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장사는 이렇게
“어…… 예?”
살수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곡주는 벽에 처박힌 채 끔찍한 시체가 되어서 축 늘어져 있었고, 사방살들은 전부 여기저기 처참한 몰골로 널브러져 있지 않은가?
한데 유일하게 멀쩡하게 살아남은 북방살이 남궁천을 가리켜 곡주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북방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닥쳐라. 오늘부터 나는 부곡주다.”
“예?”
“너는 앞으로 동방살이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만 보던 남궁천이 돌연 부곡주의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쳤다.
따악!
“윽!”
“이 새끼가 누구 마음대로 임명을 해? 네가 곡주야?”
“죄송합니다. 저 녀석이 제 다음 서열인지라.”
“사방살 따위는 없다. 그냥 간편하게 서열로 부른다. 일살, 이살, 삼살…… 이렇게.”
“알겠습니다.”
부곡주가 깍듯하게 대꾸하자, 지켜보던 살수는 그저 모골이 송연했다.
남궁천이 그런 살수를 보면서 비수 한 자루를 꺼내 던졌다가 받길 반복했다.
“일살이 눈치가 느리네. 도대체 서열을 어떻게 정하는 거야? 모름지기 살수면 척 보고 딱 알아야 하는 것 아냐?”
“아…….”
그제야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살수가 얼른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박았다.
쿠웅!
“곡주님을 뵙습니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그래. 조금만 늦었으면 일살이 다른 사람으로 바뀔 뻔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너희들 말이야. 살수 주제에 삶에 너무 집착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은 자존심도 없냐? 이렇게 쉽게 바뀐 주인을 인정하고?”
“살수라서 그렇습니다!”
“살수라서?”
남궁천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일살이 꽤 살수다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삶에 미련이 있어서라기보단 주인이 누구든 딱히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호오, 충성은 없고 서열만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과연. 그건 살수답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아까 하던 보고 마저 해봐. 누가 찾아왔다고?”
“아! 흑무련주가 찾아왔습니다.”
“흑무련주가?”
“예. 지금 살곡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진법을 파훼하진 못한 것인지 더 이상 들어오진 않고 있습니다.”
“흐음.”
남궁천이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남궁검이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공교롭게 됐구나. 어쩔 생각이냐?”
“손님이 찾아왔으면 만나야겠죠? 문전박대는 좀 그렇잖아요?”
“하긴. 문전박대한다고 순순히 돌아갈 상대도 아니긴 하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살을 돌아보았다.
“손님을 정중히 모셔라. 아, 그리고 적랑단원들은 어디에 있지?”
“대전 밖에서 여전히 본 곡과 대치 중입니다.”
“그들도 손님이다. 지객당으로 모셔라.”
“저어…….”
“뭐야? 벌써부터 반항인가?”
남궁천이 눈을 부라리자, 일살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그게 아니라, 본 곡에 지객당이 없습니다.”
“왜?”
남궁천이 천진하게 반문하자, 남궁검이 달래듯 말했다.
“천아, 여긴 살곡이다. 의뢰를 받아도 외부에서 받지, 본거지에서 받을 일은 좀처럼 없다. 당연히 손님이 있을 이유도 없겠지.”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남궁천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갸웃거렸다.
“가만. 그럼 흑무련주는 어떻게 본 곡을 알고 찾아온 거야?”
“그건 저희도 잘…….”
“이거 뭐 이렇게 어설퍼? 개나 소나 다 찾아오는 곳이 무슨 비밀 장소야?”
“죄송합니다.”
일살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본심은 ‘흑무련주가 개나 소는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아무래도 새로운 곡주는 성질머리가 더러워 보였기에.
남궁천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무튼 당가에서 온 손님들을 안전한 곳에 모셔라. 괜히 흑무련주와 마주치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정성을 다해라.”
“물론입니다.”
“다른 살수들 들여보내서 여기 시체들도 좀 치우고. 실내가 이게 뭐야? 아무리 살곡이라지만 시체가 이렇게 나뒹굴면 보기도 좋지 않잖아?”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서둘러.”
“복명!”
일살이 고개를 숙이고는 얼른 몸을 돌려 나갔다. 동시에 그는 생각했다. 새로운 곡주는 확실히 성격이 지랄 맞다고.
대전에 남은 남궁천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부곡주를 보고는 물었다.
“저 새끼가 갑자기 눈깔이 돌아서 허튼짓을 하진 않겠지?”
“그럴 머리가 없는 녀석들입니다. 그저 상명하복만 있을 뿐.”
“그래, 너희들은 서열이 전부지. 그냥 살인하는 도구일 뿐.”
“옳습니다.”
“좋아. 어쨌거나 곡주가 바뀌니 바로 손님이 찾아오는군. 그것도 아주 큰 손님이. 이건 살곡에도 좋은 징조가 아니겠느냐?”
“물론입니다. 곡주님은 본 곡의 홍복이십니다.”
따악!
“윽!”
남궁천이 다시 한번 부곡주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씹어뱉듯 말했다.
“이 새끼 이거 이제 보니 순 아첨꾼이네. 너 살수 아니지?”
“그저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그래, 그건 그렇지.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넘어가 주마.”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예, 곡주님!”
* * *
“흐음.”
여신우가 옥빛 구슬을 보면서 침음을 흘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지강이 목을 길게 빼고는 물었다.
“어때? 뭐가 좀 보여?”
“아니. 모르겠네. 아까하고 똑같다.”
“하아. 도대체 언제쯤 이 길을 벗어날 수 있는 거야?”
“그건 머리 좋은 네가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머리가 좋다고 모든 진법을 다 뚫어볼 수는 없는 법이라고.”
“어쨌든 옥안영오로 봐도 알 수가 없다. 온통 나무에 가려져서 길이 보이지 않아.”
여신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까마귀 울음소리와 함께 옥안영오가 내려섰다.
까아악!
푸드드득!
독수리처럼 커다란 날개를 퍼득거리며 여신우의 어깨에 내려앉는 옥안영오.
지강이 이맛살을 푹 구겼다.
“역시 까마귀는 까마귀군.”
“옥안영오는 보통 까마귀가…….”
“네에, 네.”
지강이 말을 싹둑 자르고 돌아서자, 여신우의 전신에서 미약한 살기가 맴돌았다.
지강이 류난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매달렸다.
“련주님. 저 흉측한 녀석이 절 죽이려고 합니다.”
“그만 좀 싸워.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투닥거릴 거야?”
류난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말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난은 한옆의 바위로 걸어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길이 아닌 곳은 가지를 마라.”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지강의 물음에 류난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갈 길이 안 보이니 일단은 가만히 있어 보자고. 이 정도 헤맸으면 살곡도 우리 존재를 알았을 테지. 흥미가 있으면 오지 않겠나?”
“흥미가 없으면요?”
“있어. 너 같으면 지금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흑무련주를 문전박대하겠어?”
“으음. 전 안 그러겠지만, 모든 사람이 저 같진 않으니까요.”
“뭐, 정 우릴 받아주지 않으면 이 숲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지. 요즘처럼 건조한 가을 날씨에는 불도 잘 붙을 거야.”
류난이 짐짓 누군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지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어차피 의뢰도 맡기지 못할 바엔 그냥 확 성질 한번 부리는 거죠, 뭐.”
그때였다.
놀랍게도 눈앞의 나무들이 저절로 스르르 움직이는 것 같더니 길이 열리는 게 아닌가?
까아악!
옥안영오도 그 광경이 신기했던지 한 차례 날개를 퍼덕이며 울어댔다.
지강이 감탄한 표정으로 류난을 돌아보았다.
“역시 련주님이십니다. 바로 반응이 오는데요?”
“운이 좋네.”
류난이 빙그레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볼까?”
세 사람이 열린 길목을 따라 자박자박 걸어갔다.
신기하게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없던 길들이 생겨났다.
착시 현상을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기문둔갑술을 사용하여 환영을 준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니 마침내 양쪽으로 깎아지른 암벽이 나타났고, 암벽에 파묻힌 듯 자리 잡은 전각들이 보였다.
“와아, 여기가 살곡이군요.”
“생각보다 크군.”
여신우의 말에 지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살수들이 사는 곳은 뭔가 더 음침한 동굴 같은 곳이리라 생각했는데.”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군사는 생각이 짧다.”
여신우의 말에 지강이 내심 발끈했지만 더 따지지는 않았다.
마침 흑의 경장 차림의 사내가 세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내는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세 사람을 안내했다.
그는 바로 일살이었다.
류난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군.”
“흑무련주님이 아니십니까?”
“호오, 역시 살곡이군. 이미 나를 알고 있다니.”
“곡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왜 온 것인지는 알고 있나?”
“모릅니다. 저는 곡주님의 명을 받들 뿐.”
“곡주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저로선 잘 모릅니다. 다만 한번 만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살의 대꾸에 류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살곡주가?”
“예. 조금 전에 그렇게 들었습니다.”
“어디서 날 만난 거지? 그럼 나도 아는 자인가?”
“거기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류난은 점점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높은 계단을 올라서 암벽에 박힌 듯한 커다란 전각 앞에 멈췄다.
일살이 전각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곡주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위계 서열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류난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살수 집단은 서열이 명확하군. 충성심도 없는 살수들이 이런 서열을 유지한다는 건 언제 봐도 놀라운 일이야.’
충성심 또한 감정의 일부다.
하지만 살수들은 임무 중에 감정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살수들은 기본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 도구와 같은 존재들이다.
도구는 충성심이라는 게 없다.
그저 상하 관계만 있을 뿐.
감정을 배제한 인간에게 서열을 지키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살수 집단의 가장 큰 숙제다.
반면 류난은 감정을 가진 인간들을 다루는 것에 능숙하니, 살수 집단이 그저 신비롭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모셔라.”
마침 전각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세 사람이 동시에 놀랐다.
‘꽤 젊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살곡주는 나이가 상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한데 지금 들린 목소리는 앳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젊지 않은가?
여신우가 또 약 올리듯 말했다.
“우리 총군사께서 오늘 여러 번 망신을 당하시는군. 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니까 힘내라고.”
그렇게 무심히 걸음을 옮긴 세 사람.
그런데 그들은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는……?”
여신우가 흠칫거리고는 태사의에 앉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류난과 지강 역시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여신우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물었다.
“너, 뭐냐?”
남궁천이 태연히 웃으며 답했다.
“나, 살곡주요. 어서들 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