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이런 거였어?
쨍그랑!
창가에 둔 사기 그릇이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어엇!”
지강이 깜짝 놀라서 달려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걸 어떡해? 이거 영 불길한데? 왜 하필 접시가…….”
까악! 까아악!
그러거나 말거나 그릇을 깨트린 옥안영오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제야 여신우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서는 옥안영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옳지. 옳지. 착하지.”
“착하긴 뭐가 착해? 지금 그릇이 깨졌잖아.”
지강이 부루퉁한 얼굴로 따지자 여신우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보면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미 깨진 걸 어쩌겠나? 다시 붙일 수도 없는데.”
“허! 까마귀가 사람보다 더 나은 대접이네.”
“보통 까마귀가 아니지. 이 녀석은 영물이니까.”
“끄응.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둘이 닮았다고 편 들어주는 거야?”
“진정하라고. 어차피 그깟 그릇이 깨졌을 뿐이잖아.”
“아니, 뭔 까마귀가 사기그릇에 먹이를 주질 않으면 처먹질 않냐고!”
“군사께서 말이 거치시군. 말했다시피 이 녀석은 평범한 까마귀가 아니니까.”
“두 번 비범했다간 옥그릇에 먹이를 달라고 하겠네.”
“원래 그게 정석이야. 그래서 옥안영오지.”
여신우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옥안영오가 더욱 머리를 비벼댔다.
여신우가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예쁜 녀석.”
“내가 아무리 예쁘게 생겼어도 군사에게 그런 말은 실례야. 게다가 난 남자고.”
“너 말고 이 녀석.”
“아무튼 이건 불길한 징조야. 그 무시무시한 살곡을 찾아가는 중요한 날에 하필 그릇이 깨지다니.”
지강이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깨물자, 문득 객실 문이 열리면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우리 총군사께서 오늘 영 심기가 불편하군?”
“련주님. 그릇이 깨졌다구요.”
“세상에 모르는 게 없을 만학수사께서 어찌 이런 미신 따위에 의존을 하실까?”
류난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지강이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원래 저처럼 똑똑한 사람은 다른 뭔가를 의존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 법이라고요.”
“와아. 지금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뭐, 사실은 사실이지. 하지만 그럴 땐 차라리 다른 사람을 믿어 보는 게 어때?”
“사람 중에서는 아직 저보다 월등히 똑똑한 사람을 못 봐서요.”
“갈수록 어마어마한 말을 쏟아내는군.”
“사실은 사실이죠.”
지강이 그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뻔뻔하게 대꾸했다.
류난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믿어도 되지 않을까?”
“련주님은 믿지만…….”
“그럼 괜한 그릇 깨진 것 따위에 불안해하지 말라고. 살수들이 바글거리는 곳이라지만, 우리에겐 부련주가 있잖아?”
류난이 여신우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여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련주. 난 그 직책이 싫다니까. 그냥 호위 같은 걸로…….”
“에이, 호위보단 그래도 부련주지.”
“애초에 부련주라는 직책이 좀 이상하지 않나? 입에 썩 달라붙지도 않고.”
“그럼 부교주라고 할까? 흑무교로 바꾸고?”
류난의 천진한 제안에 여신우와 지강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강호에 피바람을 몰고 다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하긴. 내가 그런 조직에서 군사를 맡고 있다는 것부터 웃지 못할 일이지만.’
지강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데 류난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자자, 그깟 까마귀 때문에 괜히 우울해지지 말자고. 그래 봐야 다 사람 사는 곳인데. 안 그래?”
세상에 살곡을 가리켜 다 같은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하는 인간은 아마 련주밖에 없으리라.
마침 여신우가 눈살을 푹 찡그리고는 말했다.
“련주. 이건 보통 까마귀가 아니다.”
“그리고 까마귀 때문도 아니고요. 중요한 건 접시가…….”
지강이 다시 끼어들자, 류난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린 어디까지나 고객이라고. 뭘 어쩌겠어? 고개 빳빳하게 들고 가도 돼.”
“흐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살곡주는 맹주와 관계가 꽤 깊었던 것 같은데. 우리 의뢰를 받아들일까요?”
“그 보고서는 나도 읽어봤어. 내 생각을 말해달라는 거라면 괜찮다고 봐. 그러니까 살곡에 가는 거지만.”
“근거는요?”
“믿는다면서 그냥 믿진 않는군.”
“제가 믿는 련주님의 근거를 듣고 싶을 뿐이죠.”
지강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하자, 련주가 피식 웃었다.
“난 지강이 이래서 마음에 든다니까.”
“그래서 근거는요?”
“이 집요함. 역시 좋아.”
“설마 근거가 없는 건 아니죠?”
지강이 눈을 흘기자, 류난이 파안대소를 하다가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곡주는 전대 맹주 호위 출신이지. 그런데 현 맹주와 관련이 깊은 데다 맹과 여러 가지 은밀한 일을 진행했다는 것은 서로 비슷한 뜻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봐.”
“그렇다면 더욱 문제인데요?”
“아니. 그렇기에 지금이 적기야.”
“죄송하지만 자꾸만 근거를 여쭙게 되는군요.”
“생각해 봐. 비슷한 철학을 가진 자가 맹주로 추대가 되었고, 지금껏 강호를 잘 이끌어 왔지.”
“그랬죠.”
지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류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곡주는 맹주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이룰 가능성을 보았을 거야. 그러니 이런저런 은밀한 협조를 해왔을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강호 정세가 어떤가?”
“개차반이죠.”
“그래. 같은 철학을 가진 곡주로서는 맹주의 실패가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고 그 실망감 또한 클 거야. 한마디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상황이겠지. 그런데 이 개차반을 만든 신흥 세력이 솔깃한 제안을 해온다면?”
“흔들릴 가능성이 있긴 하겠군요. 하지만 련주님의 말씀대로면 련주님의 철학을 궁금하게 여길 텐데요.”
“그럼 그 뜻에 맞춰주면 되지. 우리가 아는 맹주는 단순하지 않은가?”
“악은 악으로 다스린다.”
“그래.”
“그럼 나중에 련주님의 철학이 다른 걸 알게 된다면…….”
“그 전에 죽여야지.”
“아…….”
“살곡은 쓰레기 집단이야. 제아무리 뜻을 품고 있다지만 결국 쓰레기는 쓰레기. 한 번 써먹었으면 이젠 소각해야지.”
“련주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지강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역시 련주는 무서운 자다.
물론 만학수사라는 별호를 가진 지강은 당대 지자로서는 최고를 다툰다.
하지만 류난은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공감력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뛰어난 사람이 이럴 땐 또 칼날처럼 무정하다니까.’
물론 바로 그 부분을 지강이 가장 존경하고 있었지만.
“자, 너무 고민하지 말고 가보자고.”
“하지만 살곡의 본거지를 직접 방문하는 건 역시 다시 생각해도…….”
“괜찮다니까. 정 띠껍게 나오면 이참에 싹 정리해 버리자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뱉는 류난을 보며 지강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 곁에 있던 여신우가 목을 우두둑 꺾으며 말했다.
“난 애초에 살곡을 이용하는 것부터가 별로. 마음 같아서는 가는 길에 바로 정리해 버리고 싶은데.”
결국 지강이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이런 자들과 함께 있는데 내가 뭘 걱정하는 거야?’
지강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시죠. 두 분.”
* * *
“묻잖아. 네가 다음 서열이냐고.”
남궁천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서늘하게 깔렸다.
북방살이 오들오들 떨면서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그, 그렇습니다.”
북방살은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궁천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곡주와 바둑을 두고서도 산 자는 전대 교주를 제외하곤 없었으니까.
한데 오히려 곡주가 죽었고, 사방살 중 세 명이 즉사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대전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살수들은 아직도 이 상황을 모르고 있으리라.
무엇보다 자신이 왜 이렇게 떨고 있을까?
그간 강한 상대를 한두 번 만나왔던가?
과장을 좀 보태자면 초절정고수를 밥 먹듯 죽여 왔다.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들이라도 살곡의 표적이 되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데 남궁천은 살아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
생전 처음 당면해 보는 기운이다.
“오늘부터 살곡의 주인은 나다.”
남궁천의 입에서 선뜻 이해 못 할 말이 떨어졌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이내 칼날 같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아, 예! 곡주님을 뵙습니다!”
“좋아. 너는 앞으로 부곡주를 맡아라. 내가 부재시에는 곡주 대행에 충실하도록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그간 받은 의뢰는?”
“없습니다.”
부곡주가 된 북방살의 대답에 남궁천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없다고?”
“예, 곡주님.”
“어째서?”
“특령이 내려진 경우에는 모든 의뢰 수용을 중단합니다.”
“특령?”
“맹주의 의뢰를 받았을 때입니다.”
“아…… 나를 죽이라는 거?”
“죄송합니다.”
“그럼 오늘부터 다시 의뢰를 받도록 해. 단, 의뢰 수락 여부는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직접 결정한다. 그러니 모든 의뢰는 보고하도록.”
“곡주님이 안 계실 때는 어떻게 보고하면 됩니까?”
“좋은 질문이다, 부곡주.”
“감사합니다.”
남궁천은 무한의 귀왕객잔을 찾아오게 했다. 부곡주가 귀왕객잔에 방문하면 귀소이들이 다시 불명회에 알리게 될 테고, 최종적으로 불명회주가 의뢰 수락 여부를 결정하게 되리라.
‘회주라면 믿고 맡길 만하지.’
남궁천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부곡주가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툭.
남궁천이 시커먼 단환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여전히 엎드려 있던 부곡주가 바닥에 떨어진 단환을 보다가 남궁천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엇인지요?”
“독단이다.”
“독단…….”
“처먹어.”
“……!”
“걱정 마. 당장 뒈지는 건 아니니까. 한 달에 한 번씩 해독제를 먹으면 살 수 있다.”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한 말 그만하고 처먹어라.”
“곡, 곡주님…….”
“뒈질래, 처먹을래?”
“……!”
결국 부곡주가 눈을 질끈 감고는 시커먼 단환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한 향이 코끝을 맴돌다가 뜨거운 기운과 함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끄읍.”
“엄살떨지 마. 지금은 안 뒈져.”
“죄송합니다.”
부곡주가 고개를 푹 숙일 때였다.
돌연 바깥에서 살수 한 명이 달려 들어왔다.
“곡주님! 흑무련주가 찾아……!”
다급히 소리치던 그가 내부에서 벌어진 참사를 확인하고는 흠칫거렸다.
“이, 이게……!”
살수가 당황하는 사이 부곡주가 눈치껏 일어서더니 물었다.
“새로 오신 곡주님이시다. 무슨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