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또 다른 대회
어둑한 집무실에 전신을 붕대로 친친 감은 최팔이 다리를 절뚝이며 들어섰다.
호롱불 앞에서 서책을 읽던 모용신이 예의 그 싸늘한 눈길을 들어 최팔을 응시했다.
최팔은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떨리는 음성을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단주님!”
“많이 다쳤군.”
“괜찮습니다. 금방 나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아직도 낫지 않았다는 뜻인가?”
“……!”
“좀 더 쉬지 그러나?”
“아닙니다! 당장 어떠한 임무든 맡겨주시면 해낼 수 있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장담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일세.”
“하지만……!”
“말만 앞서는 인간은 딱 질색이야.”
“죄, 죄송합니다!”
“가서 누워 있게.”
최팔은 안절부절못했다.
모용신의 저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용신의 저 얼음장 같은 얼굴만 보면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망설이던 최팔이 어정쩡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속히 회복하고 다시 찾아 뵙겠…….”
“그럴 필요 없다. 이왕 쉬는 김에 푹 쉬어.”
“……!”
그제야 모용신의 속뜻을 알아챈 최팔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아닙니다. 역시 다 나았습니다.”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뱀처럼 차가운 눈빛이 최팔의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가장 심각한 부상은 몸에 난 상처가 아니다. 정신에 난 구멍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나약한 정신이야말로 재기 불능의 상처지.”
“옳은 말씀입니다.”
“어쨌거나 부단주는 실망스럽군.”
“그, 그건…….”
“변명해라.”
잠깐 망설이던 최팔이 곧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씨근거렸다.
“졸지에 기습을 당해서 제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당한 것입니다! 만약 정당한 비무였다면 제가 그깟 애송이에게 당할 리가 없습니다! 그 비열한 놈이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무방비 상태에서 절 무작정…….”
“그만. 듣자니 내가 다 부끄럽군.”
“죄…… 죄송합니다.”
“자네의 변명 속에는 상대에 대한 비난만 담겼을 뿐, 스스로에 대한 존중도, 실패의 부끄러움도 없다. 그런 인간은 또 같은 실수를 하게 되지. 그땐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 되는 거고.”
“명심하겠습니다.”
“아니, 자네는 여전히 명심하지 못했다. 자네 실력은 잘 알았네.”
“단주님!”
“일 대주를 부단주로 올리겠네.”
“그런……!”
“그리고 이번 일에서는 빠지게.”
“그럼…… 일 대주가 비무 대회에 참가하는 겁니까?”
“아니. 비무 대회에는 내가 직접 참가한다.”
“예? 단주님이요?”
최팔이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청랑단주 모용신은 희대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당예설과 마찬가지로 가문을 빛낸 위인들이지만, 세간의 평가에서는 모용신을 한 수 위로 쳐준다.
한마디로 무림맹 내의 젊은 고수 중에서는 최고라는 소리다.
그런 모용신이 비무 대회에 참가한다니 결과는 뻔하지 않겠나?
이미 무연회 우승자 출신인 데다 그 후로 크고 작은 비무 대회에서 우승을 휩쓴 모용신이다.
거기에 실전 경험도 풍부하다.
감히 누가 모용신을 상대할까?
“단주님이 출전하신다면…… 우승은 확정이나 마찬가지군요.”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하나 모용신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강호에 확신이라는 것은 없다. 항상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는 것. 자네는 끝까지 날 실망시키는군. 자네를 삼 대주로 강등하겠네.”
“단, 단주님!”
“사 대주로 강등하겠네.”
“……!”
“알아들었으면 그만 가봐.”
“명…… 받들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중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야 조금 성숙했군. 더 노력하게.”
“예, 단주님.”
최팔이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가 집무실을 나가고 나자, 모용신이 서책을 덮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있는가?”
모용신의 부름에 시종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예, 단주님.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맹주님을 뵙고 오겠다. 방문자가 있다면 잠시 기다리게 해라.”
“알겠습니다요.”
시종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나갔다.
해가 저문 바깥 날씨는 이제 제법 싸늘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차다.
입김도 슬금슬금 새어 나오는 날씨.
‘칼부림하기엔 딱 좋은 날씨군.’
그렇게 맹주전으로 들어가자 총관이 재빨리 맹주실로 달려가서 보고했다.
“맹주님, 청랑단주가 찾아왔습니다.”
맹주의 목소리가 들리자 총관이 곧 손짓으로 안내했다.
“들어가게. 그러잖아도 맹주께서 자네를 부르려고 하던 참일세.”
“저를 말입니까? 무슨 이유로?”
“만나 뵙고 나면 알게 될 걸세.”
“그러지요.”
무뚝뚝하게 대꾸한 모용신이 맹주실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던 맹주가 천천히 눈을 뜨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모용단주.”
“맹주님을 뵙습니다.”
모용신이 고개를 숙이면서도 내심 감탄했다.
‘과연 아직도 정정하시구나.’
맹주 묵천악은 웃옷을 벗어 던진 채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마구 피어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른 근육이 곳곳에 잘 엉겨 붙어서 강철처럼 단단한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면 도저히 일흔이 넘은 노인 같지가 않다.
맹주가 장삼을 걸치며 일어났다.
“그러잖아도 내 자네를 찾아가려고 했지.”
“무슨 일이십니까?”
“이번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지.”
“아, 저 역시 이번 비무 대회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비무 대회? 훗.”
묵천악이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나는 비무 대회를 말하는 것이 아닐세. 진짜 대회가 따로 있으니.”
“하면 비무 대회는 일종의 눈속임인지요?”
묵천악이 빙그레 웃었다.
“과연 자네는 내 의중을 잘 파악하는군.”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모용신이 겸양을 갖춰 대답하자, 묵천악이 뒷짐을 지고 몸을 돌렸다.
“따라오게. 자네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들이 있네.”
모용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묵천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묵천악은 출입구로 걷지 않고 오히려 책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모용신이 가까이 다가가자, 묵천악이 책장에 꽂혀 있는 서책 중 하나를 슬쩍 잡아당겼다.
그그그긍……!
순간 책장이 통째로 옆으로 미끄러졌다.
놀라운 광경이지만 모용신의 반응은 담담했다.
이미 이 기관 장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기에.
유사시에 맹주가 대피하기 위해 만든 기관 장치였다.
맹주뿐만 아니라 맹주의 최측근도 이 장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맹주가 책장 뒤로 나타난 한 평 정도 되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올라타게.”
“예, 맹주님.”
모용신이 좁은 공간에 나란히 들어서자, 맹주가 벽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기풍을 쏘았다.
퉁!
둔탁한 소리가 울리더니 이번에는 옆으로 미끄러진 책장이 스르르 닫혔다.
기이이이잉.
동시에 두 사람이 탄 공간이 통째로 미끄러지듯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아래로 내려간 승강기가 어느 순간 맑은 소리와 함께 멈췄다.
띠잉.
“도착했군.”
맹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벽면이 매끄러운 소리를 내며 옆으로 열렸다.
스르르릉!
그러자 야명주가 곳곳에 박힌 기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맹주가 앞장서서 걸었다.
“비무 대회 때문에 날 찾아왔다고? 무슨 일인가?”
“제가 이번 비무 대회에 참가하고자 합니다.”
“비무 대회에? 부단주가 참가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단주가 남궁천에게 당했습니다.”
맹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나 그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음을 놀렸다.
“과연. 남궁천이군. 이젠 부단주도 제압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단 말인가?”
“제 불찰입니다.”
“하면 자네가 직접 참가해서 남궁천과 겨룰 생각인가?”
“그 아이가 정말 그만한 능력을 가졌다면 한 번은 맞붙게 되겠지요.”
“흐음. 그것도 괜찮지.”
고개를 끄덕인 묵천악이 걸음을 멈추더니 옆으로 돌아섰다.
복도 중간에 철문이 있었다.
‘여긴…….’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이곳은 외부의 은밀한 손님들을 맞이할 때 쓰는 곳이다. 대개는 한꺼번에 많은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한다.
물론 그 손님들이 떳떳한 강호인일 경우는 거의 없다.
묵천악은 지체 없이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모용신이 무심히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
엄청난 기운.
지하 밀실에 가득 모인 사람들.
대략 서른 명 정도다.
눈에 익은 인물도 있고, 낯선 인물도 있다.
대체로 눈에 익은 인물들은 무림맹에서도 꽤나 요직에 앉은 자들이다. 아니면 명문의 제자이거나. 그들 모두 맹주의 사람들로 인정받는 자들이다.
낯선 이들 중에도 왠지 알 만한 인물도 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용모파기로 얼굴을 확인한 적이 있는 자들.
대체로 무림공적들이다.
정사가 구분 없이 모여 있다 보니 분위기는 어딘지 흉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묵천악은 태연한 태도로 걸음을 옮겨 단상 위로 올라섰다.
“모두들 모였군. 내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묵천악의 말이 떨어지자, 몇몇 무림공적들이 흉흉한 눈길을 부라린다.
그러자 그사이에 섞여 있던 살충대주 조춘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고는 으르렁댔다.
“이 버러지 새끼들아, 눈깔 안 깔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알을 부라려? 확 뽑아 버릴라.”
“대주, 입이 더럽군. 걸레라도 물었나?”
얼굴이 온통 붉은 남자가 칼등으로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조춘이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적면도(赤面刀). 네놈이 본 맹에 발을 들이더니 주제를 망각한 모양이구나. 너 같은 버러지를 잡아들이는 게 내 일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후후. 누가 들으면 자네가 날 여기까지 끌고 온 줄 알겠군.”
“이 버러지 새끼가 마주 보고 대화를 해주니까 비슷한 처지처럼 느껴지는 거냐?”
“대주. 계속 그딴 식으로 주둥이를 털면 예의를 가르쳐줄 수밖에 없어.”
적면도가 맹수처럼 눈빛을 빛내며 칼을 고쳐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자, 지켜만 보던 모용신이 싸늘하게 뇌까렸다.
“두 사람 그쯤 하지. 아직 맹주님 말씀이 끝나지 않았네.”
그제야 조춘이 맹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맹주, 아랫것들 교육 좀 시켜야겠소.”
“너 이 새……!”
“대주.”
묵천악의 부름에 조춘이 흠칫거리고는 포권을 취했다.
“예, 맹주님!”
“자중하게.”
“죄송합니다!”
“적면도.”
“말하시오.”
“그대도 적당히 하지. 내가 나서지 않도록.”
엄중한 경고였다.
맹주의 서늘한 눈빛이 적면도를 찍어 누른다.
적면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알겠소. 그런데 왜 유환객이 보이지 않소? 그도 참가한다고 들었는데.”
“유환객은 죽었네.”
맹주의 대꾸에 적면도가 흠칫거렸다. 다른 무인들도 술렁거렸다.
“그게 사실이오? 며칠 전에도 내가 봤는데? 대체 어떻게 죽은 거요?”
“남궁천에게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네.”
“허……!”
장내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남궁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시 분위기를 살핀 묵천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들을 초대한 이유는 알고 있을 터. 지금부터 비무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자네들에겐 또 다른 대회가 시작된 걸세.”
장내에 무인 무인들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모용신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생각했다.
‘그렇군. 또 다른 대회라는 건 결국 남궁천을 노리시는 거군.’
마침 무림공적 중 한 명이 물었다.
“정말 성공하면 무림공적 명부에서 제외해주는 거요? 거기에 더해서 막대한 보상금까지 약속하고?”
“물론일세.”
“좋군, 좋아.”
몇몇 무림공적들이 눈을 빛내며 웃었다.
묵천악이 말을 마저 이었다.
“비무 대회 참가를 통해 진행해도 좋고, 길거리 암습을 가해도 좋네. 성공만 하면 약조한 보상이 있을 걸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남궁천을 죽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