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내 돈
뚝딱. 뚝딱. 쿵쿵!
남궁세가 장원은 확장 공사로 분주했다.
장원을 오가는 가신들보다 목수와 인부들이 더 많이 보일 정도였다.
남궁효는 삼 층 난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내심 혀를 둘렀다.
“하루가 다르다는 표현을 이럴 때 하는구나.”
정말 돈이 좋긴 좋다.
쏟아붓는 만큼 가장 정직한 결과를 뽑아내는 것이 돈이 아닐까?
마교의 습격 이후로 지지부진하던 확장 공사가 갑자기 활력을 띠고 신속하게 재개되고 있었다.
전각 중 일찍 공사가 들어간 것은 벌써 그 웅장한 외형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맞긴 하구나.’
하나 뭐든지 저절로 되는 건 없는 법.
이 모든 게 남궁천이니까 가능한 게 아닐까?
남궁효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제는 초겨울바람이 불어오는 쌀쌀한 날씨.
하나 여전히 하늘은 높고 구름은 예쁘다.
‘선아. 안심해라. 본 가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니. 아니, 다시 강호 중심으로 우뚝 설 테니. 이젠 그 누구도 네 아이를 원망하지 않는단다.’
그렇게 가만히 속내를 떠올리는데, 시종 하나가 다가와서 보고했다.
“각주님, 가주님께서 가회를 여셨습니다. 지금 참석하셔야 합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맹에서 온 소식 때문인 듯합니다. 적랑단주에 관한 것인데…… 소인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알겠네. 지금 가지.”
남궁효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맹에서 온 소식이라.
적랑단주라면 지금 공석일 텐데.
혹시 무림맹에서 가주에게 적랑단주 자리를 제시한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이지 괘씸한 일이 아닌가?
한때 가주님이 동료로서 맹주와 함께 싸운 적이 있지만, 지금은 엄연히 본 가의 가주가 아닌가?
상황이 급박하면 직접 찾아와서 읍소를 해도 모자랄 일이다.
‘아직은 무슨 일인지 모른다. 미리 흥분할 필요는 없지. 가슴은 뜨거워도 머리는 차갑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랑단주와 관련해서 본 가가 긴급회의를 열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게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사이 남궁효의 발길은 벌써 가주전에 다다라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가니 이미 많은 수뇌인사들이 자리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석에는 가주 남궁검이 앉아 있었고, 그 옆자리에는 소가주가 된 남궁천이 당당하게 자리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남궁효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젠 남궁천의 얼굴만 봐도 그저 기분이 좋아지는 남궁효였다.
조금 기다리자니 장원 곳곳에서 일을 하던 수뇌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커흠.”
남궁검이 나직이 기침을 흘리자, 두런거리던 목소리가 일시에 잦아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남궁검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을 부른 것은 맹에서 적랑단주 자리를 놓고 대책을 세웠기 때문이오.”
그러자 남궁효처럼 오해한 것인지, 남궁표가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설마 맹주 그 악랄한 자가 형님께 적랑단주 자리를 맡아달라고 한 겁니까?”
쾅!
그 말에 남궁설희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무례한 일이군요! 제까짓 게 맹주면 맹주지! 감히 본 가의 가주를 오라 가라 할 수 있다는 건가요? 도대체 오라버니를 뭐라고 생각하고…….”
“그만 앉아라.”
“가주님, 이건 그냥 좋게 넘겨선…….”
“그런 일은 없다. 말을 끝까지 들어보아라.”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그제야 남궁설희가 자리에 앉자, 남궁효가 쓴웃음을 흘렸다.
가슴은 뜨거워도 머리는 차가워야 하건만 그게 잘 안 된다.
남궁세가가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가주 직계들은 특히 감정적으로 변해 버리긴 했다.
좌중이 진정되자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직 맹에서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으나, 맹에 심어둔 본 가의 정보통이 소식을 전해왔소.”
“아, 녀석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군요.”
남궁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맹에 심어둔 정보원은 전부 남궁표의 사람들이었으니까.
무한에 머물면서 가장 신경 쓴 일이 바로 맹 내에 정보원을 심는 것이었다.
하나 남궁표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배치한 정보원은 이미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만 이렇게 빨리 소식을 전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불명회 덕분이었다.
맹 내 소식만큼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파악하는 불명회가 사람을 시켜서 남궁세가 정보원에게 내용을 전한 것이다.
이 역시 남궁천의 안배였지만, 남궁표는 그런 속사정까진 알지 못했다.
남궁검이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아직 공식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무림맹이 적랑단주 자리를 채우기 위해 비무 대회를 연다고 하오.”
“비무 대회를요?”
남궁설희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맹주의 성격상 이런 일이라면 최측근을 적랑단주 자리에 두고 부리지 않겠나?
그도 아니면 현재 청랑단주인 모용신을 적랑단주로도 임명해서 겸직을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명분은 충분한 일이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오로지 실력만 보고 뽑겠다는 것이니까. 지금껏 맹 내 요직은 연줄이 없거나 뒷거래가 없으면 힘들다는 말이 암암리에 전해져 오고 있는 상황. 한데 이런 파격적인 인사를 시행하겠다고 하니 많은 무인이 지원할 거요.”
“하긴. 지금 흑무련의 기세가 매서운 만큼 능력 검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긴 하죠.”
적랑단의 주요 임무는 맹외 세력과 다투는 것이다. 그런 만큼 현 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어찌 보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맹주가 다급히 인재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이번 인사 조치를 마냥 좋게 볼 수는 없겠지. 소가주와 나는 이번 비무 대회가 어쩌면 본 가를 견제하기 위한 술수가 아닌가 싶소.”
“……!”
“맹주는 흑무련이 설치는 와중에도 본 가를 노골적으로 견제하고 있소. 당가를 방문했을 때도 이미 맹주가 와 있었고. 마교가 침입했을 때도 맹주의 개입이 있을 것이란 정황까지.”
“대체 그 망할 늙은이는 뭐가 아쉬워서 본 가를 이리도 핍박하는 거죠?”
“천이가 대살성의 자식이니까.”
남궁검의 말에 남궁표가 벌떡 일어나며 씨근거렸다.
“그게 무슨 개소리랍니까? 천이는 본 가의 소가주입니다! 그리고 대살성의 자식이라니요? 가주님께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진천랑은 대살성이 아니었다고요! 오히려 맹주 그 늙은 구렁이가 대살성을 만들어 키운 꼴이 아닙니까!”
격분하는 남궁표를 보며 남궁천은 새삼 많은 게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자신을 흘겨보다 못해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남궁표가 아니었나?
한데 이제는 저리도 옹호를 하고 나서다니.
‘자고로 사람을 바뀌게 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데, 그걸 이 내가 해냈단 말씀이지. 기특하다, 나 자신.’
남궁천이 자기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고는 입을 열었다.
“숙조부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맹주에겐 그런 게 중요하진 않죠. 어쨌거나 제 생각은 그래요. 맹주는 절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어요. 이왕이면 본 가를 희생해서 무림맹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려고 하죠. 그래서 비무 대회를 빌미로 저를 유인하고 없애려는 수작이 아닐까 생각해요.”
“……!”
수뇌인사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엇보다 저 어린 소가주의 입에서 맹주의 음모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다는 게 놀라웠다. 또 한편으로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남궁표 역시 같은 생각인지 부글부글 끓는 표정을 짓다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도대체 이 집안 어른들은 뭘 하는 겁니까? 저 어린 소가주가 맹주를 상대로 홀로 싸우게 내버려 두다니! 맹주가 자기를 없애려고 한다는 말을 저리 담담하게 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이는 본인을 책망하는 마음도 포함시켜 토해낸 울분이었다.
수뇌인사들이 입을 다문 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힌다.
하나 남궁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본 가의 소가주입니다. 이 정도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 여력이 됩니다. 너무 분개하지 마세요. 감정에 휩쓸리다 보면 중요한 걸 놓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지지 말고, 그 감정을 가지고 놀아야 하지 않을까요?”
“……!”
“저는 가주님과 상의한 결과 이번 비무 대회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뭣이? 하면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가겠다는 것인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반대로 잡아먹힐 수도 있네!”
“그렇다고 여기서 머물 순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맹에 들어가서 요직을 차지한다면 본 가의 위상은 더욱 올라갈 거고요.”
“그게 유인책이라는 건 잘 알지 않는가? 그 맹주 능구렁이가 소가주를 어찌 해칠지 알 수가 없는 마당에……!”
“숙조부님.”
“끄음. 말하시게.”
“저 남궁천입니다. 천하제일룡의 아들이고, 천하대살성의 아들이며, 죽음에서도 부활한 남궁천입니다. 저, 쉽게 죽지 않습니다. 기회는 항상 위기 속에 숨어서 다가오는 법입니다. 세상 편하게 흘러 들어오는 기회라는 건 없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쟁취한 기회보다는 약할 겁니다. 이건 제게 쟁취해야 할 기횝니다.”
남궁천의 담담한 목소리가 좌중을 울렸다.
수뇌인사들 모두 입을 다물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돌아보았다.
저 어린 나이의 남궁천이 어쩌면 저렇게 성숙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을 겪으면 세상 이치에 달관하는 법인가?
좌중의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남궁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소가주는 뜻을 분명히 했소. 나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고. 소가주가 비무 대회에 참가한다면, 본 가는 다시 내가 앞장서서 이끌 생각이오. 남궁천은 적랑단주로서, 나는 본 가 가주로서 강호의 축이 될 생각이오. 다만 소가주의 거취는 중요한 문제라 가회를 연 것이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소?”
남궁검의 얼음 같은 눈빛과 달리, 수뇌인사들의 눈동자는 격렬하게 떨렸다.
그들은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하나는 남궁검이 벌써 남궁천을 적랑단주로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적랑단주는 무림맹 최고의 무력조직 수장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한데 그걸 이제 약관이 된 남궁천이 해낸다고?
도저히 상상이 안 되지만, 이미 남궁검은 남궁천의 우승을 장담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저런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확실히 남궁검은 남궁천에 대한 신뢰가 매우 깊었다.
저런 대쪽같은 남궁검을 이렇게 만들다니. 새삼 남궁천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묵묵히 회의를 지켜보던 남궁효가 가장 먼저 일어나며 포권했다.
“가주님과 소가주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어느새 남궁효의 눈빛에도 남궁검만큼이나 진득한 신뢰가 담겼다.
“저도 가주님 뜻에 따르겠어요.”
남궁설희도 말했다.
“저도 형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남궁표도 입을 열었다.
이쯤 되자 다른 수뇌인사들도 하나둘 일어나며 포권하기 시작했다.
“가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소가주의 발길이 닿는 곳에 본 가의 정의가 심어질 겁니다!”
“남궁세가 만세! 만세! 만만세!”
수뇌인사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동의하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그럼 소가주는 오늘부로 본 가를 떠나 무한으로 가거라. 무림맹 적랑단주가 될 것을 명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남궁천이 일어나며 포권했다.
고개를 숙인 남궁천의 입매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맹주, 판을 또다시 깔았으니 놀아줘야겠지. 어차피 당신 모가지는 두 달 안으로 내가 따야 하니까.’
모종의 살기를 느낀 것인지, 허리춤에 패용한 벽라검이 미약하게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