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또 다른 대회
“거기 똑바로 걷지 못햇!”
퍼억!
염라단원 하나가 무인의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쳤다. 그 바람에 어깨에 메고 있던 죽립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염라단원이 죽립을 들고 머리에 쓰면서 중얼거렸다.
“염병, 이런 걸 뒤집어쓰고 무한을 싸돌아다니면 무사할 줄 알았나?”
“신분을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죽립이 본 방의 상징이오.”
포승줄에 묶여서 끌려가는 무인이 대꾸하자, 염라단원이 다시 뒤통수를 후려쳤다.
따악!
“잘났다, 이 새끼들아. 너희들은 본 맹 뇌옥에 갇혀서 개밥 좀 처먹어야 정신 차리겠구나.”
“이익……!”
“어쭈? 눈 안 깔아?”
딱! 따악!
염라단원이 사정없이 뒤통수를 때리자,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염라단주 맹호성이 굵은 목소리로 외쳤다.
“적당히 해라. 애들 너무 갈구면 시끄러워지니까.”
“알겠습니다, 단주님.”
단원이 얼른 대답을 하고는 무인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며 이송을 시작했다.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서 끌려가는 무인들은 모두 죽현방도들.
남궁천을 죽이기 위해 호기롭게 나설 때와 달리 지금은 염라단의 사나운 기세에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맹호성이 객잔의 노상 탁자로 걸어가 비량에게 포권했다.
“무한의 치안을 지켜줘서 감사드리오.”
“별말씀을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비량이 해맑은 웃음을 짓자 맹호성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한데 저들을 어찌 알아보셨소?”
“한때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지요. 그땐 죽현방주가 무림공적이라는 것도 몰랐고요.”
“그렇구려. 비무 대회 때문에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데도 저런 놈들을 모조리 잡아내진 못하고 있는 실정이오.”
“무한은 넓으니까요. 이해합니다. 아, 그리고 혹시나 맹주님께는 보고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잖아도 행사 준비로 많이 예민하실 테니 괜히 신경 쓰지 않도록요.”
“나도 같은 생각이었소.”
맹호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마저 이었다.
“그럼 본 단은 이만 가보겠소.”
“살펴 가시길.”
맹호성이 죽현방주를 비롯한 방도들을 끌고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여 줄줄이 끌려가니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기도 했다.
비량이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마침 곁으로 누군가 다가와서 자리에 앉았다.
“역시 교관님께 부탁드리길 잘했군요.”
부드러운 목소리를 건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불명회주 흑선이었다.
비량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물었다.
“불명회라고 했죠?”
“그렇습니다. 주군께서 교관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고 하셔서 부탁을 드렸습니다. 과연 죽현방주 따위는 상대가 안 되는군요.”
“에이, 과찬이에요. 그나저나 불명회라. 언제부터 무림맹 정보를 그리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죠?”
“꽤 됐습니다. 다만 교관님에 대해서만큼은 오랫동안 알지 못했습니다. 최근에야 비선향의 존재를 알아내어 파고 있지요.”
“흐음. 염라단주에게 죽현방을 맡기는 건 괜찮을까요?”
“본 회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염라단주는 맹주의 사람이라고 하기엔 중립적입니다. 아마 맹주가 주군을 죽이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렇군.”
비량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흑선이 넌지시 물었다.
“혹, 기분 나쁘시진 않습니까?”
“뭐가요?”
“본 회의 존재를 이제 알게 되셨으니까요. 아무래도 무림맹원이셨으니.”
“하하. 저도 불명회와 별다를 바가 없는 입장이라 괜찮아요. 다만, 놀랍긴 하네요. 그 맹주의 눈을 속여가면서 지금까지도 잘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불명회죠.”
“그런 불명회를 집어삼켰다는 남궁천도 대단하고.”
“주군은…….”
흑선의 시선이 저만치 귀왕객잔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대단하신 분이죠.”
* * *
다음 날.
목란산 인근으로 수많은 강호인이 모였다.
모두 이번 적랑단주 선발전에 참가한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꽤 많군요.”
손우곤이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인 무인들의 면면을 살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무인들이 득실거리고 있으니, 얼굴 한 번 못 본 자들이 훨씬 많을 지경이었다.
남궁천이 손우곤을 보고는 물었다.
“그런데 손 대주는 왜 온 거야?”
“아…… 저도 참가하려고 합니다.”
“나랑 한 번 붙어보려고?”
“그럴 리가요!”
손우곤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현재까지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저 악랄한 맹주가 주군을 노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라도 주군 곁에 남아서 지켜 드리려고요.”
“다른 애들은 어쩌고?”
“부대주 무진이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지금쯤 흑선보를 정리하고 재정비하느라 여념이 없을 겁니다.”
“고생했네.”
“별말씀을요. 주군이 차려주신 밥상에 숟가락만 올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한 말이야.”
“아…… 예.”
손우곤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가다가 문득 저만치 단상 아래쪽의 중년인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패력궁(覇力弓) 천무류가 참가하는군요.”
“패력궁 천무류? 그게 누구지?”
“허얼. 패력궁 천무류를 모르십니까?”
“몰라.”
“…….”
손우곤이 멍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주인이다.
어떨 때는 도대체 이런 인간을 어떻게 알고 있나 싶을 정도로 강호인들에 대해 빠삭한데, 또 지금처럼 누구나 알 만한 패력궁을 모른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보지만 말고 설명을 해.”
“예? 아, 예. 패력궁 천무류는 무림맹 남문각주입니다.”
“남문각주라면 수맹당 소속이군. 그중에서도 제일 한직이잖아?”
“그렇죠.”
“대단한 사람 맞아?”
“정말 패력궁을 모르세요?”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라.”
남궁천이 나직이 으르렁거리자 손우곤이 얼른 태도를 고쳤다.
“예, 저는 좀체 이해가 안 돼서…….”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남궁천이 보일 듯 말 듯 피식 웃었다.
수맹당 남문각주라.
자신이 알 턱이 없다.
한마디로 무림맹 본단에서 남문을 지키는 각주라는 뜻인데, 어디까지나 수문을 담당하다 보니 강호 활동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는 한직이다.
게다가 수문각 중에서도 남문이 가장 안전하고 일거리가 없는 한직이 아니던가?
‘전생에 날 쫓아다니는 불나방들만 상대해도 시간이 모자랐는데, 그런 한직에 머물러 있는 무림 인사를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지.’
남궁천이 알고 있는 강호인은 딱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먼저 무림맹원으로서 무림공적 박멸을 위해 설쳐대는 인간들.
그다음으로는 남궁천 목에 걸린 현상금을 노리고 달려드는 흑도 새끼들.
한데 패력궁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남궁천에게는 관심 밖인 사람일 수밖에.
손우곤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백염이 성성한 노인의 등에는 커다란 활이 있었다.
손우곤이 패력궁을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패력궁의 진짜 실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맹주도 그를 함부로 대하진 못한다는 겁니다.”
“음. 가주님은 패력궁에 대해 아시나?”
“거기까지는 저도 잘…….”
손우곤이 말을 얼버무렸다.
하긴 그 얼음장 같은 영감과 말을 섞을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더구나 창응대는 한동안 해체된 상태였으니 남궁검과 손우곤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을 같이 여행을 보내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나만 당할 수는 없다’는 심보가 괜히 엉뚱한 곳에서 발현되는 남궁천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패력궁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어느 순간 패력궁의 매서운 눈초리가 남궁천에게 향했다.
“…….”
남궁천 역시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냈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른 사람들로 시야가 가로막히자 손우곤에게 물었다.
“패력궁이 맹주와 손을 잡을 가능성은?”
“제가 아는 한 어렵다고 봅니다.”
“그럼 순수하게 적랑단주 자리를 노린 건가?”
“그럴 겁니다. 원래는 요직을 제안해도 거부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갑자기 선발전에 참가한다라.”
“뭐, 요즘 강호 사정이 뒤숭숭하니까 나설 때가 됐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상 옆쪽을 보았다.
“저긴 누구야?”
“어디 말씀이신지?”
“단상 옆에서 검은색 피풍의를 몸에 두른 남자.”
“으음. 글쎄요. 저도 맹원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해서요.”
그러자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충의대주 양하진입니다.”
“흑선?”
“주군을 뵙습니다.”
뜻밖에도 흑선이 죽립을 푹 눌러 쓰고는 다가와 있는 게 아닌가?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지요.”
“아니, 내 몸은 내가 지킨다니까. 손 대주도 그렇고 다들 왜 이래?”
“지금 이 공터에 모인 놈들 중 몇 놈이나 주군에게 달려들지 모릅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요.”
흑선의 말에 손우곤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이보시오. 주군 곁에는 내가 있으니 괜찮소. 가서 조용히 조직 정비나 잘 하시오.”
“본 회는 걱정 마시길. 호신위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충의대주 양하진도 알아보지 못하고선 그리 큰소리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양하진은 맹주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분명 주군을 위협할 겁니다.”
“글쎄. 양하진이든 뭐든 내가 있는 한 주군께 칼끝도 스치게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그러기엔 사방이 적입니다만.”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남궁천이 한쪽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희들은 또 왜 온 거냐? 선발전에는 참가하지 않을 거라더니.”
“적랑단주에는 관심 없다. 단지 동료를 지키려는 의리로 참가했을 뿐.”
언제 온 것인지 팽수혁을 비롯한 견습생들이 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량도 함께였다.
“교관님도 참가합니까?”
“나 역시 제자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나참.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남궁천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구시렁거리자, 비량이 남궁천의 머리를 부스스 흩트리며 말했다.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거다.”
“흐음. 다들 설레발치다가 다치지나 마시길.”
남궁천이 무뚝뚝하게 내뱉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나쁘진 않다.
다만 이런 상황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 전생에는 오로지 홀로 싸웠으니까.’
그땐 그야말로 사방이 적이었다.
세상이 자신을 죽이려고 이를 가는 것만 같았다.
한데 지금은…….
팽수혁과 윤종승, 유현과 진소홍…….
’또 비량에 불명회, 그리고 손우곤까지.
이러다가 남궁천을 죽이려는 자들과 남궁천을 지키려는 자들의 싸움이 될 것만 같다.
하지만 그중에는 정말로 승부를 겨루기 위해 참가한 패력궁 같은 사람도 있을 터.
어쨌거나…….
‘나를 지키려는 사람들이라. 썩 나쁘진 않네.’
남궁천이 피식 웃는 사이에 마침 웅성임이 잦아들더니 저만치 단상 위로 맹주의 모습이 드러났다.
무인들의 웅성임이 잦아들자 묵천악이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모두 반갑소.”
공력이 실린 음성이 공터에 묵직하게 떨어져 내린다.
“예상 밖에도 지원자가 많아서 부득불 첫 시합은 이곳 목란산에서 치르게 됐소. 규칙은 간단하오. 목란산 곳곳에 숨겨진 본선 진출 증표를 찾아오면 되는 거요. 증표는 이렇게 생겼지만 색깔이 금색이오.”
무두의 시선이 맹주가 손에 든 증표로 향했다.
맹주의 시선이 군중을 훑다가 어느 순간 남궁천과 마주쳤다.
“…….”
“…….”
잠시 후 맹주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기간은 오늘 밤 자정까지. 본선 증표를 가져 오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소. 물론 본 맹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소. 그것이 강호 아니겠소? 물론 지금이라도 기권을 한다면 받아들일 것이오.”
한마디로 누군가 죽는 일이 발생해도 맹에서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잠시 뜸을 들인 맹주의 입에서 신호가 떨어졌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시오.”
파바바바밧!
공터에 모인 수많은 무인들이 일시에 목란산 숲속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