퍼퍼퍼펑!
아니나 다를까, 협곡 중턱이 마구 터져 나간다.
메아리치는 목소리에 따라 여기저기 돌 부스러기가 마구 떨어진다.
그때였다.
쉬이이이익!
그림자가 고천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이놈들!”
고천수가 재빨리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폭렬갑에서 폭기가 터져 나갔지만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측면의 암벽이 터져 나가면서 파편이 마구 튀었다.
따다다다당!
어디선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 파편을 쳐내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 그건 남궁천이 아니다.
파편을 쳐낸 자가 소리친다.
“각주님. 조심 좀 해주세요. 이러다 제가 죽겠습니다.”
고천수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설규의 목소리.
“설규, 알아서 몸 사려라.”
고천수가 퉁명스레 대답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날파리 같은 새끼들이 감히 날 우롱해?’
생각할수록 진천랑과 닮은 수법이지 않은가?
그 오래전 자신의 얼굴 한쪽이 불에 탔을 때도 이것과 비슷했다.
진천랑은 어디서 그런 무기를 챙긴 것인지 사슬낫을 가져와서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며 이동했다.
그렇게 허공을 제멋대로 이동하면서 신경을 건드리더니, 어느 순간 자신이 매설해 둔 폭약을 찾아내 역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진천랑……!’
화상 입은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벌써 남궁천을 진천랑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지나친 몰입이 현실을 잊게 만든 것.
우습게도 그 바람에 지금의 남궁천이 그때의 진천랑이라는 것을 정확히 직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쉬이이잇!
다시 한번 기척이 등 뒤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고천수의 몸이 반사적으로 튕겨 날았다.
“뒈져랏!”
퍼퍼퍼퍼펑!
고천수의 전신에서 폭기가 연신 터져 나간다. 그만큼 고천수의 움직임은 빠르면서도 더욱 과격해졌다.
‘진천랑! 네놈을 내 오늘 반드시 죽인다!’
극도의 분노에 사로잡힌 고천수는 눈이 허옇게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는 무아지경 속에서 폭기를 마구 터뜨려 댔다.
쾅! 콰콰콰아앙!
폭렬갑은 공력을 증폭시켜 폭기로 변환하여 발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 기물은 오래전 고천수가 직접 만든 것인데, 대략 끌어 올린 공력의 열 배 정도의 힘을 폭발시킨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웬만큼 폭기를 남발해도 공력이 부족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쉬쉬쉬쉿!
콰콰콰쾅!
그림자가 스칠 때마다 폭기가 터지지만 간발의 차이로 잡히지가 않는다.
결국 무차별적인 공격을 멈춘 고천수가 고함을 터뜨렸다.
“설규!”
“갑니다!”
설규가 대답과 동시에 검을 뽑아들고는 한 차례 춤사위를 벌렸다.
누군가 보았더라면 이 긴박한 순간에 웬 춤이냐고 따졌으리라.
한데 단순한 춤사위가 아니었다.
휘이이이이잉!
현란한 검로 끝에 칼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주변의 먼지 안개를 깔끔하게 흩날려 버리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시야가 뻥 뚫리자, 고천수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어디냐? 애송이들!”
“각주님! 위를!”
설규의 목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고천수가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마침 하늘에서 떨어지듯 고천수를 덮쳐가던 진소홍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등 뒤에는 남궁천이 바짝 붙어 있었다.
고천수가 히죽 입매를 비트는 순간,
꽈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기가 폭렬갑에서 작렬했다.
“꺄악!”
진소홍의 비명이 솟구쳤다.
정확히 맞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폭렬갑을 내뻗을 때만 해도 진소홍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타격은 입었으리라는 것이다.
콰당!
협곡 한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크하하하! 진천랑! 계집 뒤에 숨어서 방패로 삼다니! 한심하구나!”
파앙!
폭기를 이용해 단숨에 날아간 고천수가 그대로 손을 뻗어 먼지 속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콰악!
“크읍!”
가느다란 목이 고천수의 커다란 손아귀에 붙들렸다.
“계집아, 그러게 진작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더냐?”
“헉, 헉……!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썩 꺼……!”
진소홍을 멀찍이 날려 버리려던 고천수가 일순 눈을 부릅떴다.
“진천랑은 어디에?”
“헉, 헉……! 글쎄요? 어디일까요?”
진소홍이 배시시 웃으며 고천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는 분명 남궁천의 장삼이 매달려 있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고천수의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진천랑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나도 궁금하네요. 어디에 있을지.”
진소홍이 탁한 목소리를 흘려내자, 고천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에라도 폭기를 발사해서 진소홍의 목을 터뜨려 버릴 기세였다.
‘남궁천! 뭐 해? 널 믿는 만큼 날 믿으라며! 난 여기까지란 말이야!’
진소홍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고천수가 거무죽죽하게 물든 얼굴로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클클클…… 나를 가지고 논 것인가? 진천랑! 네놈이 나를……!”
“각주님.”
문득 등 뒤에서 들리는 설규의 목소리.
“뭐냐?”
“죄송합니다.”
“뭔 말을……!”
고천수가 뒤를 휙 돌아보았을 때, 설규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으아아아아!”
설규의 비명이 마치 기합성처럼 들렸다.
그 바람에 이성을 잃은 고천수가 반사적으로 폭렬갑 낀 손을 내밀며 폭기를 터뜨렸다.
꽈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기에 휩쓸린 설규가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끄아아아악!”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고천수가 눈을 부릅떴지만 이미 늦어버린 상황.
푸스스스스……!
하얀 연기가 흩어지며 사라지자 이내 새카맣게 타버린 설규의 시체가 드러났다.
원래라면 형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인육 파편이 되었어야겠지만, 마지막 순간 극한의 빙공을 끌어 올리는 바람에 타버린 시체나마 남을 수 있었던 것.
마침 시체 뒤에서 남궁천이 히죽 웃으며 나타났다.
고천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네놈이 설규를 인질로 잡고……?”
“희한하게 이자의 위치는 잘 아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바로 이 녀석이 서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죠.”
“그럼 계속 날 스쳐 간 건…….”
“저 혼자였죠.”
어느새 멀찍이 떨어진 진소홍이 발갛게 부은 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고천수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핏발이 선 눈동자를 희번득였다.
“클클클. 멍청한 연놈들아. 그래서? 내 수하를 죽여서 날 열받게 하면 네놈들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더냐? 더 잔인하게 죽일 뿐이다. 차라리 쥐새끼처럼 꽁꽁 숨지 그랬느냐? 내 앞에 이렇게 나타난 순간 이미 너희들은 죽은 목숨인 거다!”
고천수가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진소홍과 남궁천에게 각각 겨누었다.
비록 수하를 잃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쾌감에 광기가 스며들 지경이다.
단전에서 치솟은 최대 공력이 모처럼 시원하게 내달리면서 양손으로 집중됐다.
그리고 폭렬갑을 통해서 폭기가 터지는 순간!
그는 여전히 자리를 피하지 못한 남궁천과 진소홍을 보았다.
당연하다.
공력이 질주한 그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젠 무조건 죽는다.
이 두 사람은 하늘이 도와도 살 수 없다.
“잘 가라, 진천랑!”
마침내 폭렬갑에서 폭기가 작렬했다.
꽈과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