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누가 누굴 도와?
‘징계를 받을 각오라니.’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고천수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고천수의 눈동자에는 이글거리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나참, 이해할 수가 없네.”
남궁천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고천수의 눈이 번뜩였다.
“어이, 뭐라고 했느냐? 진천랑의 새끼.”
남궁천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하자, 진소홍이 얼른 그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다.
“고 각주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뭘 말이냐? 나의 복수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보란 말이더냐? 지난 수십 년간 이미 새기고 새겼거늘.”
고천수가 비릿한 웃음마저 짓자 진소홍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수십 년이라는 건 역시 남궁천에게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죠?”
“그렇다. 저놈의 아비가 내 원수지. 하나 그 원수가 이미 뒈져 버렸으니, 저 아이를 통해 복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넌 더 이상 조잘거리지 말고 비켜라!”
“원수가 죽었으면 이미 다 끝난 것 아닌가요? 굳이 남궁천에게 이렇게까지…….”
“크크큭. 크하하하! 다 끝나? 무엇이 끝났단 말이냐?”
콰앙!
순간 고천수가 바닥을 내려치자 그가 착용한 폭렬갑에서 폭기가 터지면서 몸이 튕겨 날아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고천수가 지척에서 폭음 같은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쿠웅!
그 일련의 과정을 본 진소홍이 내심 마른침을 삼켰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특이하다는 것이다.
대개 무인이라면 경공을 펼쳐서 이동할 텐데, 고천수는 폭기를 응용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과시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습관에 가까워 보였다.
‘너무 가까워.’
진소홍이 내심 긴장을 다지며 유성추를 매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천수가 커다란 발을 옮겼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린다.
쿵. 쿵. 쿵…….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다다르자 진소홍은 절로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크, 크다…….’
사람이 아니라 곰 같다.
얼핏 보면 진소홍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덩치다.
고천수가 천천히 허리를 숙이더니 그 흉측한 얼굴을 진소홍에게 바짝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보아라. 어디가 끝이 난 것이냐? 이 얼굴이 네 눈에는 다 끝난 것으로 보이느냐?”
안 그래도 흉악한 몰골이 더욱 괴기스럽게 일그러진다. 희번득이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무,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 각주님께서…….”
“오냐! 말 잘했구나! 그래, 넌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한데 어째서 네가 나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단 말이냐? 다 끝났다고? 네년도 얼굴 절반이 타들어가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고천수가 소리치자 협곡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원망과 분노가 생각보다 깊고 커.’
진소홍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역시 너무 쉽게 생각했을지도.
맹주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 게 아니라면, 그래도 말로 잘 풀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데 고천수의 원망은 생각보다 깊었다.
오히려 맹주의 지시를 받은 자들보다 남궁천을 해치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해 보일 지경이 아닌가?
그렇다고 여기서 인정해 버리고 물러날 수도 없다.
진소홍이 심호흡을 하고는 대꾸했다.
“물론 각주님의 고통은 제가 전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겁니다. 더구나 남궁천이 한 일이 아니잖아요. 남궁천은 아버지를 직접 만나본 적도 없으니까요. 누군가 고 각주님의 부친에게 원한이 있다고 찾아온다면, 고 각주님도 황당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강호의 생리고, 그것이 강호인의 운명이지.”
고천수가 입매를 비틀며 내뱉는 말에 진소홍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정말이지 증오와 원망이 뿌리 깊게 박힌 인간이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살기 때문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다.
“계집, 알아들었으면 꺼져라.”
“그, 그럴 순 없어요.”
“저런 녀석 때문에 너도 같이 죽겠다는 것이냐?”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죠. 만약 제가 다친다면 각주님도 무사할 순 없을걸요.”
“뭐? 크하하하! 알고 있다. 네가 금왕의 딸이라는 것을.”
“그걸 아시면서도…….”
“아비의 재력을 등에 업고 이리 까부는 것이냐?”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야죠?”
“하지만 그건 내게 협박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남궁천을 찢어발길 테니까! 그걸 막는다면 네가 금왕이 아니라 맹주님의 딸이라고 해도 짓밟을 생각이다!”
촤아아아악!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고천수가 상의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순간 그의 상체를 두른 가죽띠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죽띠에는 수십 개의 철통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폭기가 터져 나오는 부분 같았다.
진소홍이 그 생경한 모습이 봉목을 부릅떴다.
‘몸 전체가 무기 같아.’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
어떻게든 설득을…….
“어휴, 밴댕이 소갈딱지도 아니고. 무슨 복수를 아들한테다 한담?”
문득 뒤에서 들린 목소리.
진소홍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동시에 고천수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아, 도대체 왜 지금 나서냐고!’
진소홍이 원망 어린 눈길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천수가 당장에라도 때려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어이, 진천랑 새끼. 방금 뭐라고 했느냐?”
“아저씨가 밴댕이 소갈딱지 같다고요.”
“뭐라?”
이제 진소홍의 표정은 거무죽죽하게 물들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녀의 암담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천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니, 생각을 좀 해보세요.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먼저 찾아가셨을 것 아니에요. 아버지가 각주님 죽이겠다고 먼저 찾아온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럼 결과도 본인 책임으로 봐야죠? 이건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정당하게 방어를 하다가 각주님께 상처를 남긴 것 아닌가요?”
“……!”
“그 당시 아버지가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그냥 얌전히 각주님 손에 죽었어야 하나요?”
“닥쳐라! 네 아비는 천하대살성이었다!”
“봤어요?”
“뭐?”
“아저씨가 직접 봤냐고요? 아버지가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다니는 걸 본 적은 있어요?”
“그걸 꼭 봐야만 아는 게……!”
“보지 않고 어떻게 알죠? 소문이 와전된 거라면요? 제가 알기로 아버지는 무림맹원만 죽이셨어요. 그것도 아버지를 추격하는 자들에 한해서만.”
“그것은 죄가 아니더냐!”
“죄가 될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먼저 죽이려고 한 건 무림맹이잖아요?”
“네 이놈! 지금 천하대살성을 두둔하는 것이더냐!”
“냉정하게 보자는 겁니다. 냉정하게!”
남궁천이 모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순간 협곡을 쩌렁쩌렁 메웠다.
진소홍도 남궁천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던지라 감히 나설 생각도 못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고천수를 노려보았다.
“아저씨 같으면 죄도 없는데, 천하가 악인이라고 욕하며 죽으란다고 죽을 수 있어요?”
“이익……!”
“게다가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자가 죽이겠다고 달려드는데, 가만히 손 놓고 죽을 겁니까?”
“시끄럽다! 뭐가 됐든 내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네 아비다! 그러니 나는 너를 죽여서라도 내 원한을 풀……!”
“그러니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거죠.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감히 복수할 꿈도 꾸지 못하다가, 이제 절 죽여서 복수하겠다니? 이건 밴댕이가 아니라 쫄보라고 불러야 하나?”
순간 협곡에 정적이 찾아왔다.
진소홍은 이제 영혼마저 털리는 느낌이었다.
‘끝났다…… 말로 끝낼 상황은 저 멀리 떠나가 버렸어.’
그녀의 예상대로 고천수는 전신이 터져 버릴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두 눈은 허옇게 뒤집혀서 인내력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소홍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각주님? 일단 저와 차근차근…….”
“……리겠어.”
“예?”
“죽여…… 버리겠어.”
“각주님?”
“죽여 버리겠다! 진천랑!”
순간 고천수가 바닥을 차자 뒷꿈치에서 폭음이 터졌다.
콰콰앙!
동시에 고천수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헉! 온몸이 폭탄 같잖아?’
아닌 게 아니라, 고천수는 전신에 두른 가죽띠와 철통 때문에 온몸이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기를 어찌 운용하느냐에 따라서 몸 곳곳에서 철통을 통해 폭기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단숨에 거리를 좁힌 고천수가 그대로 일장을 휘둘러 왔다.
위이이이잉!
고천수가 착용한 폭렬갑이 우는 소리를 내지르더니 이내 폭기를 터뜨렸다.
콰콰콰아앙!
고천수의 손바닥이 그대로 남궁천이 서 있던 자리를 때렸다.
구구구구구궁……!
그 진동 때문에 암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육중한 소리를 울렸다.
고천수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남궁천은 진소홍 곁에 서 있었다.
남궁천이 스스로 피한 것이 아니라, 진소홍이 유성추를 날려 남궁천을 끌어당긴 것이었다.
“계집, 날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파아앙!
이번에도 고천수의 등 뒤에서 폭기가 터지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날아왔다.
“헉!”
헛바람을 삼킨 진소홍이 얼른 유성추를 날려 보냈다.
삐이잉!
하지만 고천수가 뻗은 일장에 유성추가 추풍낙엽처럼 튕겨 나갔다.
콰아아앙!
휘리리릭!
“윽!”
고천수는 당황한 진소홍을 지나치면서 그대로 일장을 뻗었다.
“죽어라, 남궁천!”
꽈아아아앙!
이번엔 남궁천 눈앞에서 폭기가 터졌다.
하지만 고천수는 또 공격에 실패한 것을 깨달았다.
“감히……!”
고천수가 이를 빠득 갈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진소홍이 어느새 유성추를 고천수에게 날려 손목을 묶어버린 것이다. 완전히 뻗어내지 못한 팔 때문에 폭기가 중간에 터지면서 남궁천이 피할 시간을 벌어준 것.
“계집, 계속 방해하면 너부터 죽인다!”
타아앙!
이번에도 아랫배 쪽에서 폭기가 터지면서 고천수가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헉!”
화들짝 놀란 진소홍이 얼른 유성추를 거둬들이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당장 유성추를 쏘아내려고 해도, 저 무시무시한 폭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다.
비교적 무게가 가벼운 유성추는 폭기에 휩쓸리면 맥을 못춘다.
‘어쩌지?’
생각은 길었지만 찰나에 지나지 않는 상황.
마침내 지척까지 날아온 고천수가 이번엔 발을 휘둘러왔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퍼퍼퍼펑!
하체에 매달린 철통에서 연이어 폭기가 터지면서 다리가 무쇠처럼 날아들었다.
찰나지간 누군가 진소홍의 옆구리를 휙 끌어당기더니 빛살처럼 그 자리를 벗어났다.
콰앙!
다시 한번 폭음이 터지면서 진소홍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남궁천!”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남궁천이 자신을 끌어안다시피 들고는 달리고 있었다.
“유성추를 직접적인 공격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간접적으로 응용을 해봐.”
“간접적으로 응용을 하라고?”
“그래, 날 끌어당겼듯이.”
남궁천을 끌어당겼듯이?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린 진소홍이 남궁천을 끌어당겼을 때를 떠올리곤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아아……!”
“알았으면 지금이야!”
어느새 뒤를 바짝 쫓아온 고천수가 쌍장을 내질러오는 중이었다.
“남궁천, 꽉 잡아!”
진소홍이 얼른 소리치고는 손끝에서 유성추를 쏘아냈다.
삐이이잉!
매섭게 날아간 유성추가 암벽 중턱쯤에 박혔다.
동시에 진소홍이 기를 실으며 확 끌어당겼다.
휘리리리릭!
순간 두 사람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콰콰아아아앙!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또 한 번 요란한 폭음이 들렸다.
“이 쥐새끼 같은 연놈들!”
고천수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협곡에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