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92화 (291/508)

292. 내 돈

한 식경 전.

귀왕객잔에 도착한 팽수혁은 정문 위에 내걸린 웅장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허! 그 조그맣던 식당이 이렇게까지 컸다고?”

팽수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예전의 황량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바로 맞은편에도 귀왕객잔 분점이 생겼고, 그 옆에도 또 하나 있다.

어디 그뿐이랴?

그 옆에는 지금 다루를 짓는다며 한창 공사 중이었는데, 만들어진 현판을 보니 귀왕다루였다.

“온통 귀왕 천지네. 이러다 이 거리가 ‘귀왕로’로 불리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객잔 앞의 거리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그래, 이곳에서 남궁천이 조강민을 뒈지도록 두드려 팼었다.

아마 그날 이후로 남궁천에 대한 시선은 백팔십도 달라졌으리라.

용천관 공식 호구에서 꿈틀거리는 잠룡으로!

“미친놈. 그만한 능력이 있었으면서…….”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

문득 귀에 익은 목소리에 얼른 돌아서니, 윤종승이 씨익 웃으면서 다가왔다.

“잘 지냈나? 가문은 좀 정리가 됐고?”

“빌어먹을! 여전히 언가에 얹혀 지내는 중이지. 흑무련 놈들이 북쪽을 다 장악하고 있으니 복귀하는 게 힘들다.”

“고생이 많구나.”

“그나저나 너는 괜찮냐? 그때 남궁가로 달려간 후로 위기를 벗어났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남궁천은 어디에 두고?”

“그 녀석이 당가로 갔다는 말을 들었어.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모르고. 난 먼저 맹에 복귀했으니까.”

“그랬군. 도대체 뭘 하기에 사천까지 간 거지? 하여튼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라니까.”

“뭐든 이유가 있겠지.”

“얼씨구? 이젠 꽤 친해졌나 보다? 네가 남궁천을 다 이해하고.”

팽수혁이 굵다란 눈을 굴리자, 윤종승이 피식 웃었다.

“그 녀석을 어떻게 이해하겠냐? 그저 대충 짐작만 할 뿐이지.”

“하긴. 그나저나 남궁천은 이번 비무 대회에 참가하겠지?”

“그러지 않을까? 넌? 너도 참가하냐?”

“아니. 안 해.”

팽수혁이 단칼에 차단하자, 윤종승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기에.

“왜? 당연히 할 줄 알았는데.”

“남궁천 그 자식이 할 것 같아서.”

“아…….”

윤종승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팽수혁은 자존심이 세다.

그래서 남궁천을 자신보다 강하다고 표현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은연중에 남궁천을 인정하고 있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팽수혁은 남궁천이 참여하는 이상 단주가 되기 힘들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도 부단주라도 해보면…….”

“이 자식이! 하려면 단주를 해야지 왜 부단주야? 어엉? 너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참가하지 않는 건 남궁천에게 기회를 주는 거다. 그 녀석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알겠어?”

“아…… 그래…….”

아무래도 생각을 정정해야겠다.

음…… 팽수혁은 남궁천을 엄청나게 인정하고 있다.

‘이게 이 녀석의 인정 방식이니까.’

그런데 그때 마침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을 두드렸다.

“하하. 오랜만에 만나서 왜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입니까?”

“어? 유현 도장!”

팽수혁이 반색하며 소리치자, 유현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집 잃은 강아지 신세인데 안녕할 리가 있겠어? 뭐, 그래도 사지육신 멀쩡하니 감사한 일이지.”

“왠지 팽 소협은 기개가 더욱 좋아진 것 같습니다. 또 성장하신 것 같네요.”

“너는 좀 어때? 아니, 그보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화산파는 봉문했다고 들었는데.”

팽수혁의 말에 유현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맞습니다. 본 산은 봉문했는데, 저는 화산파 소속이 아니라 무림맹 견습생 신분으로 활동하겠노라 선언한 상황입니다.”

“장문인이 허락을 하셨어?”

“아니요. 지금쯤 발칵 뒤집혔겠죠.”

“와…… 유현 도장. 날이 갈수록 과감해지는군. 이젠 사람도 파리 목숨처럼 여기더니.”

“하하…… 제가 언제 그렇게까지.”

“설마 본인만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건가?”

“그러게.”

옆에 선 윤종승도 얼른 동조를 하자, 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종승이 피식 웃고는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여기 서 있지만 말고 들어가자고. 조금 있으면 진소홍도 올 테니까.”

그렇게 세 사람은 귀왕객잔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세 사람을 본체만체한 귀소이들은 창가 쪽을 가리키며 눈알을 부라렸다.

“바쁘니까 저쪽에 앉아서 대충 처먹고 가라!”

이 황당한 손님 접대에 팽수혁은 어이가 없었다.

최근 이래저래 바쁜 일 때문에 무한에 온 지가 좀 됐는데, 한낱 점소이가 자신에게 하대를 하다니?

아무리 설정이라지만 무인을 상대로 저러면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저들 몸이…….’

체격이 하나같이 우람하고 다부진 근육질을 자랑하고 있다.

한낱 점소이나 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뭐 하던 놈들을 모아서 객잔을 차린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창가 자리에 앉으니, 윤종승이 이것저것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처음 왔는데, 아주 황당하군.”

“하하. 나도 얼마 전에 무림맹으로 복귀하고 나서 처음 왔었는데 좀 황당하더라고. 그래도 조금 적응되면 재미있어.”

“흐음. 뭐, 그건 넘어가고. 너도 좀 달라졌군.”

“나?”

윤종승이 자신을 가리키자 팽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뭔가 좀 더 강해진 것 같군. 더 이상 예전의 그 약골이 아니야.”

“이야, 이거 기분 좋은데? 팽수혁이 인정을 해주다니.”

“난 원래 인정 잘 한다.”

“그래, 그래. 그런데 뭐…… 사실 남궁천 때문이기도 해.”

윤종승이 희미하게 웃자, 팽수혁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남궁천…… 또 그 녀석이군.”

“그래, 또 그 녀석이지. 어느 순간부터 남궁천이 빠지면 내 인생을 얘기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니미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 짜증 나네.”

팽수혁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인정했다.

이번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이었다.

“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유현도 대답하자, 팽수혁과 윤종승이 동시에 대꾸했다.

“확실히 손속을 보면 달라졌지.”

“제, 제가 그렇게 달라졌습니까?”

“…….”

팽수혁과 윤종승이 서로를 보면서 한숨만 내쉬었다.

팽수혁이 젓가락을 꾹 말아 쥐면서 이를 갈았다.

“건방진 새끼. 마음대로 내 인생에 들어왔다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군!”

“적랑단주 선발전에 참가한다면 머지않아 볼 수 있겠지.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보고 싶긴 누가 보고 싶다는 거야? 그런 호구 새끼 어디 가서 뒈지든 말든 알 바 아니다.”

팽수혁이 쏟아내는 거친 말에 이번에는 윤종승과 유현이 서로를 마주 보며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저렇게 거짓말도 티가 나게 하는지.’

어쨌거나 세 사람이 남궁천을 떠올리는 사이 공교롭게도 등 뒤에서 남궁천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 전 시끌벅적하게 들어섰던 청랑단원들이었다.

“흥! 강호신룡은 개뿔. 요즘은 별호를 너무 막 지어대서 탈이라니까. 예전엔 정말 신룡에게만 주어지던 별호가 이젠 개나 소나 신룡이 되고 있단 말이야.”

명백하게 남궁천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말.

순간 팽수혁이 눈을 부라리며 벌떡 일어나려는데, 윤종승이 말렸다.

“참아. 청랑단이야.”

“청랑단이 뭐 어때서? 난 하북팽가 팽수혁이다.”

“그래도 참아.”

“넌 못 들었냐? 저것들이 지금 남궁천을 욕보이고 있잖아!”

“…….”

윤종승이 희미하게 웃자, 팽수혁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남궁천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놈이 욕을 먹으면 우리도 같이 욕먹는 거니까.”

“누가 뭐래?”

그때 다시 청랑단원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어이쿠, 부단주님 성격상 그렇게 겉멋만 잔뜩 든 놈은 반신불수 만들지도 모른다네.”

“하하하!”

결국 이번에는 윤종승도 참지 못하겠는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일어났다.

팽수혁도 곧장 걸음을 옮기려는데, 마침 두 사람을 앞질러 가는 남자.

무슨 일인지 귀왕객잔의 주인장이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시비를 거는 게 아닌가?

아무리 욕쟁이 설정이라지만, 분명 정도가 지나쳤다.

급기야 청랑단원들이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자, 귀왕도 허리춤에서 넓적한 식칼을 꺼내 들면서 으르렁거렸다.

“곱게 처먹고 갈 것이지.”

“이 미친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네놈이 본 맹을 등에 업고 돈 좀 만지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거냐?”

“닥쳐라. 너희들이 돈 줬냐?”

그때였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위층에서 일하던 귀소이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민첩한 몸놀림으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청랑단원 하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새끼들…… 무공을 익혔군.”

“뭐 하던 새끼들이냐? 이거 한 번 털어봐야겠는데?”

“음식 장사 하는 새끼들이라니까. 거, 우리 객잔의 설정도 이해 못 하면서 왜 여길 들어와서 굳이 처드시려고 할까? 그냥 꺼지시지.”

“미친 새끼.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얘들아, 쳐!”

청랑단원 하나가 소리치자, 동료들이 일제히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보아하니 주인장과 점소이들이 무공을 좀 익힌 것 같았지만, 그래봐야 조무래기들 아니겠나?

자신들은 무림맹 최고 무력 집단 중 하나인 청랑단이었다.

그런데 두어 걸음도 옮기기 전에 청랑단원들이 멈춰 서야 했다.

“동작 그만.”

묵직하게 떨어지는 목소리.

청랑단원들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는 팽수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오고 있었다.

유현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팽 소협, 아까 그건 남궁 소협이 자주 말하던…….”

“알아. 나도 한 번 말해보고 싶었다. 됐냐?”

“하하.”

낭랑하게 웃는 유현이 곧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청랑단원들을 훑었다.

어딘지 더욱 차가운 인상을 가지게 된 유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현은 화산파가 흑무련에게 맥없이 당한 후 크게 상심해 있던 차였다.

그러다 보니 평소보다도 더 예민해진 상태.

청랑단원 하나가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너희들은 뭐냐? 견습생이냐?”

“도롱뇽 친구들이오만.”

팽수혁이 태도를 어깨에 척 걸치고는 삐딱한 자세로 말하자, 청랑단원이 피식 웃었다.

“그렇군. 우리 말에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군.”

“도롱뇽을 도롱뇽이라 하는데 기분 나쁠 게 뭐 있겠소? 나보고 한 말도 아닌데. 다만 그 도롱뇽 수준을 좀 보여주고 싶어서 말이오.”

“여기서?”

“이왕 그쪽도 칼 빼 들었으니까.”

팽수혁이 턱짓으로 도검을 가리키자, 청랑단원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살다 살다 천하의 청랑단이 견습생들에게 시비 걸리는 날이 오다니? 하긴, 점소이가 시비를 걸고 오는 것보단 나은 상황인가?

청랑단원 하나가 연장자로 보이는 사내에게 말했다.

“형님, 이것들 혼쭐을 내줘야 합니다. 제가 뭐랬습니까? 신룡이라는 소리 들으니 콧대가 하늘을 찌르지 않습니까?”

“거, 떽떽거리면서 시끄럽네. 신룡은 내가 들은 것도 아닌데 콧대는 무슨.”

“네 이놈!”

“얻다 대고 놈놈이야!”

순간 팽수혁이 태도를 휘둘렀다.

부우우우우우웅!

엄청난 파공성을 터뜨린 태도가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벽력처럼 청랑단원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헉!”

“엇!”

청랑단원들이 일제히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팽수혁의 태도는 정확히 정수리 위에서 멈췄다. 은은한 도기가 태도를 감싼 채.

죽다 살아난 청랑단원은 아랫도리가 뜨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저, 저……!”

연장자가 그를 가로막으며 나섰다.

“네놈 이름이 뭐냐?”

팽수혁이 태도를 거둬들이고 어깨에 척 걸쳤다.

“내 이름은 알아서 뭐 하시려고? 남궁천이 도롱뇽이니까 나는 맹꽁이 정도로 보면 될 텐데?”

“맹꽁이……?”

“왜? 맹꽁이에게 당해서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으니까 좀 정신이 드시나?”

“감히 본 단을 상대로……!”

“그쪽에서 힘없는 점소이들을 겁박하는 걸 보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무림맹원으로서 의협심이 동해 어쩔 수가 없었소.”

그러자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던 유현이 조용히 뇌까렸다.

“팽 소협, 긴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그냥 목을 따시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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