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장사는 이렇게
남궁천의 대답에 세 사람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참이나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순간 류난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대전 안에 류난의 낭랑한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한참 웃어젖힌 류난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남궁천에게 말했다.
“확실히 재미있는 녀석이군. 도대체 어쩌다 살곡주가 된 건가?”
“뭐, 말하자면 긴 이야기라서.”
“그럼 궁금해하지 않겠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잘 생각하셨소.”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지강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진짜 곡주는? 죽인 겁니까?”
남궁천이 시선을 돌려 지강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흑무련 총군사 지강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반갑소.”
남궁천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역시 지강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마도 자신이 류난과 헤어진 후에 새로 사귄 벗이리라.
‘저 류난이 총군사로 삼을 정도면 어지간히 똑똑하단 말이겠지. 뭐, 그에 비하면 눈치가 좀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아니, 류난과 저 여신우를 철석같이 믿는 건가?’
하긴 그렇다면 저렇게 당돌하게 대화 중에 끼어드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진짜 곡주요.”
“아…… 그럼 전대 곡주는 죽었습니까?”
지강이 다시 묻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죽었소.”
“역시 그렇게 됐군요.”
지강은 짧은 순간 상황 정리가 끝난 듯했다.
그가 옆에 선 류난을 힐끗 돌아보았다.
일이 꼬인 것 같은데 이제 어쩔 거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류난이라고 딱히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경우는 그들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기에.
원래 류난은 남궁천을 다시 만나면 반드시 죽일 생각이었다.
살려두면 화근이 될 거라고 여겼기에.
하지만 이번 만남에서는 그 계획을 실현하기 어려워졌다.
이곳은 살곡이 아닌가?
대전 내에서도 살기가 팽팽하게 느껴진다.
살수들을 곳곳에 은신시켜서 세 사람을 지켜보게 한 것이리라.
류난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과연 대단하군. 상황을 보아하니 살곡을 장악한 게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새 이 정도로 통솔하다니.’
자고로 생각이 없는 자들을 이끄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그런데 그걸 남궁천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걸 보면 마치…….
“진천랑 같군.”
류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야기는 할 것도 없소. 나는 나요.”
“그렇지. 하나 오늘날 자네가 있는 것 또한 자네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지 않겠나?”
“어쨌거나 뒈진 사람은 이제 그만 얘기하고.”
“허허, 패륜아로군.”
류난이 내뱉는 말과는 달리 사람 좋은 미소를 짓자, 남궁천이 내심 코웃음을 쳤다.
패륜아는 무슨.
그냥 내가 내 얘기를 하는 건데.
생각을 갈무리한 남궁천이 천천히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래서 본 곡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흐음.”
지금 이 순간 남궁천은 진천랑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묻고 있었다.
그렇기에 류난은 더욱 오래된 벗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침음을 흘린 류난이 결심을 굳힌 듯 남궁천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의뢰를 부탁하러 왔소.”
“련주님.”
지강이 움찔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애초에 의뢰를 맡기기 위해 온 것은 맞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진짜 의뢰를 맡기다니?
그런 의문을 다분히 담은 시선으로 보았으나, 류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긋 웃을 뿐이었다.
남궁천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의뢰는 무엇이오?”
“말할 수 없소.”
“무슨 소리요? 의뢰를 맡기러 왔다면서.”
“살곡주가 당신일 줄 몰랐거든.”
“나라서 문제가 되나?”
“문제가 될 수도 있지.”
“그럼 그냥 돌아가시던가?”
“하하하하!”
한마디도 지지 않는 남궁천을 보면서 류난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이쯤 되자 지강과 여신우는 그저 류난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련주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면 이미 심중에 모종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들이 나서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닮았다니까. 마치 진천랑이 환생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치 빠른 새끼.’
남궁천이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태연히 대꾸했다.
“알겠으니까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돌아가시오.”
“좋소. 의뢰를 말하겠소.”
“그 전에.”
“뭐요?”
“보수는?”
남궁천의 질문에 류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수? 의뢰 내용은 들어보지 않고?”
“우선 보수부터.”
“흐음. 천만 냥 드리지.”
류난의 말에 놀란 사람은 오히려 지강이었다.
그가 딸꾹질을 하면서 류난을 돌아보았다.
“련주님!”
“괜찮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실패하면…….”
“다시 찾아오면 되지.”
“아…….”
지강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은 내심 기분이 나빠졌다.
‘저걸 그냥 인정한다고? 날 뭐로 보는 거야?’
하지만 확실히 천만 냥은 눈이 뒤집힐 만한 액수였다.
그 정도면 흑무련 전체 예산의 삼 할은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의뢰라는 건…….
‘역시 그건가?’
남궁천이 어딘지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의뢰는 뭐요?”
“흐음.”
류난이 잠시 침음을 흘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맹주를 죽여주시오.”
역시.
남궁천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러지 않아도 맹주는 언젠가 자신이 죽일 인물이다.
한데 이젠 복수도 이루고 돈도 벌게 생겼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이거 살곡을 장악했으니 일석삼조, 일석사조인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해드리지.”
“해주겠다고?”
이번엔 류난이 놀랐다.
사실 의뢰 내용을 말하면서 남궁천이 어찌 나올지 그 반응을 보고 싶었다.
한데 이렇게 순순히 수락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남궁천은 제 아비와 달리 맹주의 수족이지 않던가?
한데 지금 맹주를 적극적으로 죽이겠다는 뜻인가?
류난이 눈살을 가늘게 여미고는 물었다.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던 게 아니었나?”
“거, 말을 통일합시다. 이왕 내가 곡주가 되었으니 존댓말을 하시던가?”
“후후. 그러지. 일전에는 맹주의 수족으로 나와 맞섰던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니었소?”
“맹주의 수족이어서가 아니라, 내 필요에 의해서 맞섰던 거고. 지금도 역시 나의 필요에 따라 의뢰를 수락한 것일 뿐.”
“우리 의뢰를 수락한다는 걸 어찌 믿지?”
“못 믿겠으면? 여기서 한판 하시려고?”
남궁천이 말을 뱉자마자 대전 내부가 팽팽한 살기로 가득 찼다.
범인이라면 아마 질식해서 쓰러지리라.
류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궁천을 바라보았다.
‘그새 더 강해졌군. 역시 위험인자야. 하지만…….’
남궁천이 맹주를 죽여준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지 않겠나?
저 예리한 칼을 맹주에게 겨눌 수 있다면…….
숨 막힐 듯한 살기가 계속 쏟아지자, 여신우가 천천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나 곧 류난이 손을 뻗어 그를 말없이 제지하고는 입을 열었다.
“좋소. 그대를 믿지. 반드시 맹주를 죽여주시오.”
“대신 기간을 좀 넉넉하게 줘야 할 것 같은데. 알다시피 맹주를 죽이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서.”
“얼마나?”
“최소 일 년은 걸릴 것 같은데.”
“그럼 의뢰는 없던 걸로 하지. 우린 이만 돌아가겠소.”
“에헤이, 거, 사람들 참. 성격 급하긴. 넉넉잡아서 일 년이라는 거고. 좀 서두르면 더 빨리 할 수도 있지.”
“그게 얼마나?”
“음…… 육 개월 정도?”
“역시 우리가 직접 해보는 게 낫겠군.”
“그게 쉽지 않다니까. 단지 죽이는 거라면 쉬울지도 모르지. 하나 그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맹이 호락호락해 보여도 깊이 파고들면 꽤 골 아픈 곳이오. 살수의 가장 기본자세는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고 후환이 없어야 한다는 거요.”
“그래도 기간이 너무 길어. 그냥 돌아가겠소.”
“알았소, 알았소! 거, 성질머리하곤. 삼 개월! 더 이상은 우리도 안 돼!”
“흐음. 삼 개월이라. 한 달로 끊어주시오.”
“미쳤네. 미쳤어. 맹주 죽이는 게 동네 똥개 삶아 먹는 것쯤으로 아시오? 정 그럼 직접 하시든가?”
남궁천도 이젠 배짱을 튕겼다.
결국 이번엔 류난이 한발 물러났다.
“좋소, 그럼 두 달.”
“흐음. 좀 빡빡한데.”
“그럼 우리도 알아서 해결할 수밖에.”
“에이, 좋소! 두 달로 해드리지. 대신 이천만 냥!”
“돈 없소.”
“그럼 안 해.”
“수고하시오.”
말을 마친 류난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남궁천이 얼른 손을 뻗었다.
“좋아! 천오백만 냥! 더는 우리도 양보할 수 없소! 그리고 오백만 냥은 선급금!”
“흐음.”
류난이 걸음을 멈추고는 여신우와 지강을 보았다.
두 사람은 그저 류난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이지 대단한 신뢰였다.
류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꾸했다.
“흐음. 그렇다면 우리도 조건이 있소.”
“뭐요?”
“곡주께서 직접 해주시오.”
“내가?”
“어렵겠소?”
어려울 게 있겠는가?
애초에 맹주는 자신의 손으로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남궁천은 짐짓 고민하는 척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예상 밖의 조건이지만 받아들이지. 그럼 선급금 오백만 냥은?”
“드리지.”
‘좋았어!’
남궁천이 순간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는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곧 덤덤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했다.
“아, 이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지 몰라. 좀 손해 보는 장사 같은데.”
“본 련도 생각보다 많은 지출을 감당한 거요.”
“뭐, 서로 사정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아무튼 그 의뢰는 수락하도록 하겠소.”
“그럼 잘 부탁드리오.”
“그냥 가시려고? 하룻밤 묵고 가시지.”
“갈 길이 머니 서두르겠소. 뭐, 오래 있고 싶은 곳도 아니고.”
류난이 곧장 몸을 돌렸다.
어느 누가 살곡에서 하룻밤을 묵고 싶을까?
살수가 바글거리는 곳에서.
남궁천이 명을 내렸다.
“일살은 고객님 배웅해주어라.”
“복명!”
일살이 얼른 달려와 세 사람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처음 데려올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이 대전을 나가자,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부곡주가 스르르 나타나더니 남궁천을 향해 포권했다.
“속하, 감동했습니다! 곡주님의 수완에 그야말로 넋을 잃었습니다!”
“봤지? 장사는 이렇게 하는 거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역시 곡주님은 본 곡의 홍복입니다!”
이번만큼은 아첨이나 아부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표현이었다.
남궁천도 이번에는 뒤통수를 때리진 않고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여길 좀 더 털어볼까?”
“예?”
부곡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내가 말 안 했었나? 나 원래 여기에 뭘 좀 가지러 왔거든.”
“그게 뭡니까?”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마교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