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장사는 이렇게
“아…….”
부곡주가 아는 체를 하자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뭘 좀 아는 게 있나?”
“일전에 한 번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뭘?”
“전대 마교 교주가 이곳에 비밀 창고를 만들었다고요. 전 곡주님이 그 교주와 친분이 있어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말도 들은 것 같습니다.”
“호오, 역시 사방살은 아는 것도 좀 많은가 보군. 그래서? 그 보물을 좀 찾아보긴 했고?”
“어딘지 알아도 물건을 볼 수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전임 곡주가 죽었으니 욕심 좀 생기겠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어째서?”
“보물이 있는 장소를 알지만, 꺼내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건 전대 곡주도 마찬가지고요.”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렇군. 하긴 천마가 개나 소나 퍼 가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겠지.”
“…….”
“왜? 기분 나빠?”
“아닙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내 등에 칼 꽂는 건 아니지?”
그렇게 불안하면 그런 소릴 하지 말던가?
부곡주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곡주님이 돌아가시면 저도 죽은 목숨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랄하지 마라. 살수가 목숨 아끼며 남을 죽이더냐? 너희들은 그저 도구처럼 생각 없이 죽일 뿐이지.”
‘아니, 그렇게 생각할 거면 독단을 먹이지 말든가!’
이번에도 욱하는 마음을 꾹 눌러 참은 채 물었다.
“하면 왜 제게 독단을…….”
“네놈은 딱 보니까 도구가 덜 된 것 같아서.”
“아…….”
“나보고 살려달라고 빌지 않았더냐? 그 인간다움에 마음이 동해서 살려준 거다.”
“감사합니다.”
“너에게 남은 한 줌의 인간다움을 앞으로도 잘 지켜라. 그게 보이지 않는 순간 넌 죽는다. 뭐, 그때가 되어서는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쓸 도구가 되어 있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죽겠습니다.”
“염병하네. 살수 새끼 입에서 별 거지 같은 말이 다 나오네.”
‘확실히 이 새끼는 장단을 맞추기가 어려운 놈이다.’
부곡주가 내심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면 곡주님께선 그 병장기들을 찾고 계신 겁니까?”
“역시 병장기였군? 그 보물들이.”
“대충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좋아, 어디냐? 안내해라. 장보도에는 이곳 대전까지만 나와 있어서 말이야.”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군요. 장소를 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곳에 들어가는 건 또 다른 문제…….”
“이리 와.”
남궁천이 검지를 펼치고는 까딱거리자, 부곡주가 입을 다물고는 얼른 남궁천 곁으로 달려갔다.
따악!
순간 남궁천이 뒤통수를 후려치며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넌 아는 것만 말해라.”
“죄송합니다, 곡주님.”
부곡주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곧 몸을 돌리고는 태사의 뒤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또다시 부곡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따악!
“윽! 아이씨! 왜 자꾸 때립니까!”
“호오, 이놈 성질 보소? 갑자기 인간다움이 너무 넘쳐흐르는데?”
“끄응. 죄송합니다. 자꾸 때리시니까 저도 모르게…….”
“왜 때리긴. 무인도 등 뒤에 있으면 짜증 나는 게 인지상정인데. 감히 살수 새끼가 내 등 뒤로 가려고 하니 때렸지.”
남궁천이 눈알을 부라리자, 부곡주가 얼른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갑자기 곡주님이 바뀌어서 정신이 좀 없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한 번만 더 내 뒤통수로 돌아가면 네 모가지를 돌려 버린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앞장서.”
남궁천이 턱짓을 하며 일어서자, 그제야 부곡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저도 뒤통수에 서면서.’
물론 턱 끝까지 차오른 불만을 감히 내뱉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긴 곳은 태사의 뒤로 꽤 너르게 펼쳐진 공간이었다.
벽까지 다가간 부곡주가 휘장을 손으로 낚아채더니 확 잡아당겼다.
찌이이익, 펄럭!
커다란 휘장이 찢어지면서 떨어져 내리니 놀랍게도 웅장한 석문이 나타났다.
마치 아수라를 연상케 하듯 괴수와 인간이 뒤엉킨 섬뜩한 광경이 양각된 석문이었다.
“이건 좀 놀라운데.”
남궁천이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장보도가 이곳 대전까지만 표시되어 있어서 어쩌면 비밀 창고를 찾는 게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이야?
석문의 적당한 지점에는 손을 넣기에 딱 좋은 틈이 있었다.
양각된 문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인간을 집어삼키는 괴수들 중 한 녀석의 입이었다.
예상대로 부곡주가 시커먼 아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에 손을 넣고 적당량의 기운을 주입하면 석문이 열린다고 합니다.”
“해봐.”
“예?”
“해보라고.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곡주님의 안위가 최우선입니다. 곡주님이 돌아가시면 저도…….”
“이 새끼 이거 거짓말이네.”
“아닙니다! 다만…….”
“다만?”
“곡주님도 포기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포기라는 단어를 몰라.”
“하지만 곡주님도 절대 저 석문을 열 수 없으실 겁니다! 오히려 손이 절단될 수도 있습니다!”
“왜?”
“그 석문은…… 천마의 기운에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도 저 문을 열 수가 없었던 겁니다.”
“호오. 과연 그렇군. 하긴 기관 장치라는 게 괜히 복잡해 봐야 소용없다니까. 생체 인식과 비슷하면서도 한 차원 높은 거로군. 죽은 자를 이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군요.”
“그런데 이거 나한테는 밥상이 차려진 셈이나 마찬가지인데?”
“예? 어째서…….”
부곡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천마의 기운이라. 내가 바로 천마의 기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예? 그게 무슨…….”
부곡주는 남궁천이 농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짧은 기간 알게 된 남궁천이지만, 실없는 소리를 할 때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느꼈기에.
한데 이번만큼은 남궁천도 빈 말이 아니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벌어진 틈으로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헉!”
화들짝 놀란 부곡주가 반사적으로 물러나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실제로 저곳에 손을 넣었다가 그대로 절단된 살수들이 수십 명이었다.
살수들이 신병이기를 탐내서 그랬냐고?
천만에.
살곡의 살수들은 철저하게 서열 중심일 뿐이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명령.
그 명령 앞에서는 누구나 그저 도구가 될 뿐.
그럼에도 수많은 살수들이 저곳에 손을 넣고 손목이 절단된 이유는 바로 살곡주 때문이었다.
전임 곡주는 저 석문을 열기 위해서 살수들의 절대복종을 이용한 것이다.
하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알아낸 것이 바로 천마의 기운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마교 출신 살수도 결국 열지 못한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남궁가에서 온 새파란 애송이가 지금 저 시커먼 구멍에 손을 들이민다고?
‘뒈지려고 작정했나?’
아! 어쩌면 손모가지만 잘리고 말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오산이다.
손모가지가 잘리는 것과 동시에 중독까지 당하게 된다.
아무리 남궁천이 만독불침이라지만 공력을 소모한 상황에서 극심한 상처로 곧장 중독이 되면 정말 위험하다.
만독불침지체도 어디까지나 건강한 상태에서 가능한 이야기다.
지치고 지쳐 면역이 약해진 자가 고뿔에 잘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전에 저곳에 손을 넣었던 살수들은 죄다 잘린 손모가지로 중독을 당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남궁천이 이대로 목숨을 잃게 되면…….’
자신의 목숨이 끝장 아닌가!
역시 안 된다.
정말 엿 같은 상황이지만, 저 싸움만 잘하는 단순무식 애송이가 허망하게 죽게 할 순 없다.
그랬다간 자신은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하게 생길 테니.
판단을 내린 부곡주가 얼른 달려가 앞을 가로막으며 섰다.
“안 됩니다! 곡주님이 돌아가시면…….”
“뭐?”
“본 곡은 누굴 따르겠습니까?”
물론 속마음은 ‘나도 죽잖아! 이 개새끼야!’라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쪽 표현이 나을 듯했다.
“새끼가 하루 만에 너무 인간다워졌네. 칭찬한다. 하지만 날 막을 순 없지. 비켜.”
“안 됩니다!”
“뒈질래?”
“차라리 절 밟고 가십시오!”
따악! 퍽! 퍽!
“크억!”
남궁천이 부곡주를 두드려 패면서 성질을 부렸다.
“거, 말을! 좀! 들어! 처먹어야지! 인간다움이! 지나치면! 도구가 나을 때도! 있는 법이라고!”
퍽! 퍽……!
분이 풀리도록 구타를 쏟아낸 남궁천이 한참 만에야 멈추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고 싶다면 눈치를 좀 더 키워라.”
시큰둥하게 말을 뱉은 남궁천이 마침내 석문의 시커먼 아가리에 손을 밀어 넣었다.
스윽!
“아……!”
눈이 퉁퉁 부어오른 부곡주가 그 모습을 보며 절망에 잠겼다.
‘이걸로 끝이다. 필시 저 새끼는 손모가지가 잘리고 뒈질 텐데. 그렇다면 내 목숨도 끝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저놈의 배후를 노려보는 건데.’
부곡주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찌나 세게 얻어맞은 건지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끄윽……!”
부곡주는 이제 남궁천의 등을 노려보면서 살인귀의 표정이 되어 있었다.
어차피 한 달 후에 죽을 목숨이라면, 남궁천을 제 손으로 죽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 것.
‘내가 마지막까지 네놈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 후회하면서 죽느니, 지금 내 손으로 널 쳐 죽이마!’
보아하니 남궁천은 벌써 괴수의 아가리에 손을 넣은 상황.
저 상태에서는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지속적으로 공력을 불어넣어야 할 테니까.
그러지 않으면 손이 곧장 썩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리라.
그렇게 모든 공력을 퍼붓고 나면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손모가지가 잘리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중독되는 것이고.
콰득.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부곡주가 단검을 손에 쥐었다.
‘죽인다, 이 개새끼! 멍청한 놈이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석문과 공력 대결하다가 뒈지게 생겼구나!’
결심을 굳힌 부곡주가 곧장 기합성과 함께 검을 휘둘러갔다.
“흐아아아압!”
그런데 그때.
“으음? 이거 대단한데? 어마어마한 공력이 나한테 쏟아져 들어오는데?”
“……으응? 뭐라고요?”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던 부곡주가 멈칫하고는 되물었다.
공력이 빨려 나가는 게 아니라, 쏟아져 들어온다고?
어째서?
저놈 진짜 괜찮은 건가?
허세가 아닌가?
부곡주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남궁천 옆으로 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확실히 남궁천은 예전에 희생된 살수들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에 여유로움이 넘쳤다.
이건 허세나 객기가 아니다.
진심으로 흡족한 표시다.
남궁천이 옆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온갖 잡기운이 섞인 걸 보니 여기에서 문을 열다가 희생된 자들 같군.”
“아…… 그런데 그 기운이 지금 곡주님께 흘러 들어간다고요?”
“그래.”
“그런데 이렇게 멀쩡한 겁니까?”
“뭐, 그렇지.”
말해 뭐 하겠나?
초견파공안으로 전생에 온갖 잡공을 익히고 다스린 남궁천이 아니던가?
그리고 천마의 기운이 필요하다고?
이곳에 오기 직전 남궁천은 따끈따끈한 천마신단을 복용하지 않았던가?
천마혼과 잠시나마 노닥거리기도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에 있으랴.
남궁천이 마치 뜨거운 물에 목욕이라도 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탄성을 흘렸다.
“아흐으. 좋다. 그런데…….”
“예, 곡주님!”
“너 방금 뒤에서 뭐 했냐? 살벌한 기합성이 들리던데?”
“아…… 그건…… 응원! 예, 응원입니다! 저도 뒤에서나마 기합을 실어보았습니다!”
부곡주가 빠르게 태세 전환하면서 생각했다.
‘이 새끼 진짜 천마의 기운을 품었어? 도대체 넌 뭐 하는 새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