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내 돈
사람들의 부축을 받은 남궁효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물었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얼마라고요?”
“사백만 냥일 걸세. 천아, 그렇지 않으냐?”
“맞아요. 할아버지.”
사백만 냥?
할아버지?
남궁효는 물론 남궁설희와 남궁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번갈아볼 뿐이었다.
저 얼음장 같은 남궁검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다니.
아무리 소가주라지만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공과 사가 분명한 남궁검이다.
지금은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만큼 ‘가주님’이라고 불렀어야 옳다.
한데 뭐?
할아버지?
아니, 언제부터 그리 친숙한 호칭을 썼다고?
‘여독이 쌓여서 실수를 한 게로구나.’
남궁설희가 조금은 측은한 마음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보나 마나 남궁검이 불호령을 내릴 것이 뻔했기에.
아니나 다를까, 남궁검이 남궁천을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천아, 사람들이 있을 때는 가주라고 부르는 게 좋지 않겠느냐? 뭐…… 할아버지라는 것도 나쁘진 않다만.”
“…….”
“…….”
남궁설희를 비롯한 세 사람은 다시 얼음이 되고 말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 칼날 같은 남궁검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저리 조곤조곤 말을 건넨다고?
아니, 오히려 저 표정은 할아버지라는 호칭에 몹시나 만족한 것 같지 않은가?
도대체 여행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남궁효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나저나 사백만 냥이라니. 소가주, 정말 사백만 냥을 구해왔단 말인가?”
“예. 사백만 냥 가져왔어요.”
“대체 그 큰 금액을 누가 빌려주었단 말인가? 금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인가?”
“아닌데요?”
“그럼……?”
“벌어온 건데요.”
“그러니까 누구에게 빌려서…….”
“아니, 빌린 게 아니라 진짜 벌어온 거라고요. 갚을 돈이 아니라 그냥 내 돈이라고요.”
“내 돈…… 갚지 않아도 되는…….”
“예.”
“내 돈……!”
남궁효의 얼굴에 마치 부처 같은 미소가 맴돌았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내 돈이라는 것은.
다시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고 있을 때, 남궁설희가 얼른 그를 붙들었다.
“정신 차리게, 각주.”
“아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운 액수인지라.”
남궁효의 말에 남궁천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뭘 그 정도로. 그보다 작은 할아버지께서 돈을 구해 오셨다고요.”
“어…… 응? 으응?”
남궁표가 화들짝 놀라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남궁표를 보았다.
“정말 대단합니다. 세간의 인식이 아직 좋지만은 않을 텐데.”
“커험, 험. 아, 아닐세.”
그러자 남궁검이 지켜보다 여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얼마를 벌어왔나?”
“아…… 저…… 아닙니다, 가주님.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한껏 의기양양했던 남궁표의 어깨가 축 처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천은 자신의 딱 열 배를 벌어온 게 아닌가?
게다가 자신이 가져온 사십만 냥은 일종의 투자금 개념이었다. 그러니 온전히 벌어온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남궁천이 남궁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에이, 그러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얼마를 버셨는지.”
“그, 그게…….”
“예, 듣고 있어요.”
“커험. 사, 사십만…… 냥.”
“아…….”
“그렇구나.”
남궁천과 남궁검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이 중얼거렸다.
남궁표의 표정이 울상이 됐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래서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한데 남궁천은 이걸 또 다르게 해석한 것인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와아,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으응? 그, 그런가?”
“그럼요. 숙조부도 적지 않은 연세이신데, 스스로 용돈을 벌어서 쓰시다니요. 제가 많이 배워야겠어요.”
“용…… 돈……?”
“네. 사십만 냥이면 용돈으로 부족하지 않을 금액이죠. 혹시 갖고 싶은 게 있으셨어요?”
“아…… 그건…….”
남궁표가 우물거리자, 남궁천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게 뭐든 어때요? 스스로 용돈을 벌어서 개인 취향대로 수집을 한다는데. 아무튼 존경합니다.”
“그, 그래. 혹시…….”
“예?”
“그 돈…… 필요하진 않은가?”
“무슨 돈이요? 아, 숙조부께서 벌어 오신 돈이요?”
남궁표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저 그렇게 패륜아는 아니에요. 어떻게 제가 숙조부님의 용돈까지 빼앗겠습니까? 아무리 숙조부님께서 가문을 위하신다고 해도 그건 아니죠. 양심상.”
“그렇구나. 이 돈을 쓰면 패륜아가 되는 수준인 거구나.”
남궁표가 중얼거리자, 남궁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하나 저는 그 정도로 패륜아는 아닙니다. 그 돈은 예정대로 숙조부께서 갖고 싶은 걸 가지세요.”
“그래. 고맙다…….”
남궁표가 힘없이 말하고는 축 처진 어깨로 돌아섰다.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던 남궁효와 남궁설희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동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남궁표가 돌연 소리치더니 어디론가 휭 달려가는 게 아닌가?
그 뒷모습을 보던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에휴, 숙조부님이 한쪽 눈을 잃으신 후로는 꽤나 감상적이 되셨나 봐요. 가주님과 절 보고 반갑다며 눈물까지 흘리실 줄이야.”
“허허. 그러게 말일세.”
남궁효가 애써 웃음 지으며 남궁천의 말을 받았다.
남궁천이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중얼거렸다.
“역시 갑작스러운 보수 공사와 장례로 돈이 많이 부족했군요.”
“그렇게 됐네. 특히 본 가에서 희생당한 무인들 중 상당수가 처자식이 남은 경우라 그들이 먹고살 길을 만들어주다 보니…….”
“흐음. 그런 것까진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자네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남궁효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직은 어리지 않던가?
이제야 약관을 채운 나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모두 알기는 어려울 나이.
하나 남궁천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파의 삶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군. 죽은 자의 처자식까지 책임지다니.’
사실 도망자로 살 때는 오로지 ‘나’만 생각하면 됐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적이었으니까.
그 단순한 삶이 몹시 지치고 외로웠지만, 어느 틈에 익숙해진 것인지 이런 도의적 책임 같은 것들이 낯설기만 하다.
하나 이젠 정말 남궁세가 사람이다.
사고하는 것도 남궁세가다워야 하리라.
그것이 죽은 아들과 아내를 위한 길이기도 하니까.
“금정각주님.”
“말하시게. 듣고 있네.”
금정각주는 그저 반짝이는 눈동자로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이 공사 현장을 휙 둘러보고는 말했다.
“한 달 이내로 모든 공사를 끝낼 수 있게 인부를 투입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네. 즉시 그리 지시하지.”
“그리고 창응대 보충은 끝났습니까?”
“가신들을 재배치해서 가장 먼저 보충했네.”
“그렇군요. 고생하셨네요. 이제 다른 조직들을 다시 살려낼까 합니다.”
“다른 조직들을?”
“예. 우선 가주 호신위들부터 창궁단, 무애단, 무적대, 검신대, 창검대까지. 모두 살리고 싶습니다. 물론 창응대는 지금까지처럼 제게 직속될 것이고, 나머지는 각 설립 취지에 맞게 운영될 거고요.”
“그, 그런…… 유지는 가능하겠는가?”
“문제없습니다. 사백만 냥이면 한 동안 충분할 겁니다. 조직이 잘 굴러가면 부수입도 늘 테니까 괜찮습니다.”
남궁효가 남궁검을 슬쩍 돌아보았다.
이미 마차를 타고 오면서 두 사람 간에 얘기가 끝난 것인지 남궁검이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남궁효가 그 뜻을 대번 알아들었다.
이만한 결정도 남궁천에게 맡긴다는 것은 남궁검이 작정하고 가주 대행을 시켜보려는 의도이리라.
“또 필요한 게 있는가?”
“장보도의 장소에서 신병이기를 가져왔습니다. 장로님을 비롯한 수뇌부에 신병이기를 나눠줄 생각입니다. 그럼 그간 쓴 병기는 매각해서 자금을 확보했으면 합니다.”
“알겠네. 곧바로 추진하지.”
“정비가 되는 대로 각 조직이 임무를 시작하길 바라고, 각종 상권도 다시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건 내게 맡겨라.”
남궁설희가 불쑥 나서며 말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맙다.”
“……?”
“무사히 돌아와 줘서.”
남궁천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요즘 영감과 할멈들이 왜 이렇게 닭살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설희와 남궁효는 마냥 든든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 * *
“도대체가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군.”
맹주 묵천악이 나직하게 깔린 음성을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인 총관은 마른침만 삼켰다.
모든 일이 비틀어졌다.
그럼에도 맹주는 차분했다.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다.
저럴 때가 바로 정말 분노했을 때다.
지난번처럼 주먹을 휘둘러 탁자를 깨버린 수준을 넘어선 경우다.
“클클클.”
맹주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마교는 남궁세가를 쳤다가 제대로 깨졌고, 남궁천은 마신단을 완성해서 가졌으며, 당가는 배신을 했다.
그 바람에 적랑단은 와해됐고, 적랑단주가 공석이 되어버렸다.
북쪽에서는 흑무련이 점점 세력을 불려가면서 압박을 해 오는데, 정작 무림맹은 적랑단주가 부재한 상황.
거기에 남궁세가가 최근 세를 키워간다는 소식까지.
남궁천이 살곡을 찾아가 쑥대밭으로 만들고 몰살이라도 시킨 것인지 살수들에게선 일절 연락도 없다.
이제야 조금씩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든다.
남궁천은 잡초가 아니었다.
놈은 독초였다.
애초에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 이젠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다.
이렇게 된 이상 끝장을 볼 수밖에.
“총관의 생각은 어떤가?”
나직한 물음에 총관이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말했다.
“소신의 생각에는 어쨌든 남궁천이 가까이에 있어야 해결이 될 일이라 봅니다. 마신단도 제조를 하고 나서 어찌 보관하는지 알아야 할 테고요. 이러나저러나 남궁천, 그 아이를 한 번은 가까이에 두고 볼 일입니다.”
“한 번 만나본다고 그런 걸 다 알아낼 수 있겠는가?”
“없겠지요. 그러니 측근에 두고 자주 보아야 합니다.”
“하나, 그 녀석은 견습생 신분이지 않은가? 맹주인 내가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도 어색할 텐데.”
“한 가지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남궁천을 가까이에 둘 방법이.”
“그게 뭐…… 아…… 적랑단.”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얼거렸다.
총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적랑단주가 되면 맹주님과 필연적으로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니 적랑단주를 공개적으로 뽑는 비무대회를 진행하심은 어떤지요? 마침 가장 급하게 진행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그거 괜찮군. 하나 남궁천은 소가주가 되었는데, 적랑단주를 맡으려고 할까?”
“최근 가주 대행을 맡은 것으로 보이지만, 남궁가가 진정 위상을 드높이려면 본 맹과 연을 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아직 남궁검 가주가 건재하니 남궁천은 본 맹의 요직을 맡으려고 할 겁니다. 그편이 남궁가로서도 이득이 될 테고요.”
“일리 있군. 좋은 방법일세. 여차하면 비무 중에 죽어버릴 수도 있고.”
원래 묵천악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조급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번 비무대회는 후기지수들끼리 노닥거리는 싸움과는 질적으로 다를 겁니다. 온갖 강호 실력자가 다 참가할 가능성이 큽니다. 맹 내 최고 무력 집단의 수장을 뽑는 것이니까요.”
“그렇겠지. 거기에 생사비무도 인정하겠다는 조건을 붙인다면…….”
“남궁천이 사망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겠지요.”
“좋군. 좋아.”
맹주가 모처럼 흡족한 생각이라는 듯 무릎을 탁 쳤다.
“하면 진행해 보게.”
“분부 받들겠습니다.”
총관이 물러간 후 맹주의 눈빛이 뱀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남궁천…… 어디 끝까지 발버둥 쳐보아라. 악착같이 지르밟아주마. 네 아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