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98화 (297/508)

298. 또 다른 대회

갑자기 창응대가 나타나자 흑선보 무인들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새끼들, 어느 틈에 이렇게 몰려온 거지?”

“전부 다 뒈지려고 작정했나?”

다만 그들의 당황스러움은 어디까지나 예측을 하지 못했다는 부분에만 머물러 있는 듯했다.

오히려 흑선보주는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짓더니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여유만만한가 했더니, 이런 조무래기들을 믿고 있었던 거냐?”

“조무래기?”

“후후. 조무래기가 아니면 무엇이냐? 강호 밑바닥까지 추락한 남궁가가 최근에서야 겨우 재조직한 창응대가 아니던가? 오합지졸이어도 뭉치면 든든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지금 우리 애들 너무 무시하는데?”

“무시하지 못할 까닭이 있어야지. 자고로 조직이란 오랜 기간 함께 손발을 맞추면서 유기적인 움직임이 가능해야 하는 법. 과거 전성기의 창응대라면 조금 신경 쓰이겠지만, 지금의 창응대라면 결국 본 보의 발바닥이나 핥아야 할 거다.”

“더럽게 발바닥을 왜 핥아? 이 변태 영감탱아.”

“클클. 어린 녀석이 제법 주둥이가 여물었구나. 긴소리 할 것 없다. 그리 자신만만하다면 어디 한번 덤벼보아라. 본 보의 무서움을 알려주지.”

“……라고 하는데 어떠냐? 얘들아.”

그러자 손우곤이 전각 위에서 훌쩍 몸을 날려서 쿵 뛰어내리더니 입매를 히죽 치켜올렸다.

“바라던 바입니다. 그 무서움 어디 한번 보여주시오, 노인장.”

“노인장? 클클클!”

흑선보주가 입매를 길게 찢으며 게걸스럽게 웃어댔다.

한참 동안 웃던 흑선보주가 문득 웃음을 뚝 그치고는 새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얘들아. 이 오합지졸들에게 본 보의 무서움을 알려주어라.”

“복명!”

그러자 손우곤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차아앙!

“주군에게 부끄럽지 않은 창응대를 보여 드리자!”

“존명!”

차차차차앙!

순간 창응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면서 전각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남궁천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아름답다.

정말 아름다웠다.

매끄럽게 잘 빠진 검을 쥐고 뛰어내리는 창응대원들.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은 하나같이 명검이었다.

살곡에서 가져온 것이었는데 달빛을 받아 빛나는 검신이 눈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게다가 창응대원들 각각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적을 상대하니, 수십 개의 검신이 서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좋군, 좋아.”

남궁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손우곤이 어느새 곁으로 와서 말했다.

“주군이 안 계시는 동안 절치부심하며 창궁무애검진을 갈고닦았습니다.”

“훌륭해.”

남궁천이 모처럼 시원하게 칭찬을 던져 주었다.

때론 갈굼만 줄 게 아니라 이렇듯 칭찬도 해줘야 싹이 자라는 법 아니겠나?

실제로도 칭찬을 받을만 한 움직임이었다.

현재 창응대가 펼친 검진은 창궁무애검진이다.

창응대라면 당연히 펼쳐야 하는 검진.

한데 이 창궁무애검진은 드넓은 곳에서 펼쳐야 효과적이다.

그런데 지금 이 비좁은 골목길에서도 창응대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제대로 펼치고 있었다.

“제대로 배웠네.”

“다 주군 덕분입니다.”

손우곤이 겸양을 갖춰 말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일전에 남궁천이 광승회를 습격했을 때, 광승회주를 상대하면서 창궁무애검진을 펼치지 않았던가?

그것도 담벼락 위에서 오로지 직선의 움직임만 보여주면서 창궁무애검진의 묘리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것이 창응대원들에게는 큰 공부가 되었던 것.

이후로는 남궁천을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임무를 수행하느라 검진을 수련할 시간이 적었지만, 최근에는 남궁천이 없는 동안 검진 수련에 몰두한 것이다.

그 결과 지금 비좁은 골목길에서도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의 자리를 메워가며 효율적인 검진을 펼치고 있었다.

때문에 흑선보 무인들은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제자리에서 펄떡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하는 상황.

이런 뿌듯한 광경을 보자니 남궁천은 절로 흥이 돋았다.

“보람이 있구나. 보람이 있어.”

“보주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내가 하지. 그래도 적장에 대한 예의는 갖춰야지?”

“알겠습니다.”

“흑선보 무인들은 최대한 살려둬.”

“얻다 쓰시게요?”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잖아. 언젠간 요긴하게 쓸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손우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대주 차무진에게 수신호를 내렸다.

차무진이 검진을 통제하면서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캬아, 저 여유. 내가 가르쳤지만 참 잘 가르쳤어.”

남궁천은 자화자찬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옆에 선 손우곤이 창응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주군 걸어가신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샤샤샤샥!

검진을 펼치며 맹공을 퍼붓는 창응대원들이 교묘하게 보법을 밟으면서 길을 터주는 것이 아닌가?

마치 바닷물이 갈라지듯 남궁천이 내딛는 걸음마다 길이 생겨났다.

차차차창! 깡!

“크윽!”

“아악!”

“이런 개색……! 컥!”

퍽! 깡!

피가 튀고 금속성이 난무하고, 비명이 치솟는 전장.

하지만 아직까지 사상자가 없다.

확실히 창응대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중이었다.

직선과 직선이 겹치고, 거기에 다시 직선이 겹치니까 마치 곡선이 생기는 것 같다.

게다가 직선 끝에서는 검신이 곡선을 그리며 휘둘러지고, 다시 직선으로 몸이 빠져나간다.

창궁무애검진은 단순하다.

직선만으로 곡선을 만든다는 것이 창궁무애검진의 기본이다.

하나 원래 단순한 묘리가 깨닫기엔 더욱 어려운 법.

“고생했다.”

툭툭.

“여기까지 익히느라 애썼다.”

툭툭.

남궁천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창응대원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더 정진하겠습니다!”

창응대원들이 저마다 목청껏 대답한다.

그야말로 기이한 광경이 아닐 수가 없다.

피 튀기는 전장 복판을 느긋하게 걸어가는데 누구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아군의 등과 어깨를 다독여주는 여유까지 보인다.

어쩌다가 삐져나온 검신이 남궁천의 목을 노리다가도 손우곤의 검신에 튕겨 나간다.

스까앙!

“정신 차려라. 주군에게 튈 뻔했잖냐?”

“죄송합니다!”

검진을 펼친 채 격전을 벌이면서도 감사 인사와 사죄까지 할 건 다 한다.

그렇게 전장 복판에 다다르자,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 흑선보주가 보였다.

“남궁천…….”

흑선보주가 착 가라앉은 눈초리로 남궁천을 응시했다.

“유환객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운이라고 여겼건만.”

“그게 고수와 하수의 차이지. 고수는 매사 조심하지만, 하수는 매사 방심하지. 뭐, 낙천적인 성격이 사는 동안 편하긴 하지만.”

“오냐, 내 오늘 확실히 창응대가 무시할 수 없는 조직이라는 건 알았다. 하나, 너는 나를 무시하고 있구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무시할 것도 없지.”

“네놈이 나를 안다는 뜻이더냐?”

“아니까 영감이 흑선보주라는 것도 알았겠지.”

“그러고 보니 그렇군. 날 어찌 알아보았느냐?”

“거기까지 가려면 얘기가 복잡해지니까 넘어가자고.”

“이거 순 제멋대로군!”

“제멋대로 찾아와서 목을 노리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닌 듯.”

“흥! 그 잘난 주둥이 언제까지 터는지 보자!”

파밧!

순간 흑선보주가 바닥을 차며 남궁천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궁천은 지금 큰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창응대를 믿고 자신의 지척까지 접근했다는 거다.

확실히 창응대는 생각보다 훨씬 잘 싸웠다.

자칫하다간 이대로 남궁천의 목을 따기는커녕 흑선보의 정예를 모두 잃는 수모를 당할 수도 있었다.

한데 남궁천이 이렇게 ‘나 잡수시오’ 하고 나타나 주니 오히려 감사 인사가 나올 정도였다.

옆에 선 손우곤이 살짝 신경이 쓰였지만, 역시 거리를 절반이나 좁힐 때까지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얼어붙기라도 한 것이리라.

‘가소로운! 노부가 그리 우스워 보였더냐?’

그렇게 흑선보주가 곧장 칼을 사선으로 휘둘러갈 때였다.

번쩍!

철컥!

남궁천이 검집에서 벽라검을 뽑다가 말았다. 아니, 검신이 빛을 뿌린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흑선보주의 눈에는 그저 검신이 뽑히다가 도로 검집에 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

한데 맹렬히 달려가던 그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팔다리가 따로 노는 기분이다.

‘어어……?’

쿠당탕탕……!

바닥에 무참하게 쓰러진 흑선보주가 한참이나 미끄러져 갔다.

어디를 어떻게 당한 것인지도 모른 채 흑선보주가 눈만 크게 끔뻑였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 이렇게 허망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쓰러진 흑선보주의 시야에 남궁천의 발이 보였다.

이윽고 남궁천이 쪼그려 앉더니 흑선보주를 보며 물었다.

“먼 길 가는데 동료라도 붙여주면 좋겠는데…… 우리 애들이 내 말을 기가 막히게 잘 들어서요. 아직 다친 놈들은 있는데, 뒈진 놈들이 없네요.”

“너…… 어떻게…….”

“아…… 심장이 뚫렸을 겁니다.”

“그걸 네가 어찌…….”

흑선보주는 아까보다 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검술로 단 일격에 적의 심장에 구멍을 내버리는 기술.

심혈검기(心穴劍氣)는 흑선보주가 평생을 익히려고 한 절기였다.

물론 흑선보주는 전생에 남궁천과 만난 적이 있으며 한 번 검을 섞어봤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 상황이 그저 이해 안 될 수밖에.

그렇게 의문 가득한 얼굴로 흑선보주가 즉사하자, 손우곤이 소리쳤다.

“보주가 죽었다!”

그 한마디에 사투를 벌이던 흑선보 무인들이 흠칫거리더니 곧바로 전의를 상실하고는 병장기를 거두기 시작했다.

창응대원들 역시 사실상 투항한 것이나 다름없는 무인들을 더 몰아붙이진 않았다.

남궁천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주가 뭐라고, 사투를 벌이던 무인들이 저렇게 곧장 백기투항을 한단 말인가?

보주가 살아 있으면 싸우다 죽어도 상관없고, 보주가 죽으면 싸움도 무의미하단 건가?

보주를 위해 살고, 보주를 위해 죽는다니.

도대체 무인이란 무엇인가?

아니,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또 조직이란 무엇인가?

애초에 조직을 이룬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어느 순간 조직이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 모순.

‘아, 여기서 그만. 더 깊어지면 깨달음 이전에 주화입마가 올지도.’

남궁천이 생각을 멈추고는 소리쳤다.

“부보주 나와라.”

“…….”

“부보주 없냐?”

“없소.”

무인 하나가 대답하기에 남궁천이 그쪽을 돌아보고 물었다.

“너는?”

“흑무대주요.”

“흑무대면 흑선보 정예지?”

“그렇소.”

흑무대주가 잠깐 놀란 눈치를 짓다가 대꾸했다.

“부보주는 원래 없나?”

“그렇소.”

“그럼 네가 이인자야?”

“아니오. 총관이 있소.”

“총관은 본부에 있나?”

“그렇소.”

“본부에 병력이 얼마나 되지?”

“삼백 정도 있소.”

“너희들이 그 녀석들보다 얼마나 강하냐?”

“많이 강하오.”

하긴 그러니까 보주가 특별히 데리고 왔겠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선택권을 주지. 여기서 보주를 따라 장렬히 뒈질래? 아니면 지금부터 창응대주의 통솔하에 흑선보로 가서 총관을 죽이고 흑선보 이인자가 되어볼래?”

“……!”

“대답은?”

남궁천이 착 가라앉는 눈빛으로 흑무대주를 보았다.

“우리끼리 잠시 상의를 해도 되겠소?”

“빨리 끝내라.”

말이 떨어지자 흑무대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꼴을 보니 또 웃기긴 하다.

실컷 살벌하게 싸우다가 코피 훌쩍이면서 회의라니.

남궁천이 아는 한 흑선보 녀석들도 대개의 흑도 무리들처럼 충성심이 높진 않았다.

원래 흑도 조직이 그렇다.

대체로 문파 역사가 짧고, 오로지 힘에 굴하는 특성이 강하다 보니, 자고 일어나면 주인이 바뀌게 마련.

마침 대화를 마친 흑무대주가 다가왔다.

“따르겠다고 하면 우린 남궁세가 산하가 되는 거요?”

이것 봐라?

남궁가라고 부르지 않고 남궁세가라고 부르네.

오히려 남궁세가 밑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눈빛이지 않나?

하긴. 흑도인으로 멸시를 받았을 테니, 이 기회에 신분 세탁을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원한다면.”

“하겠습니다. 흑선보를 남궁세가에 바치겠습니다!”

흑무대주가 포권까지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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