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내 돈
퍽, 퍽……! 절퍽……!
이젠 축축하게 젖은 타격음.
그 소리만 들어도 남궁천이 얼마나 지독하게 사람을 잡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졸지에 내공 실린 주먹으로 흠씬 두드려 맞은 최팔이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렸다.
멱살을 쥔 채로 피가 뚝뚝 흐르는 주먹을 들어 올렸던 남궁천이 미간을 구겼다.
“으응?”
“사…… 사려…… 주세효…… 제…… 제바르……!”
입에 고인 피가 거품이 되어 넘쳐흐른다.
이가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지고,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됐다. 남궁천에게 얻어터지는 동안 몇 번이나 기절을 했다가 의식을 되찾길 반복했다.
급기야 죽음의 공포를 느낀 최팔이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애원했다.
“부…… 후탁…… 드림미다…… 제발…… 사, 사려주…… 세효…….”
“후우, 그러게 이게 뭡니까? 정말. 속상하게. 왜 남의 방을 빼앗으려고 했어요?”
“소, 소님이…… 아니믄…… 나가라고…… 해허…….”
“그렇다고 남의 방을 탐내면 되나요? 네 이웃의 방을 탐내지 말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죄…… 죄홍함미다…….”
최팔은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그는 상황을 파악할 정신도 없었다.
의식이 돌아올 때쯤 이미 남궁천 아래에 깔려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었다.
불쑥 화가 치미는데, 그 순간 남궁천이 어디를 어떻게 건드린 것인지 공력이 폭주하면서 지독한 통증이 몰려든 것이다.
그렇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눈이 퉁퉁 부어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남궁천은 여전히 자신의 배 위에 올라타서 무지막지하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고.
이번에도 울분이 치솟았지만, 희한하게도 남궁천의 주먹을 맞는 순간 공력이 폭주하면서 또 정신을 잃었다.
물론 이는 전부 남궁천의 노림수였다.
초견파공안으로 최팔의 공력 상태를 훤히 보고 있던 남궁천이 일부러 필요에 따라 요혈을 건드린 것이다.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가 깨길 반복하던 최팔은 급기야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느끼고는 눈물을 쏟아냈다.
남궁천이 최팔을 다독였다.
“뚝. 다 큰 사람이 울기는. 자자, 뚝 하세요. 뚝.”
“흑…… 뚜…… 뚝…….”
“옳지. 안 죽어요, 안 죽어. 제가 설마하니 그 정도로 사람을 죽이겠어요? 순간 욱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이성을 잃지는 않아요.”
“고, 고맙…… 으흐흑……!”
얼떨결에 감사 인사를 건네던 최팔은 다시 한번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깨닫고는 눈물을 쏟아냈다.
“어허. 뚝 하라니까.”
“흑…… 흐윽……!”
최팔이 구슬프게 흐느끼면서 눈물을 훔쳐냈다.
남궁천이 최팔을 부축해 일으키고는 돌아섰다.
“거기 뭐 해요? 좀 도와주지 않고?”
그제야 넋이 나가 있던 청랑단원들이 얼른 달려와서 만신창이가 된 최팔을 부축했다.
그나마 몸이 가장 멀쩡한 청랑단원이 최팔을 등에 업었다.
“그럼 어서 의원으로 모시고 가시길.”
“…….”
“왜요? 뭐 할 말이라도?”
“끄음. 아닐세.”
청랑단원이 서둘러 고개를 젓고는 객잔을 빠져나갔다. 함께 온 동료들 역시 모두 객잔을 빠져나갔다.
한차례 태풍이 휩쓴 객잔은 다시 두런두런 대화 나누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시끌벅적해졌다.
귀왕이 남궁천에게 얼른 달려왔다.
“공자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자마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됐고. 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 만들어 와라.”
“알겠습니다요! 후다닥 대령합지요!”
귀왕이 흔쾌히 대꾸하고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가 금방 다시 돌아오더니 쭈뼛거리며 물었다.
“음…… 저…… 근데 제일 좋아하는 요리가 뭐죠?”
“글쎄다. 내가 뭘 좋아하지?”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귀왕이 넋 나간 얼굴로 쳐다보다가 뭔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알았다!”
“오, 뭐냐?”
“국수 아닙니까? 고기국수!”
따악!
“크윽! 왜 때리십니까? 틀렸습니까?”
“이 새끼 보소. 다른 놈들은 비싼 것 잔뜩 만들어주면서 나한테는 값싼 국수를 먹이려고? 어차피 돈도 안 내니까 원가 절감하겠다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늘 여기서 고기국수를 드셨으니까…….”
“그거야…… 내가 그걸 좋아하니까 그런 거고.”
“그럼 역시 고기국수가 맞잖아요?”
“흐음. 그런가? 이거 실망스러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고기국수였다니.”
남궁천이 새삼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귀왕이 세상 억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저 손버릇 좀 어떻게 하면 좋겠구먼! 못된 것까지 제 아비를 꼭 닮아선!’
귀왕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궁천 역시 씁쓸한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이게 따지고 보면 다 전생의 버릇 때문이겠지. 언제든 달아날 수 있도록 빨리 먹어야 하고, 요리 시간도 길지 않은 것을 찾아야 했으니. 역시 고기국수만 한 게 없지.’
이제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하나 이미 고기국수라는 말을 듣고 나니 배 속에서 꼬로록 소리가 난다. 머리로는 더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데, 본능은 고기국수를 향해 침을 흘리고 있다.
아, 서글픈 현실이여.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가서 고기국수 안 가져오고.”
“예, 그럼 지금 만들어 오겠습니다요. 식사는 방에서 하실 건지요? 아니면 여기서?”
“우선 여기서 먹고 천천히 올라가지.”
“알겠습니다요. 그럼 얼른 만들어 오겠습니다!”
귀왕이 주방으로 달려 들어가자, 남궁천이 돌아서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다들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다.”
팽수혁을 비롯한 동기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원래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남궁천이 나타나니 자연스럽게 약속이나 한 듯 탁자에 둘러앉았다.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들 철 좀 들어라. 보아하니 청랑단과 시비가 붙은 것 같던데, 이제 객잔에서 싸움할 시기는 지나지 않았냐?”
“뭐?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팽수혁이 발끈해서 소리치자,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때문인데?”
“이게 다 네가……!”
“내가?”
“쳇, 말을 말자! 됐다! 어쨌거나 들어오자마자 청랑단 부단주를 개 패듯 팬 놈이 할 말은 아니다.”
팽수혁이 팔짱을 끼고는 휙 몸을 돌렸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남궁천을 욕보이는 녀석들에게 화가 났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윤종승이 남궁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너 진짜 괜찮겠냐?”
“뭐가?”
“아까 그 사람. 청랑단 부단주였어.”
“그래서?”
“그래서라니? 엄청난 신분을 건드린 건데…….”
“뭔 상관이야? 어차피 난 적랑단주가 될 테니까 내 아래구만. 상관이 예의 없는 부하를 줘 팼는데 당연한 거지. 일종의 훈육과 지도가 되겠군.”
남궁천의 뻔뻔한 태도에 윤종승이 입을 척 벌렸다.
‘와…… 이 새끼는 진짜다.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옆을 돌아보니 유현이 눈을 반짝이며 남궁천을 보고 있다.
어째 좀 불안하다.
저 순수한 도사가 이상한 것까지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건만.
‘유현, 너는 바르게 커야 한다. 바르게.’
그러는 사이 마침 귀왕이 고기국수를 내어왔다.
남궁천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그릇을 받아 들고는 무심한 목소리로 툭 던지듯 물었다.
“너, 여기 침 뱉은 건 아니지?”
“…….”
“……?”
“……다시 가져 오겠습니다요.”
“…….”
귀왕이 얼른 그릇을 가져가자, 팽수혁이 벼락처럼 소리쳤다.
“남궁천 잡아!”
“놔! 이것 안 놔? 저 빌어먹을 새끼가 내 밥그릇에 침을……! 제길, 이거 놓으라니까!”
“천아, 참아! 너 지금 사람 죽일 기세야!”
“저건 뒈져도 싼 놈이야! 저 새끼가 은인을 몰라보고!”
“그래도 거짓말은 안 했잖아!”
“그게 더 기분 나빠! 차라리 감쪽같이 속이든지! 좀 놓으라니까!”
그렇게 견습생들과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던 남궁천이 겨우 이성을 되찾고는 씨근거렸다.
“아오, 저 새끼 내가 진짜 죽일 수도 없고.”
아니, 넌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팽수혁이 속내를 삼키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쯤 되니 귀왕과 남궁천의 관계가 더욱 궁금해진다.
그런데 남궁천이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야야, 그냥 넘어가라니까!”
“내가 어딜 가는 줄 알고?”
“어엉? 너 주방 쳐들어가려는 거 아냐?”
“아닌데. 잠깐 기다려 봐. 다녀올 테니.”
“그럼 어딜…….”
팽수혁이 말을 꺼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남궁천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중해져 있었기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네. 그사이에 흰 머리가 왜 저렇게 늘어난 거야? 탈색이라도 한 건가? 유환객(柔幻客) 하승신.’
어딘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남궁천이 객잔 구석진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곳에는 백발의 중년인이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남궁천을 힐끔 보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탁!
남궁천이 허락도 없이 탁자 맞은편에 걸터앉자, 백발의 중년인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뭔가?”
탁한 목소리.
남궁천은 확신했다.
‘못 본 사이에 좀 마르고 흰 머리가 늘어서 긴가민가했는데, 목소리 들으니 확실하군. 유환객. 오랜만이오. 당신은 날 몰라보겠지만.’
유환객 하승신.
그는 전생의 자신처럼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혔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만 자신과 달리 실제로 돈만 되면 어떠한 행위도 서슴지 않은 녀석이었다.
특히나 기묘한 사술을 이용해서 환각을 일으켜 살인을 저질렀는데, 무림맹의 의뢰를 받고 남궁천을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때 이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남궁천이 옛 기억을 떠올리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절 빤히 쳐다보셔서요. 제게 할 말이 있는 줄 알고요.”
“……!”
유환객은 내심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약관인 청년이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니, 한 명 있었다.
천하대살성 진천랑.
‘이 녀석이 진천랑의 아들이라더니.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충분히 환술을 부려서 시선을 감췄다.
그럼에도 이 아이가 자신의 시선을 눈치챈 것이다.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다. 일단 시치미를 뗐다.
“착각한 모양이군. 난 자네를 보지 않았네.”
“에이, 거짓말. 아까부터 계속 절 힐끔거리시던데?”
“자네 쪽을 보긴 했으나, 자네를 본 게 아닐세.”
“그럼 뭘 본 건데요?”
“거, 집요하군. 그냥 저기 요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본 걸세.”
유환객이 남궁천이 앉은 자리 근처의 아무 요리나 가리켰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그럼 정말로 절 안 본 거예요?”
“그렇네.”
“정말?”
“그렇다니까.”
“진짜 한 번도 안 봤어요?”
“안 봤다니까!”
유환객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러자 남궁천이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이봐, 이봐. 더 수상하잖아. 나처럼 젊은 놈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청랑단 부단주를 개 패듯 팼는데 한 번도 안 쳐다봤다고? 왜요? 오히려 더 이상한데?”
“……!”
“흐응.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데.”
남궁천이 짐짓 눈을 가늘게 뜨자, 유환객이 희미하게 웃었다.
“과연 자네 말이 일리가 있군. 다만 나는 자네가 지나치게 추궁하기에 그리 대답한 걸세. 자네 말대로 청랑단 부단주를 개 패듯 팬 겁 없는 청년에게 맞설 만큼 담이 크지 않거든.”
물론 완전한 거짓말이다.
남궁천도 알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유환객이 약관의 청년에게 쫄았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남궁천이 불쑥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그야…… 유명한 객잔이니…….”
“아니, 무한에 왜 온 거냐고요.”
“비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라네.”
“진짜로?”
“그렇네. 문제라도 되나?”
“뭐, 그건 아니지만.”
당신이 비무 대회에 참가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남궁천이 대뜸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혹시 나 죽이려고 왔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