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91화 (290/508)

291. 내 돈

“거기 조심! 그게 얼마짜리 자기인 줄 알아? 그거 깨지면 네 봉급에서 다 까버린다! 잠깐! 그 그림은 그쪽이 아니라, 저쪽에! 자자, 휘장은 저기 달도록 하고!”

모처럼 귀왕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원래 귀왕의 목소리는 컸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우렁찼다.

귀왕의 지시를 받으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귀소이들의 표정에 슬슬 불만이 어리기 시작했다.

“거, 쉬엄쉬엄 좀 합시다. 어차피 형님은 돕지도 않으시면서.”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 지금 나더러 네놈들과 같은 일을 하라는 것이냐? 내가 이래 봬도 너희들을 이끌던 귀왕채주란 말이다!”

“이젠 그냥 귀왕객잔 주인장이잖소.”

“그래서 싫으냐? 다시 귀왕채 시절로 돌아갈까?”

“거참, 싫을 리가 있겠소? 그냥 자꾸 잔소리만 해대니까 하는 소리지.”

“그럼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일이나 해!”

“대체 누가 오기에 이렇게 호들갑이오?”

귀소이가 이맛살을 푹 찡그리며 따졌다.

지금 그들이 열심히 휘장을 달고 도자기를 옮기며 꾸미는 곳은 귀왕객잔 본점 최상층인 특실이었다.

애초에 조그마한 식당으로 시작했던 귀왕반장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점점 유명해지더니 이내 규모가 꽤 큰 객잔으로 탈바꿈했다.

그러고도 입소문은 계속 퍼졌는데, 사실 여기에는 남몰래 활약한 불명회의 공도 상당했다.

어쨌거나 지금 불친절한 욕쟁이 맛집으로 유명세를 탄 귀왕객잔은 반장을 증축하여 만든 본점과 인근 분점이 세 군데나 됐다.

오죽하면 무한에 가면 황학루보다 귀왕객잔에 먼저 들러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일까?

한데 그중에서도 본점 최상층은 가장 귀한 손님이 머무는 곳이었다.

꾸미지 않아도 휘황찬란한 특실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치장을 하고 있으니 호기심이 일 수밖에.

귀소이의 물음에 귀왕의 입가에 모처럼 푸근한 미소가 걸렸다. 늘 험상궂은 얼굴로 잔소리만 퍼부어대던 귀왕이었기에 그런 미소 어린 얼굴이 살짝 어색할 지경이었다.

귀소이가 눈살을 구기며 다시 물었다.

“형님이 아는 손님이오?”

“당연하지. 우리의 은인이시다.”

“우리의 은인? 그게 누구요?”

“주군이 오신단 말이다!”

“주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귀소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귀왕을 돌아보았다.

“설마 남궁천 공자가 오신단 말이오?”

“그래. 오늘이나 내일쯤 도착하신다는 연통을 받았다. 그러니 서두르란 말이야.”

“오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우리를 개과천선 시켜주시고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지시더니 이제 오시는군요!”

“그렇다. 주군은 그런 분이다. 수렁에 빠진 우리를 구해주시고, 이렇게 멋진 객잔까지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않았더냐?”

“으음. 그렇지요. 그런데…… 흐음.”

귀소이가 턱을 괴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과하지 않나?

물론 남궁천이 자신들을 개과천선하게 만들고 양지에서 새 출발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제일 먼저 불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지나친 폭리라 할 수 있었다.

일은 소처럼 부려먹으면서 봉급은 너무 적다.

귀왕도 이 부분에 대해서 늘 불만이 가득하지 않았던가?

뭐, 남궁천이 은인인 것도 사실이고, 꽤 안 봐서 한 번쯤 보고 싶은 것도 맞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귀소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미운 정이 든다더니…… 형님은 이제 남궁천 공자가 꽤 좋은가 보오?”

“싫을 까닭이 있겠느냐?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번듯한 객잔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분 덕인데.”

“하긴.”

귀소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귀왕이 창가로 저벅저벅 걸어가서 창밖을 보며 말했다.

“보아라. 맞은편에도 귀왕객잔 분점이 있고, 그 옆에도 귀왕객잔 분점이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이곳 명칭이 귀왕로(鬼王路)가 될 수도 있다. 이 어찌 기쁘지 않은 일이겠느냐?”

“그래서 보은하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방을 꾸미는군요.”

“후후후. 그게 전부는 아니지.”

“으응? 그럼 뭐가 또 있소?”

귀왕이 어딘지 꿍꿍이를 숨긴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이 녀석아, 기회는 스스로 쟁취하는 거다. 이건 우리에게 기회야!”

“무슨 기회?”

“주군이 오시면 달라진 귀왕객잔을 보고 얼마나 감탄하시겠느냐?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허름한 식당이었던 곳이 이제는 상당히 번창한 객잔이 되지 않았느냐? 이 모습을 보면 당연히 기분이 좋겠지?”

“그렇겠죠?”

“게다가 방도 이렇게 근사하게 꾸미면 더욱 기분이 좋아지겠지?”

“그렇겠죠?”

“그럼 평소에 아무리 인색하던 사람도 인심이 후하게 되게 마련이겠지?”

“음…… 아마도……?”

“그걸 노리는 거다.”

“아……!”

귀소이가 그제야 깨닫는 게 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과연! 역시 형님입니다! 그럼 주군께 뭘 요구하시려고요?”

“너는 우리 봉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쥐꼬리만 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래, 바로 그거다. 귀왕객잔이 이렇게 분점을 낼 정도로 커졌는데, 우리는 여전히 초봉 수준에 머물러 있단 말이다! 한마디로 엄청난 폭리에 시달리며 허리띠 졸라매고 일한단 말이지!”

“확실히. 그렇지요.”

“이제는 우리도 보상이 필요할 때가 아니겠느냐?”

“동감이오!”

“그래서 나는 이 기회에 주군께 당당히 말씀드릴 작정이다.”

“뭘?”

“솔직히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돈은 주인이 다 챙기는 격이니까…… 어느 정도 합리적인 지분을 요구할 생각이다!”

“오오오! 지분!”

귀소이가 귀가 번쩍 트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분을 얼마나 요구하시려고?”

“우리가 부린 재주 덕이니 최소 칠 할을 요구해야겠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할 것 같고.”

“그래서 오 할을 밀어붙일 생각이다!”

“오 할! 합리적이오! 상당히 합리적이오!”

귀소이가 연신 박수를 치며 말했다.

표정과 억양만 봐서는 벌써 오 할의 지분을 받기로 약조받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귀소이가 곧 현실로 돌아와 우려 섞인 목소리를 흘려냈다.

“한데 그 자린고비 주군이 그만큼이나 우리에게 나눠주겠소?”

“물론 우리의 주군은 돈을 굉장히 아끼며, 우리에게 폭리를 취해 제 배만 채우는 개새…… 커흠! 지극히 검소한 분이시지만 아마 귀왕객잔을 이렇게나 일으켜 세운 걸 보신다면 분명 들어주실 거다.”

“확실히 그럴지도!”

“그러니 최대한 기분을 좋게 만들어줘야지. 오늘을 위해 특별히 맛 좋고 독한 술을 준비했으니, 적당히 기회를 봐가면서 말할 생각이다.”

“역시…… 형님은 우리의 영원한 채주요!”

“크하하하! 이것들아, 이제 내 마음을 알겠냐? 그러니 어서 방을 꾸며라! 최대한 화려하게! 방에 들어서자마자 기분이 좋아지도록!”

“알겠습니다요!”

귀소이들이 대답과 동시에 열심히 방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둘러본 귀왕이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바쁜 날이다.

모처럼 주군을 맞이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무림맹에서 적랑단주 선발전을 실시하겠다고 공표한 지 닷새가 지난 날이다.

이제 먼 길을 온 손님들이 객잔을 찾을 때가 됐다.

귀왕이 막 아래층으로 도착했을 때, 마침 한 무리의 무인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객잔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같은 제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서는 무림맹 소속 같았다.

‘가만…… 저 푸른색 제복은 청랑단인가?’

무림맹 인근에서 객잔을 운영하다 보니 제복만 봐도 대충 소속을 짐작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저들은 청랑단원이었다.

모두 여섯 명의 청랑단원들은 일 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무한에 사람이 많아졌군.”

“다들 적랑단주 자리를 탐내느라 모인 거지.”

“하긴. 이런 파격적인 인사 조치가 있었던 게 언제인지 모르겠군. 남녀노소 불문하고 오로지 무공 실력으로만 본다니.”

“그만큼 본 맹이 위급하다는 뜻이겠지.”

“그러고 보면 우리 맹주님도 참 대단하신 분이지 않나? 최측근으로 임명해도 될 텐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채용하시다니.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지.”

“그게 맹주님의 무서운 점이지. 이번 비무대회는 볼만할 거야. 강호에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죄다 모여들 테니까.”

“그래도 우리 부단주님보다 강한 놈은 없겠지?”

“모용신 단주님이 불참하신다고 했으니, 아마 부단주님이 우승할 거야.”

“하긴. 모용 단주님도 부단주를 밀어주려고 불참하는 거니까. 그럼 사실상 적랑단도 결국 우리가 다 먹는 셈이 되는 거군.”

“그렇지. 줄을 잘 선 우린 팔자 펴는 거고.”

“기대되는구먼. 그래도 지난 무연회하고는 좀 분위기가 다를 텐데.”

그러자 다른 적랑단원이 코웃음을 쳤다.

“뭐? 무연회? 자네 지금 농담하나? 무연회 같은 어린애들 싸움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래도 이번 무연회에서 강호신룡이라는 별호가 나오지 않았나? 이름이 아마 남궁천이었지?”

“흥! 강호신룡은 개뿔. 요즘은 별호를 너무 막 지어대서 탈이라니까. 예전엔 정말 신룡에게만 주어지던 별호가 이젠 개나 소나 신룡이 되고 있단 말이야.”

“그건 그래. 신룡 소리를 들으려면 적어도 입맹은 해야지. 아직 견습생밖에 안 된 애송이에게 신룡이라고 칭송하니, 그 녀석 콧대도 어지간하겠어.”

“흥! 그러다가 진짜 고수 만나서 뒈지도록 당해봐야 ‘아, 내가 강호신룡이 아니라, 도롱뇽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거지.”

“하하하! 말 되는구먼! 그나저나 그 도롱뇽도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건가?”

“제정신이면 불참할 거고, 뭣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면 참가하겠지. 그런 놈은 뒈지게 처맞는 수밖에 더 있나?”

“킬킬. 이왕이면 그 강호도롱뇽이 우리 부단주님한테 제대로 걸려서 혼찌검이 났으면 좋겠군.”

“어이쿠, 부단주님 성격상 그렇게 겉멋만 잔뜩 든 놈은 반신불수 만들지도 모른다네.”

“하하하하!”

청랑단원들의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울렸다.

한데 등골이 서늘한 것을 느낀 청랑단원 하나가 웃음을 뚝 그치고 뒤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귀왕이 살벌한 표정으로 장승처럼 서 있었다.

“뭐, 뭐요?”

“뭐긴 뭐겠소? 주문 받으려는 인간이지! 뭘 처먹을 거요?”

“허…… 욕쟁이 설정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드는군.”

“이 정도로 불쾌하면 우리 집에서 처먹질 말든가?”

귀왕은 정말로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랑단원이 다짜고짜 남궁천을 흉보고 있으니, 듣고 있기가 영 불편했던 것이다.

‘나는 욕해도 되지만, 다른 새끼들이 우리 주군을 욕하는 건 못 참는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전신에서 모종의 투기까지 살벌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종, 종류가 뭐가 있소?”

괜히 기세에 눌린 청랑단원 하나가 쭈뼛거리며 묻자, 귀왕이 한쪽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눈깔을 장식으로 달았나? 아니면 가죽이 모자라서 구멍 두 개만 뚫린 거야? 저기 차림표 안 보여? 아니면 대가리에 든 게 없어서 글자를 모르는 거냐?”

“…….”

살벌하게 튀어나오는 발언에 청랑단원들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이게 정말 욕인지, 아니면 설정인지 잠시 헷갈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귀왕이 다시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외쳤다.

“아니, 왜 다들 말이 없어? 이거 도롱뇽보다도 못한 새끼들이 밥 처먹겠다고 와서 눌러앉아 있는 거였어? 말도 못하는 주둥이로 먹을 건 들어가냐? 아, 빨리 정하라고! 뭐 처먹을 거야?”

“흐음. 아무리 설정이라지만 오늘 정도가 좀 과한 것 같군. 내가 여길 하루 이틀 온 건 아닌데.”

“쫄리면 뒈지시든가?”

“허! 어찌 이리 불친절하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가 지나치군! 사과하게!”

“일없다. 안 처먹을 거면 다들 꺼져라.”

“자네!”

“아, 왜 불러? 바빠 죽겠는데! 손님 받아야 하니까 썩 꺼져, 이 새끼들아.”

이쯤 되자 청랑단원들 모두 기분이 팍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설정이고 나발이고 저 안하무인 태도로 일관하는 귀왕을 혼내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차아앙!

급기야 청랑단원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중년인이 검을 뽑더니 귀왕을 겨눴다.

“어이, 너 뭐 하는 새끼야? 우리가 누군지 몰라?”

귀왕이 살벌한 눈으로 청랑단원을 노려보다가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커다란 식칼을 뽑아 들었다.

“나, 여기서 요리하는 새끼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요리 처먹을 자격도 없는 새끼들이고.”

“이 쳐 죽일……!”

다음 순간 청랑단원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도검을 뽑아 들었다.

객잔 한쪽이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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