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02화 (301/508)

302. 누가 누굴 도와?

백발의 사내가 협곡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외모로 보면 아직 젊은 나이로 보였으나 머리카락은 서리라도 내려앉은 듯 온통 하얬다.

“예상대로 움직이는군요.”

백발의 사내가 조용히 말을 흘리자,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 곳이라곤 이 길밖에 없으니까.”

조각처럼 잘생긴 백발 사내와 달리 중년의 사내는 얼굴이 몹시 흉측했다. 얼굴 절반이 화상으로 얼룩진데다 덩치가 몹시 컸기에 흡사 괴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중년의 사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오늘 복수를 이루는구나.”

“오랜 세월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백발 사내의 말에 화상 입은 사내가 피식 웃었다.

“하나 이것은 완벽한 복수가 아니다. 나의 진정한 복수는 이미 그날 무너졌다.”

“진천랑이 죽던 날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다.”

중년 사내가 묵직한 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여전히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훗날 저승에서 진천랑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군.”

“……?”

“오늘 내가 하는 복수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마 그가 살아 있었다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을 겁니다.”

“그럴까?”

“제아무리 대살성이라도 제 자식은 아끼지 않겠습니까? 남궁선을 그리 아꼈다는 소문이 있는 만큼.”

“그럼 좋겠군. 놈이 제 자식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으면 좋겠군. 해서 저승에서조차도 저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좋겠구나. 아니면 혼령이 되어서 저 아이를 지키겠다고 발악이라도 했으면 좋겠구나!”

우우우우웅!

그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지자 양손에 착용하고 있던 시커먼 장갑이 ‘우웅’ 울리는 소리를 낸다.

그걸 본 백발 사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폭렬갑(爆裂匣)도 흥분한 모양입니다.”

백발 사내의 실없는 말에 중년 사내가 피식 웃었다. 얼굴 절반을 차지한 화상 자국 때문에 그 웃음마저 괴기스러웠다.

그의 정체는 바로 호법당의 천호각주(天護閣主) 고천수였다.

천호각주가 되기 전에는 살충대주로 강호에 위명을 떨친 자였다. 특히 폭약을 가장 잘 다루는 인물로 폭왕(爆王)이라는 별호로도 불렸다.

폭왕 고천수.

그가 살충대주였던 시절에는 진천랑을 수차례 궁지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오래전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흐음.”

고천수가 화상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장갑 낀 손으로 더듬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자신의 눈앞에서 터지던 폭약의 모습이.

더욱 울분이 차오르는 것은 그 폭약이 바로 자신이 매설해 두었던 것이라는 점이다.

그걸 진천랑이 이용해서 자신의 얼굴 절반을 태워 버린 것이다.

당시의 고통과 울분은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하다.

‘그날은 그렇게 죽는 줄 알았지.’

하나 기적적으로 살았다.

비록 얼굴 절반이 타들어가서 괴물보다도 추악한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죽진 않았다.

그때부터 날마다 복수의 칼을 갈았다.

폭렬갑을 다루다가 어깨가 탈골되거나 부서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죽하면 무림맹 전속 의원이 복수를 이루기 전에 제풀에 지쳐 죽을까봐 걱정이라고 했을까?

어쨌거나 길고 긴 세월 동안 복수의 칼을 갈았는데, 진천랑이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간 복수의 날만 벼르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삶의 목적을 상실해 버린 셈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천랑의 아들이 부활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 그 아들놈이라도 죽여 버리자.

그렇게 마음먹고 남궁천에 대해 알아보았다.

한데 너무 약했다.

이제 겨우 학관 호구에서 벗어나 꿈틀거리는 지렁이 수준이었다.

짓밟을 맛이 나지 않았다.

무연회 우승을 했을 때도 관심 밖이었다.

결국 애들 놀이터가 아니던가?

그런데 점점 명성을 쌓아가더니 이젠 제법 강호신룡다워졌다.

세간에서도 남궁천을 적랑단주의 유력 후보자로 손꼽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젠 밟아줄 만하지 않겠나?

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 가장 처참하게 떨어뜨리고 싶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

‘남궁천…… 너는 네 아비를 원망해야 할 것이다.’

화상으로 타들어간 얼굴을 쓰다듬는 고천수.

그의 안광이 새파랗게 빛났다.

“오래 기다렸지. 꽤나 오래. 이젠 숙원을 풀 때다. 가자, 설규.”

“예, 각주님.”

백발 사내 설규가 깍듯하게 대답했다.

* * *

“이만하면 괜찮지 않을까? 꽤 멀어진 것 같은데?”

남궁천의 말에 진소홍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최대한 멀리 갈수록 안전할 거야.”

“흐음. 그만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달리자.”

진소홍의 말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군말 없이 따랐다.

진소홍이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며칠 전 비량을 만나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비량은 팽수혁과 윤종승, 그리고 자신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남궁천이 이번 대회에서 너무 제멋대로 설치지 않도록 우리가 잘 감시해야 한다. 자칫 그 녀석이 너무 크게 사고치지 않도록. 그게 남궁천을 지키는 거다.”

어째서인지 견습생들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결국 남궁천을 지켜준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남궁천이 사고를 쳐서 곤란한 상황에 놓이지 않게 지켜준다’는 뜻.

비량도 생도간의 미묘한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인지 이번 작전에 백무극과 모용강은 부르지도 않았다.

종남파가 봉문하면서 운경은 본산으로 돌아간 상황.

그렇게 남은 견습생들과 불명회가 남궁천을 감시하기 위해 참가한 것인데…….

‘눈치를 챈 건 아니겠지?’

진소홍이 슬쩍 남궁천을 보았다.

다행히 아직은 별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협곡의 길이가 생각보다 길었다.

몇 해 전 지진이 일어나면서 생긴 협곡으로 알고 있는데, 마치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진소홍이 전방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츠츠츠츠츳!

그녀가 급하게 멈춰 서자 바로 뒤를 따라 달리던 남궁천이 겨우 부딪치지 않고 멈췄다.

“왜 그래?”

“뭔가 이상해.”

“응? 뭐가?”

남궁천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는 진소홍과 앞에 펼쳐진 길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진소홍이 갑자기 왜 길을 멈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남궁천이 다시 묻자, 진소홍이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유성추를 꺼내 들고 한쪽 끝을 빙빙 잡아 돌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남궁천도 심상찮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다음 순간,

삐잉!

유성추가 울음을 터뜨리며 협곡 한쪽으로 빛살처럼 날아갔다.

못 본 사이에 은잠사 길이를 늘인 것인지 유성추는 한참이나 날아갔다.

마침내 협곡 한쪽 벽에 닿았을 때,

퍼억!

암벽을 때린 유성추가 다시 빠른 속도로 돌아와 진소홍의 손에 잡혔다.

푸스스스!

암벽에서 돌가루가 부서져 내렸다.

“…….”

“이제 말해봐. 왜 갑자기…….”

남궁천이 다시 물으려는데,

콰아아아아앙!

느닷없이 암벽 한쪽이 폭발하면서 산산이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남궁천과 진소홍이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 주위로 부서진 암벽 파편과 먼지들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쿠쿠쿵! 쿠궁!

지축이 뒤흔들린다.

그렇게 날아드는 바윗덩이를 쳐내고 피하면서 어지럽게 보법을 밟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남궁천은 전생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가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인간이 아닌 장애물이었다.

기관이나 진법도 마찬가지.

하지만 진법은 제갈세가 녀석에게 훔쳐 배운 덕분에 어느 정도 파훼가 가능했다.

기관은 늘 그를 골 아프게 만드는 장애물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맹점이 있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자신을 기관에 가둬두는 것이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점이다.

기관 장치는 진법처럼 얼렁뚱땅 만들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수년에 걸쳐 대대적인 공사를 해야만 함정이라고 부를 만한 기관이 만들어진다.

그다음에는 유인책으로 먹잇감을 끌어들여야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을 피해서 도망만 다닌 자신을 유인할 방법이 무엇이겠나?

기껏해야 한쪽으로 몰아넣는 게 전부다.

하나 천라지망도 뚫고 달아나던 자신이다.

놈들이 모는 대로 몰릴 진천랑이 아니시란 말씀.

그러다 보니 기관 장치에 걸릴 일은 좀처럼 없었다.

다만…….

‘폭약만큼은 성가시단 말이지.’

남궁천의 눈빛이 침잠해졌다.

폭약은 기관 장치처럼 매설이 가능하다.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은 자신도 폭왕 고천수가 매설해 둔 폭약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녀석만 나서면 궁지에 몰리곤 했단 말이야.’

폭왕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꼼꼼했다.

정말이지 매설한 폭약이 감쪽같았다.

어디 그뿐인가?

폭약을 직접 제조하는 폭왕은 온갖 종류를 다 가지고 있었다.

밟으면 터지거나, 기를 불어넣으면 터지거나, 신체에 접촉하면 터지거나, 충격을 받으면 터지는 등

아무튼 폭왕이라는 별호가 과하지 않는 자였다.

‘제일 골치 아픈 건 초견파공안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렇다.

초견파공안은 어디까지나 단전에서 뽑아 올려지는 공력의 흐름을 볼 수 있다.

한데 폭약처럼 무생물의 기운은 전혀 감지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남궁천이 진소홍을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전생에도 중원을 싸돌아다니다가 폭약 따위가 매설되었을 때는 늘 남궁선이 찾아내곤 했던 것 같다.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헐.”

여자들은 어쩜 이리 대답도 똑같나? 아니, 남궁선과 진소홍이 똑같은 건가?

남궁천은 전생에 한 번 얘기했던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여자의 육감이라는 건가?”

“아마도?”

지금 반응도 비슷하다.

진소홍이 생글 웃으며 말했다.

“가끔 논리나 이성보다 이런 게 통할 때가 있는 법이지.”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아.”

전생에 남궁선도 그런 말을 했으니까.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모든 감각이 고도로 예민해졌을 때, 오감을 뛰어넘는 육감이 발현될 때가 있다.

오늘은 왠지 북쪽으로 가고 싶다거나, 물을 피하고 싶다거나 등등.

아무튼 진소홍이 하는 말은 지금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이다.

“덕분에 위기 모면했다.”

남궁천의 말에 진소홍이 싱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왕 내 덕을 봤으니, 마무리까지 내가 하면 안 될까?”

“좋을 대로.”

남궁천이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희뿌옇게 허공을 메웠던 먼지도 점점 흩어지더니 이내 그림자 둘이 나타났다.

남궁천과 진소홍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폭약이 터진 직후부터 그 둘의 존재는 감지하고 있었으니까.

남궁천이 그림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역시.”

그가 왔다.

전생에 자신을 항상 골 아프게 만들었던 자.

폭왕 고천수.

그가 먼지 안개를 뚫고 저벅저벅 걸어 나오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제법이군. 진천랑의 아들.”

“제가 피한 건 아니에요.”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자, 고천수의 눈길이 진소홍에게 향했다.

“자네는 빠져주게.”

“고 각주님! 어째서 남궁천을 위협하시는 거죠?”

진소홍은 진심으로 놀라서 물었다.

이제 와서 맹주가 남궁천을 노린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위협할 줄은 몰랐기에.

하나 고천수는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징계를 받을 각오는 되어 있다. 나는 내 복수를 위해 사사로이 이 대회를 이용한 셈이니까.”

진소홍이 눈살을 구겼다.

‘뭐야? 그럼 맹주와는 별개로 그냥 개인 복수 때문인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