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누가 누굴 도와?
저벅저벅.
남궁천은 천천히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저벅저벅저벅……!
한 걸음을 내디디면 수십 걸음이 따른다.
우뚝.
남궁천이 멈춰 서자 옆에 있던 손우곤과 흑선이 얼른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림자처럼 따르던 무인들이 일제히 우뚝 멈춰 섰다.
타다닷!
“엇?”
남궁천이 느닷없이 달리기 시작하자, 흑선과 손우곤이 깜짝 놀라서는 얼른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다시 그 뒤를 쫓는 수십 명의 무인들.
우르르르르르!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남궁천이 까마득한 암벽 사이로 난 좁은 협곡 앞에 멈췄다.
“아아, 이 징글징글한 것들! 도대체 언제까지 따라올 거냐!”
“헉, 헉, 헉……!”
“훅, 훅, 훅……!”
뒤이어 도착한 손우곤과 흑선이 무릎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 먼 길을 달려온 건 아니다. 다만 남궁천이 워낙 빨라서 놓치지 않기 위해 공력을 대량으로 쏟아부었다.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다.
“주, 주군을 지켜 드리기 위해서…… 헉, 헉, 헉……!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갈 겁니다!”
“그거 지금 욕이냐?”
“예?”
“내가 지옥을 왜 가?”
그렇게 쏘아붙이면서도 어쩌면 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남궁천이었다.
손우곤이 숨을 헐떡이며 대꾸했다.
“그만큼 저의 충정을 알아달란 뜻이지요. 헉, 헉……!”
“훅, 훅……! 주군이 지옥을 왜 갑니까? 훅, 훅, 훅……! 그나저나 그렇게 힘들어서야…… 지옥은 손 대주가 먼저 가는 것 아닙니까? 훅, 훅……!”
“헉, 헉…… 회주야말로 지금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소만.”
“무, 무슨 소리를! 훅, 훅……! 대주야말로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소만.”
“아닌데?”
“나도 아닌데?”
눈알을 부라리며 서로를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잔뜩 성이 나서 으르렁대는 사냥개들 같다.
“미치겠네.”
남궁천이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전생에 한 번쯤은.
세상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고 미쳐 날뛰고 있으니 얼마나 외로웠겠나?
그래서 누군가는 자신을 지키려고 미쳐 날뛰면 그 기분이 어떨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남궁선이 잠시 그랬던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이 그녀를 지키느라 별로 보호받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 기간이 길지도 않았고.
한데 막상 이렇게 과잉보호를 받게 되니 이게 또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무거운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기분이랄까?
어디 보자.
흑선이 끌고 온 불명회원이 대략 이십여 명이다. 거기에 손우곤이 끌고 온 창응대원이 열 명. 그리고 견습생도들과…….
“비량 교관님. 그만 나오시죠?”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아름드리나무 뒤에서 비량이 배시시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내 제자. 바로 들켰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제자를 지키고자 하는 게 바로 사부의 마음이니라.”
“됐거든요?”
“제자야, 네가 이 사부의 마음을 몰라주니…….”
“교관님은 교관님일 뿐, 제 사부님은 아니죠.”
“끄응.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난 널 제자로 생각한단다.”
“그건 교관님 생각이시고.”
남궁천이 냉정하게 말을 잘라 버리자, 비량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손우곤과 흑선이 거의 동시에 미간을 좁히더니 휙 돌아섰다.
“주군! 웬 놈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알아.”
“은신술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것도 알고.”
“위험하니 뒤에 계십시오!”
“괜찮…….”
“확실히 보통이 아닌 놈들이군!”
“손 대주, 내가 오른쪽을 맡겠소!”
“좋소, 내가 왼쪽을 맡도록 하겠소.”
손우곤과 흑선이 호들갑을 떨자, 다른 견습생들도 긴장해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초겨울 바람이 마른 숲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쏴아아아아.
침엽수가 바람결에 마구 흩날린다.
무인들이 저마다 기세를 날카롭게 다듬는데,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여기까지 왜 온 거냐? 그냥 나와라. 다 들켰다. 확실히 하급 살수라서 그런지 영 서툴단 말이야.”
“살수요?”
손우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아보자, 흑선이 이를 뿌득 갈았다.
“이 개 같은 것들이! 역시 살수를 불러들였……!”
“자자, 조용히 하고. 이 살수들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살수가 아니다. 같은 편이니까.”
“같은 편이라고요?”
손우곤과 흑선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비량은 조금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제자야, 살수가 같은 편이라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널 죽이라고 맹주가 고용한 게 아닌 것이냐?”
“예, 애초에 제가 살곡에서 데려온 녀석들이니까요.”
“살곡?”
비량과 견습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동안 손우곤과 흑선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경계를 풀었다.
“아…….”
다음 순간 숲이 잠깐 흔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안대를 착용한 사내와 흑의를 갖춰 입은 살수들이 거짓말처럼 스르르 나타났다.
애꾸 사내를 보고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피면구는 또 어디서 난 겁니까? 숙조부님.”
“허허. 역시 우리 소가주. 눈치가 대단하구나.”
껄껄 웃던 검은 안대의 사내가 순간 자기 얼굴 살을 잡아 뜯어내기 시작했다.
찌이이익!
아교가 달라붙은 것처럼 끈적한 살결을 잡아뜯자 인피면구 아래로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그걸 본 손우곤이 입을 딱 벌렸다.
“남궁표 어르신?”
“그래, 창응대주. 날세. 자네가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그야 독사 같은 맹주가 우리 소가주를 노리고 있으니 노파심에 오게 된 거지. 소가주,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자네는 본 가의 기둥이야. 밥은 잘 먹고 다니는가? 무한에서 지내는데 불편한 건 없고? 그 사이에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건 아니고?”
남궁표가 얼른 달려와 남궁천의 양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뜯어 살핀다. 그 모습이 마치 물가에 내놓았던 아이를 다시 찾은 것만 같다.
‘남궁천 공자를 그리 반대하시던 분이…….’
손우곤이 피식 웃으며 조금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천이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물러났다.
“숙조부님. 저는 괜찮아요. 다들 자꾸 이렇게 절 못살게 굴면 다 때려치울 겁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우리 소가주를 못살게 군단 말인가!”
남궁표가 노발대발해서 소리치자, 남궁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제일 심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표가 남궁천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뭐든 불편한 게 있으면 내게 말하시게! 자네는 본 가의 기둥……!”
“아, 그만! 정말 다들 이러시면 저 적랑단주고 뭐고 다 때려 칠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한다고요!”
“허어, 도대체 왜…….”
“아니, 이렇게 우르르 떼로 몰려다니면 오히려 눈에 더 띌 것 아닙니까? 아예 여기 남궁천이 있다고 소리치지 그러세요?”
“끄응. 그, 그것도 좀 그렇군.”
남궁표가 뒤통수를 긁적이는 사이, 문득 남궁천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오, 이렇게 하면 되겠군요.”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면 말해보게.”
“어차피 우리가 뭉쳐 다녀봐야 제 위치를 알려주는 꼴밖에 안 되잖아요?”
“그렇지.”
“그럼 결국 흩어져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본선 진출 증표를 찾아주세요. 어차피 여러분이 적랑단주가 되려고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오호! 과연! 그렇구나! 그것 좋은 생각이다!”
남궁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자가 있게 마련.
“하지만 저는 남겠습니다.”
“저도 남겠습니다.”
“나도 남겠다.”
“우리도 남을게.”
손우곤과 흑선 그리고 비량과 견습생들이 차례로 말했다.
이쯤 되자 남궁표도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들이 모두 남는다면 안심이 되는군. 그럼 나머지는 증표를 찾아보도록 하세. 소가주를 위해 반드시 증표를 찾아야 하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존명!”
다행히 남궁표가 데려온 살수들과 창응대원들이 순식간에 몸을 날려 사라졌다.
남궁천의 시선을 받은 흑선이 움찔거리고는 불명회원들을 보았다.
“뭣들 하느냐? 너희들도 어서 흩어져서 찾아라.”
“복명!”
불명회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더니 일제히 흩어져 날아올랐다.
그제야 남궁천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군.”
군중이 자신을 따라다니면 왠지 모르게 더 불안해지고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전생부터 이어진 고질병인가 보다.
“자, 그럼 여러분은 이제 최선을 다해서 막아주십시오.”
“응? 뭘?”
팽수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자, 어느새 검을 뽑아 든 비량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수혁이는 기감을 좀 더 갈고닦아야겠네.”
“예? 엇!”
어리둥절하던 팽수혁이 순간 미간을 구기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이젠 그도 느끼고 있었다.
상당수의 인원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아무래도 지금까지 남궁천을 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 무인 다수가 흩어지자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온다!”
순간 비량이 소리치자, 남쪽 하늘에서 새카만 새 떼가 보였다.
한데 새 떼가 아니다. 화살비다.
쏴아아아아아!
“칫!”
견습생들이 혀를 차고는 병장기를 꽉 움켜쥐었다.
비량이 진소홍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홍! 남궁천을 데리고 일단 여길 벗어나라.”
“예, 교관님!”
진소홍이 두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바닥을 찼다.
진소홍의 무기는 유성추.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거나 막기에 가장 상성이 좋지 않다.
때문에 이곳에 남느니 차라리 남궁천과 함께 몸을 빼내는 게 동료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가자!”
남궁천도 진소홍을 여기에 남겨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몸을 돌렸다.
‘뭐…… 비량 교관이 있으니 괜찮겠지.’
어디 가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시작점으로 가면 다른 사람들이 증표를 구해 올 테고.
그렇게 두 사람이 좁은 협곡 사이로 내달리는 순간,
쒸쒸쒸쒸에엑!
따다다다다당!
마침내 화살비가 쏟아지면서 철판에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상은 완전히 가시밭으로 변한다.
한여름철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화살비가 멈추자 비량과 견습생들 그리고 손우곤과 흑선이 눈을 매섭게 치뜨고는 숲을 노려보았다.
스스스스슷.
이윽고 숲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섯, 열, 열다…… 시벌, 더럽게 많네.”
팽수혁이 적의 머릿수를 세다 말고는 태도를 고쳐 쥐었다.
유현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모처럼 몸 좀 풀겠네요.”
“어이, 유현 도장. 너 지금 표정이 전혀 도사답지 않아.”
“그렇습니까? 전 화내는 게 아니라 웃고 있을 뿐인데요.”
“그게 문제라고! 그게! 왜 입꼬리가 귀에 걸리냐고! 왜!”
“인정.”
팽수혁과 윤종승이 연이어 말한다.
그러는 사이 적의 수장으로 보이는 대머리 사내가 목을 우두둑 꺾으며 걸어 나왔다.
“좋은 말 할 때 비켜라.”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손우곤이 앞으로 척 나서면서 묵직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대머리가 인상을 구겼다.
“신성한 선발전에서 조직을 이뤄 한 사람을 돕는 게 공정한 경쟁이라고 생각하는가?”
“신성한 선발전에서 조직을 이뤄 한 사람을 죽이려는 건 공정하고?”
“…….”
“알아들었으면 꺼지시든지. 아니면 덤비시고. 우리는 물러날 생각이 없으니까.”
“흐음. 후후후.”
대머리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손우곤이 이맛살을 구겼다.
“뭐가 웃기냐?”
“연기를 하려니 낯간지러워서.”
“……?”
“너희들은 우리가 남궁천을 놓쳤다고 생각하나?”
“뭔 소리를 하려는 거냐?”
“여기까지가 우리 역할이다. 우린 그저 몰아갈 뿐. 남궁천의 이동 경로에 그분이 계실 거다. 진짜 죽음을 내리실 분이. 아, 혹시라도 달려가서 도울 생각은 말도록. 정확히 말하자면 네놈들을 저지하는 것까지가 우리 역할이니까.”
차차차차앙!
대머리의 수하들이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손우곤이 문득 흑선과 비량을 돌아보았다.
“허허…….”
먼저 웃음을 흘린 것은 비량.
그 뒤를 이어 흑선과 손우곤도 툴툴 웃는다. 그러더니 이젠 견습생들도 쓴웃음을 짓는다.
‘웃어……?’
대머리가 눈살을 잔뜩 구기는데 팽수혁이 코웃음을 치더니 입을 열었다.
“뭐? 우리가 남궁천을 도와요?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요.”
“뭔…….”
“우리가 이렇게까지 남궁천을 따라 다니는 이유는 그 녀석이 혹시나 사고 칠까 봐 그러는 거라서 말이죠.”
“……?”
“신성한 선발전에서 시체가 난무하면 그것도 골치 아프잖아요. 그런데 남궁천 그 녀석은 너무 제멋대로라서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거든요. 실은 우리가 그걸 말리려고 따라다니는 거죠. 뭐, 명목상 호위 노릇을 한다는 것이긴 하지만. 사고 칠까 봐 감시하려고 그런다고 할 순 없으니까.”
“뭔 개소리를……!”
“개소린지 어떤지는 두고 보면 알 일. 거기 기다리고 있다는 그분이 걱정된다면 그냥 우릴 보내주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나을 텐데?”
순간 대머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들이 궁지에 몰리더니 떼로 미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