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또 다른 대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날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덤벼. 안 그러면 크게 다칠 테니까.”
귀왕객잔 후원에 때아닌 긴장감이 맴돌았다.
윤종승과 유현, 그리고 팽수혁과 진소홍이 저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병장기를 그러쥐었다.
네 사람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남궁천을 에워싼 채 천천히 옆걸음을 옮겼다.
“쳇,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말이지.”
팽수혁이 중얼거리자, 유현이 빙그레 웃었다.
“제가 제일 먼저 도착했습니다만.”
“비무를 꼭 선착순으로 한다는 법은 없잖아?”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된 거지요.”
“유현, 너는 말이 없을 때가 좋았어.”
“…….”
애초에 남궁천을 제일 먼저 찾아와 비무를 청한 사람은 유현이었다.
그는 어제 남궁천을 보자마자 검을 섞어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진주언가에서 보았던 남궁천도 이미 대단했는데, 어제 본 모습은 그보다 더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기에.
애초에 이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같은 인간으로서 한계라는 것을 직접 겪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남궁천이 비무를 받아들여 후원으로 나왔을 때 팽수혁이 도착했다.
다짜고짜 한판 붙자며 소리치는 팽수혁을 보며 유현은 쓴웃음을 삼켰다.
결국 두 사람이 함께 남궁천을 상대하기로 했는데, 그새 윤종승과 진소홍이 찾아온 것이다.
결국 네 사람 모두 남궁천과 손을 섞고 싶다는 열망에 새벽같이 서두른 것.
남궁천이 그런 네 사람을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하여튼 강호인들은 죄다 불나방이라니까. 너희들도 얻어터질 걸 알면서도 달려온 거잖아?”
“남궁 소협, 같은 말이라도 배움을 위해서 달려왔다고 해주면 좋겠습니다.”
“유현, 넌 역시 말이 없을 때가 좋았어.”
“…….”
진소홍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건 무인으로서 당연한 생리 아닐까? 함께 어울려 놀던 동료가 날이 다르게 강해지는 걸 보고 있으면 몸이 절로 근질거릴 수밖에 없잖아.”
“흐음. 그 향상심은 칭찬하지.”
그러자 이번엔 윤종승이 검을 고쳐 쥐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넷을 동시에 상대하겠다니. 너무 얕보는 거 아냐?”
“종승아, 너는 날 피해서 잘 다니더니, 오늘은 제 발로 찾아왔네? 각오는 했겠지?”
“어어…… 왜 나한테만 그러냐?”
“잊었냐? 나는 한 놈만 패.”
순간 윤종승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그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슬그머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얘들아, 음…… 선공은 양보할게.”
찰나, 팽수혁이 바닥을 차며 무섭게 치달렸다.
“받아라, 남궁처어언!”
그야말로 광풍을 몰고 달리는 것만 같다.
파바바바밧!
후우우웅!
태도가 남궁천의 정수리를 쪼갤 듯 떨어져 내렸다.
순간 남궁천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틀렸잖아. 받아라가 아니라 죽어라, 하고 덤비라니까!”
파바바바밧!
일순 남궁천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돌면서 솟구쳐 올랐다.
쩌까앙!
청명한 금속성에 이어 팽수혁이 튕겨 나갔다.
그 틈을 타서 진소홍이 재빨리 유성추를 날렸다.
삐이잉!
허공을 가르며 묵직한 정이 날아든다.
하나 그보다 빨리 남궁천이 몸을 뒤집더니 얼른 추를 낚아채고는 왼쪽 방향으로 던졌다.
“흐익!”
윤종승이 헛바람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따앙!
어느새 나타난 것인지 유현이 정을 쳐내고는 그대로 남궁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리리릭!
매화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남궁천의 심장부를 파고든다.
“아……!”
윤종승이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확실히 화산의 검은 아름답다.
순간 귀왕객잔 후원이 매화 향으로 가득 차는 것만 같다.
‘그사이에 유현 도장도 꽤나 강해졌구나.’
이렇게 세상은 움직이고 있다.
쉼 없이.
자신이 잠깐 잠을 자는 사이에도 세상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럼에도 그 모든 움직임을 초월한 녀석도 있다.
“제법이지만 아직 멀었다.”
냉담하게 말을 뱉어내고는 섬뜩한 기세로 검을 뿌려대는 남궁천!
까라라라랑!
연이은 금속성에 이어 빈틈으로 발을 내지른다.
퍼억!
“커윽!”
단말마 비명을 터뜨리며 날아가는 유현.
그 뒤를 이어 달려들던 팽수혁은 남궁천의 주먹을 맞으면서 코피가 터졌다.
퍽!
“윽!”
마지막으로 다시 날아드는 유성추를 낚아챈 남궁천이 휙 잡아당기자 진소홍이 속절없이 끌려왔다.
“꺄앗!”
휘리리릭!
팽이처럼 회전하며 끌려온 진소홍은 제가 던진 유성추에 온몸이 꽁꽁 묶인 상황.
정말이지 이 모든 일이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졌다.
윤종승이 입을 딱 벌린 채 돌처럼 굳었다.
‘도대체…… 이 자식은 언제 이런 괴물이 된 거야? 아니, 원래도 괴물이긴 했지만…….’
남궁천이 윤종승을 돌아보고는 씩 웃는다.
‘아냐, 그런 표정 짓지 마.’
꿀꺽!
윤종승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남궁천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다.
‘오, 오지 마.’
연신 뒤로 물러나던 윤종승의 등이 객잔 벽에 툭 부딪쳤다.
마침내 윤종승 바로 앞까지 다다른 남궁천이 더욱 입매를 길게 찢었다.
“말했지? 나는 한 놈만 팬다고. 그동안 잘도 날 피해 다녔더라?”
“하하…… 오, 오해야. 내가 널 왜 피하겠어? 우린 절친인데. 안 그래?”
“우리가 절친이었구나. 그렇구나.”
“그, 그러엄! 우린 동향 친구잖아!”
“그렇지. 우린 절친이니까 특별대우를 해주마.”
“그런 대우는 필요 없…… 으아아악!”
윤종승의 처절한 비명이 객잔 후원에서 솟구쳤다.
* * *
남궁천은 종일 바빴다.
오전에는 비무를 하자며 찾아온 견습생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내려주었고, 점심에는 불명회에 들러서 무림맹 상황을 대충 살폈다.
“맹주의 은밀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불명회주 흑선의 말에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맹주는 원래 항상 은밀하다.”
“그렇군요. 한데 이번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왜? 정사 막론하고 날 죽이려고 사람들을 불러들었나?”
흑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본 회도 어렵게 포착한 정보였는데.”
“내가 그 늙은 구렁이와 싸운 세월이 얼만데. 그 구렁이가 하는 짓이 뻔하지.”
남궁천이 술잔을 들이켜고는 말하자, 흑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군께서는 몇 살 때부터 맹주와 싸우신 건지…….”
“글쎄. 까마득한 옛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아무튼 십대 시절부터라는 건 확실하지.”
“지금도 십대…….”
흑선이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왠지 계속 말을 이어가 봐야 자신에게 득이 될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맹주가 얼마나 모았어?”
“대략 서른 명이 좀 넘는 것 같습니다.”
“호오, 그놈들이 오로지 날 죽이겠다고 날을 벼르고 있단 거지?”
“예, 이래서야 비무 대회 이면에 또 다른 대회가 있는 꼴입니다.”
“천하가 날 죽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서른 명 남짓이 날 죽이겠다고 설치는 것쯤이야.”
이쯤 되자 흑선은 남궁천의 허언증이 병처럼 자리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 그는 이번에도 군말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서른 명 중에는 조직을 이끄는 자들도 있습니다. 가령 흑산보주(黑山堡主)라든지…….”
“상관없어.”
“하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간단하잖아. 맹주를 죽여야지.”
“그렇군요. 맹주를 죽이면 간단한…… 예? 뭐라고요?”
흑선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문하자,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놀랄 건 아니고. 뭐, 시간을 좀 두고 천천히 접근할 계획이야. 우선은 최측근이 되려면 적랑단주부터 되어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주군을 죽이려는 시도가…….”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
“알겠습니다.”
흑선이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않자, 남궁천이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살곡에서 의뢰 수락에 관한 문제로 연락이 올 거다.”
“살곡에서요?”
“그래, 귀왕객잔을 통해서 의뢰서가 들어올 거야.”
“어떻게 처리할까요?”
“보고서 보고 죽여도 마땅한 놈이면 죽여라.”
“그게 아니면요?”
“그럼 의뢰를 받지 말아야지. 살인 청부도 가려서 받는 살곡. 강호가 한결 깨끗해지고 나처럼 억울한 인간 없도록 만드는 데 일조하는 살곡. 그게 내가 원하는 살곡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살곡은 또 언제 접수하신 건지……?”
“며칠 전에.”
“예…….”
“앞으로 관리해야 할 곳이 더 늘어날 수도 있어. 가령 흑산보라든지…….”
“그렇군요.”
누군가 들었다면 기겁을 하거나 허언증이라고 여겼을 테지만, 흑선은 어디까지나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군의 허언증과 진심은 묘하게 구분되는구나.’
물론 남궁천의 입장에서는 내뱉는 모든 말이 진심이었으나, 전생까지 알 리가 없는 흑선은 어쩔 수 없이 허언증을 가려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앞으로도 수고해라. 오랜만에 왔는데 줄 건 없고…….”
품을 뒤적이던 남궁천이 단도를 꺼내 던졌다.
얼른 단도를 낚아챈 흑선이 고개를 들어보자, 남궁천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오다 주웠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가지라고 준 거니까 당연히 되지.”
흑선이 도집에서 단도를 뽑아내자 새파란 도광이 빛을 발했다.
위이이잉.
그저 도집에서 꺼냈을 뿐인데도 도신이 공명하면서 섬뜩한 예기를 줄기줄기 뿌려댔다.
특이한 점은 도신이 뿌려대는 기운이 어딘지 이질적이라는 점이었다.
‘설마 이건…… 마기?’
하면 이건 마병이 아닌가?
보통 병장기가 기운을 품을 수는 없지만, 신병이기의 경우에는 가끔 특별한 기운을 희미하게나마 내뿜는 경우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철컥!
얼른 도를 도집에 갈무리한 흑선이 남궁천을 보았다.
“마병이군요.”
“그래. 다룰 수 있겠나?”
“해보겠습니다.”
“그래, 다룰 수 있어야 할 거야. 자신 없으면 다시 돌려주고. 만약 다루다가 미쳐 날뛰기라도 하면 내 손에 뒈진다.”
“반드시 다루겠습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그래, 강호에 몸담은 사나이라면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지.”
“그럼 살펴 가십시오!”
“아직 간단 말도 안 했는데? 축객령이냐?”
“아…….”
“농담이야. 간다.”
남궁천이 실없이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 * *
오랜만에 무한의 저잣거리를 한 바퀴 돌면서 분위기를 살핀 남궁천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기루가 즐비한 거리를 지나고, 주루를 지나 조금 한적한 곳으로 접어든 남궁천은 전각 사이로 떠오른 달을 보았다.
“달이 참 밝다. 공동묘지가 어울리는 밤이구만.”
“클클클. 달이 어디 공동묘지에만 뜬다던가?”
문득 골목 귀퉁이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신호로 골목 양쪽에서 시커먼 인영들이 빼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천이 노인을 보며 물었다.
“흑산보주. 오랜만이야.”
“애송이, 나를 아느냐?”
흑산보주가 미간을 슬쩍 구겼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알지. 내가 모르는 놈은 강호에서 뒈져도 모를 놈밖에 없으니까.”
“뭔 개소리냐? 애송아.”
“사람이 하는 말을 개소리로 들으니까 못 알아 처먹지.”
“뭣이?”
“시끄럽고. 얘들아, 정리하자.”
“무슨 정리를…….”
그 순간 사방의 전각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빼곡하게 나타났다.
“창응대! 주군의 부름에 답합니다!”
창응대주 손우곤이 우렁차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