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또 다른 대회
“형님, 안 들어가고 뭐 하십니까?”
귀소이가 어깨너머로 기웃거리며 묻자, 귀왕이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쉿. 지금 공자께서 집중하고 계시잖아.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럼 그냥 문 닫고 나오시지 왜 몰래 엿보고 계십니까?”
“넌 궁금하지 않으냐?”
“뭐가요?”
“저 젊은 나이에 도대체 뭘 하면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건지.”
“으음. 궁금하죠.”
“그래, 나도 궁금하다. 그래서 지금 지켜보는 거다.”
“운기조식을 엿본다고 남궁세가 가문 절기라도 알 수 있겠어요?”
“끄응. 그건 아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는 거지.”
“형님도 참 열성이십니다요.”
“가만.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어디 저도 같이 봅시다.”
귀소이가 고개를 쑥 내밀고는 문틈으로 남궁천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과연 휘황찬란한 침실 복판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남궁천은 미동도 없이 눈을 꾹 내려감고 있었다.
다만 아까부터 뭔가 체내의 변화가 있는 것인지 장삼자락이 너풀거리고,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허공에서 넘실거렸다.
꿀꺽……!
그저 운기조식 과정을 지켜보는 것일 뿐인데도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진다.
“형님, 우리가 엿보는 거 들키면 혼나겠죠?”
“아직까지 말이 없으신 걸 보면 꽤나 집중하고 계신 거다. 뭐, 우린 어디까지나 엿보는 게 아니라, 다른 접근자가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경계를 지키는 것이지.”
“아, 그렇군요!”
귀소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뭘 그렇게 보는 건가?”
“히익!”
깜짝 놀란 귀왕이 얼른 돌아섰다가 창응대주 손우곤을 알아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주님 오셨습니까요?”
“그래. 자네들 주군 방 앞에서 뭘 하는 건가?”
“아…… 공자께서 운기조식을 하시기에 번을 서고 있었습니다요.”
귀왕이 대충 변명으로 둘러댔지만, 손우곤은 벌써 이 두 사람이 남궁천을 엿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흐음. 운기조식 중이라면 경계를 철저하게 서야겠군.”
“그렇지요.”
“나도 함께 번을 서겠네.”
“예? 아, 예.”
그렇게 이젠 세 사람이 문틈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고는 남궁천을 지켜보았다.
남궁천은 실제로 이 세 사람이 자신을 지켜보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아지경 속에서 운기 중이었다.
지금 그에게 내려진 숙제는 단 한 가지.
이따금씩 폭주할 듯 터져 나오는 마기를 완전히 다스리는 것.
만약 내일부터 있을 공식 대회까지 마기를 온전하게 다스리지 못하면 자칫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제왕은 무거운 자리다. 가벼이 움직이는 것은 제왕이 아니라 충직한 신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남궁검이 여정 도중, 남궁천에게 해준 말이었다.
남궁천은 그 말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이번에 흑선보를 흡수하기 위해서 직접 움직이지 않고 손우곤에게 맡긴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다.
‘제왕은 무거운 자리.’
남궁천이 그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었다.
지금까지 천마신기가 다스려지지 않은 것이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남궁천은 창벽공으로 천마신기를 찍어 누르려고만 했다.
그럴 때마다 천마신기는 오히려 더욱 미쳐 날뛰어서 곤욕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약 창벽신기가 제왕의 기운이라면 너무 가벼이 움직인 셈이겠지.’
하면 제왕의 충직한 신하는 무엇일까?
지금껏 제왕의 기운으로 알려졌던 천뢰기가 아닐까?
이미 남궁천은 천뢰제왕신공을 대성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 곧바로 천뢰기를 일으킬 수 있었다.
‘좋아, 한 번 해보는 거다.’
결심이 선 직후 남궁천은 단전에서부터 천마신기를 뽑아올렸다.
쏴아아아아!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천마신기가 혈맥을 따라 지맥까지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다.
미쳐 날뛴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애초에 천마신기는 절제와 통제를 거부하는 성격이 있다.
한마디로 동네 파락호가 따로 없다.
후우우웅!
아니나 다를까, 남궁천을 중심으로 시커먼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문밖에서 엿보던 세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어어? 저거 위험한 것 아니죠?”
“글쎄다. 어째 기운이 영 사악한 느낌이 든다만.”
그러자 손우곤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객잔에 손님은?”
“지금은 대낮이라 모두 나가고 없습니다요.”
“그나마 다행이군. 청소든 뭐든 핑계를 대고 주군이 운기조식을 끝낼 때까지 손님을 받지 말게.”
“알겠습니다요!”
귀소이가 얼른 대답과 동시에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을 에워싼 검은 소용돌이는 점점 커지면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웅!
카차차창!
이윽고 주변 장신구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헉, 저 비싼 걸……!”
귀왕이 반사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손우곤이 얼른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가만! 아무리 비싼 기물이라도 자네 목숨보다 귀한 게 아니라면 놔두게.”
“아…… 알겠습니다.”
귀왕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남궁천은 전신이 거무죽죽하게 물드는가 싶더니 온통 새카만 동공을 하고는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 모습이 언뜻 괴기스럽게 보여 귀왕이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헉! 저, 저거…… 괜찮은 것 맞죠?”
“주군께 무슨 말버릇인가?”
“아, 죄, 죄송합니다. 너무 걱정이 돼서 그만…….”
“주군을 믿어보세.”
손우곤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문틀을 콱 잡았다.
드드드드드드……!
검은 소용돌이는 이제 실내를 가득 채우고도 점점 커져서 벽과 천장을 통째로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남궁천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허공에 뜬 채로 정좌해서는 운기조식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실은 남궁천도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바깥 상황은 몰라도 체내의 흐름이 긴박하게 진행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었다.
‘끄음. 천마신공이 점점 폭주하는군!’
동네 파락호가 뭉치고 뭉치면 세력이 커지면서 거대한 반역군이 되는 법이다.
한 나라를 세운 유방이 그러지 않았던가?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할 수 있는 법.
‘천마신기를 그렇게 둘 순 없지! 지금부터는 천뢰기로 다스린다!’
마음을 굳힌 남궁천이 단전에서 천뢰기를 뽑아 올렸다.
우우우우우웅!
단전에서 천뢰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전신 지맥까지 퍼져 있던 천마신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구구구구구구궁!
곳곳에서 천뢰기와 천마신기가 충돌한다.
하나 천뢰기는 창벽공보다 훨씬 기민하게 움직인다.
확실히 창벽공에 비해 포용력은 적으나, 제압하는 힘은 강하다.
쏴아아아아아!
천뢰기가 노도처럼 밀려들자 뿔뿔이 흩어졌던 천마신기가 정수리에서 똘똘 뭉쳤다.
꽈아아앙!
정수리에서 폭음이 들린다.
“크윽!”
까딱하다간 피를 토하고 기절할 뻔했다.
다시 한번 천뢰기가 전력으로 부딪친다.
꽈아아아앙!
쏴아아아아!
천뢰기의 힘에 조각난 천마신기가 다시 밀려가면서 단전으로 흘러들어간다.
전신에 퍼진 천뢰기가 천마신기를 쫓아 단전을 에워쌌다.
천마신기가 단전에 뭉쳐서 최후의 발악을 한다.
천뢰기는 단전으로 들어가기 직전 세력을 키운다.
그리고 때가 됐을 때,
콰아아아아아!
천뢰기가 십만대군처럼 거침없이 단전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꽈아아아아앙!
실제로 남궁천의 몸에서 거친 기운이 폭사했다.
콰콰콰콰아아앙!
기풍이 터져 나가자 객잔 천장이 통째로 날아가고, 벽이 추풍낙엽처럼 뜯겨 날아간다.
“우아아악!”
“크헉! 엎드렷!”
도대체 남궁천의 몸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가?
손우곤과 귀왕이 기겁을 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덩치 큰 귀왕이 그대로 바람 따라 흩날릴 뻔하다가 천근추의 술법으로 겨우 몸을 지탱했다.
푸스스스……!
한차례 광풍이 휘몰아친 귀왕객잔 최상층.
벽과 천장은 온데간데없고 뿌연 먼지만 안개처럼 번졌다.
사방으로 파편들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내린다.
“주, 주군……?”
화들짝 일어난 손우곤이 먼지 안개를 보며 더듬거렸다.
마침 남궁천이 손을 휘휘 저으며 나타났다.
“어, 손 대주 왔어?”
“주군…… 괜찮은 겁니까?”
“응. 그런데…… 이건 내가 이런 건가?”
남궁천이 터져 나간 최상층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리자, 귀왕이 입을 딱 벌렸다.
“설, 설마…… 발뺌하시는 건 아니겠죠! 이건 진짜 어마어마한 수리비가 나간단 말입니닷!”
“귀왕. 우는 소리 하지 마. 결국 그것도 내 돈에서 나가는 거다.”
“아…… 예…….”
하지만 제 고생값은요?
특별 수당도 안 주면서! 일거리만 잔뜩 만들고! 진짜 한 대만 때려도 됩니까?
새삼 반항심이 치솟는 귀왕이었다.
* * *
“저긴 남궁천의 숙소였지? 벌써 시작한 놈이 있는 건가?”
어느 객잔의 노상 탁자에서 흑립을 깊이 눌러 쓴 사내가 저만치 귀왕객잔을 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죽립의 사내가 깍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보고된 바는 없으나 누군가 남궁천을 노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긴. 맹주가 이미 시작해도 좋다고 했으니까.”
“예, 맹주의 묵시적인 승인이 떨어진 이상 이만한 일이 일어나도 맹이 나서진 않을 테지요.”
“그렇겠지. 어제는 흑선보주가 죽었다지?”
“예, 창응대가 호위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당한 것 같습니다.”
“쯧쯧…… 흑선보주가 욕심이 앞섰어. 우리 죽현방(竹玄幇)은 실수 없이 끝내도록 한다. 마침 창응대도 상당수가 흑선보로 간 것 같으니 이럴 때를 노려야지.”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내일 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경쟁은 더 치열해질 터. 일단 저 상태라면 남궁천이 무사하길 빌어야겠군. 폭발이 심상치 않았어.”
“그럼 늦기 전에 서두르시죠. 방주님.”
“그래. 남궁천은 우리가 죽인다. 이미 죽었다면 시체라도 건진다.”
“복명.”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죽립 사내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인근 저잣거리 곳곳에서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저마다 등에 메거나 옆에 둔 죽립을 챙겨 쓰는 게 아닌가?
일제히 제복을 갖춰 입듯이 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가히 인상적이었다.
그들 모두 죽현방도들이었다.
그렇게 죽현방주를 비롯한 죽현방도들이 귀왕객잔을 향해 가려고 할 때였다.
“손님. 계산은 하고 가셔야죠.”
객잔에서 점소이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죽현방주 앞을 막는 게 아닌가?
곁에 있던 수하가 눈알을 부라렸다.
“이 얼빠진 새끼가 감히……!”
하나 죽현방주가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점소이를 보았다.
“이거 실례했군. 깜빡했네. 미안하네.”
“헤헤. 괜찮습니다요. 와아, 근데 다들 같은 소속이십니까요? 뭔가 굉장하네요.”
그러자 수하가 이번에도 으르렁거렸다.
“목숨이 아깝거든 관심 꺼라.”
“예, 예.”
“얼마냐?”
“석 냥만 주십쇼. 헤헤.”
분명 만두 한 접시치고는 과한 금액이었지만 죽현방주는 별말 없이 품에 손을 넣고 뒤적였다.
잠시 후.
파밧!
쒸이이잇!
죽현방주가 품에서 꺼낸 것은 돈이 아니라 비수였다.
눈 깜빡할 사이에 비수가 점소이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탁!
점소이가 손가락을 들어 비수를 막아낸 것이 아닌가?
순간 죽현방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떻게……?”
점소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야아, 이거 너무하네. 돈 달라니까 암기를 날려? 인성 문제 있어?”
“네놈 정체가…….”
“그건 알 것 없고. 얘들아, 손님이 무전취식을 하셨단다. 강호 예절을 가르쳐 드리자.”
“예, 교관님!”
순간 인근의 일꾼 몇이 겉옷을 벗어 던지자 가벼운 경장으로 변했다.
팽수혁을 비롯한 견습생들과 불명회원들이었다.
비량이 씨익 웃었다.
“남궁천은 우리가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