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81화 (280/508)

281. 이런 거였어?

남궁천은 확실히 분노하고 있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아이…….’

어찌 된 것인지 이만한 분노를 삭이는 게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아직 감정을 다스리기 어렵고, 그렇기에 내공의 섬세한 조절이 어려운 나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런 일쯤은 수백, 수천 번도 더 해봤다는 듯 태연하다.

둔한 사람이 보면 모를 것이다.

남궁천이 지금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하나 이릉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지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걸 드러내지 않다니. 참으로 대단하구나.’

당장 죽여야 할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오히려 옆에 앉은 남궁검보다 더 바위 같지 않은가?

사실 남궁천은 참을성이 뛰어난 성격은 아니었다. 평생을 도망자로 살면서 화가 나면 울분을 터뜨렸고, 기쁘면 껄껄 웃어댔으며, 슬플 땐 엉엉 소리 내서 울기도 했다.

하나 그가 겪은 경험은 웬만한 강호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가 겪은 일 년은 남들의 겪는 십 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우여곡절을 하루 사이에도 많이 겪었다.

그러다 보니 참고자 작정하면 참을 수 있을 뿐이다.

이릉은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바둑알을 두었다.

역시나 남궁천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처럼 공력을 쏟아부어 움직임을 옭아맨다거나 살이 따갑도록 살기를 쏟아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바둑을 내려두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자네 차례일세.”

“알아, 영감. 자꾸 당연한 소리 하지 말고 하던 얘기나 하라니까.”

“거, 성격이 급하군.”

“혹시 모르잖아? 영감이 얘기하다가 갑자기 치매라도 걸려서 엉뚱한 소리를 내뱉을지도. 내가 보기에 영감은 너무 오래 살았거든.”

“흘흘. 알겠으니 어서 두게나.”

“바둑 두지 못해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나?”

남궁천이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흑돌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이릉이 강맹한 살기와 공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나 남궁천은 태연했다.

“말했지만 이런 살기와 공력은 무수히 받아봤어. 날 얕보지 마. 엄한 데 힘 빼지 말고 말이나 계속해. 그래서 당신이 남궁선…… 그러니까 내 어머니를 죽였나?”

“그렇네.”

까득.

남궁천 손에 쥐어진 흑돌 두 개가 서로 마찰하면서 듣기 싫은 소리를 내지른다.

이쯤 되자 지켜만 보던 남궁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노호성을 터뜨렸다.

“이노오오옴! 이 곡주우우!”

파아아아앙!

남궁검의 전신에서 공력이 터질 듯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강맹한 기풍이 불어갔다.

단상 아래에 있던 사방살들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르르르르……!

그 와중에도 바둑판에 놓인 바둑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찰나지간에 휩쓸고 간 기풍에 바둑알이 날아가지 않도록 두 사람 모두 공력으로 억눌렀기 때문이다.

남궁검이 당장에라도 이릉의 목을 썰어버릴 듯 흉흉한 기세로 말했다.

“네놈이 정녕 내 딸을 해쳤단 말이더냐!”

“흘흘. 가주. 나는 칼자루였을 뿐일세. 그 칼자루를 쥔 건 맹주였고.”

“노오옴!”

우르르르릉!

남궁검의 사자후가 터지자 웅장한 전각 내부가 우는 소리를 내질렀다.

어지간해서는 남궁천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한데 딸의 원수가 눈앞에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제아무리 목석같은 남궁검이라도 심중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얘기를 하필 손주 앞에서 씨불여 대다니.

아무리 내기 바둑에서 이기기 위한 심리전이라지만, 참으로 비열하지 않은가?

한데 의외로 남궁천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마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천아. 더 들을 것도 없다! 내 당장 이놈의 목을 치고 이곳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다.”

“할아버지. 그럼 신병이기를 가져가기 어렵잖아요.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세요.”

“…….”

남궁검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한참이나 이릉을 노려보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철컥.

검을 갈무리한 그가 남궁천을 돌아보고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이 일은 네가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남궁천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릉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불쾌했다.

마치 이들은 자신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지 않은가?

저만한 믿음이 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도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남궁천이 흑돌을 바둑판에 내려두었다.

딱!

“그래서 어머니를 어떻게 죽였지?”

허! 정말이지 질리는 놈이로다.

이제 보니 강호신룡이라는 이 녀석은 숫제 괴물이 아닌가?

제 어미의 죽음을 마치 남의 이야기 하듯 하다니? 그러면서도 지독한 분노를 철저하게 갈무리하고 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남궁천이 미간을 살짝 구기고는 다시 묻는다.

“영감, 내 말 안 들려? 벌써 가는귀라도 먹은 거야?”

“흐음…… 자네 어머니는 한동안 맹에 머물러 있었네. 천하대살성과 한동안 함께 지냈으니 여러모로 조사가 필요했겠지. 그때 독을 썼네.”

딱.

이릉이 바둑알을 놓고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남궁천이 태연하게 흑돌을 쥐면서 물었다.

“독은 누가 구했고?”

“동방살이 구해왔지.”

남궁천이 고개를 슬쩍 돌리고는 동방살을 보았다.

이마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동방살이 어쩔 거냐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저 새끼가 여기 이인자인가?”

“그렇네. 동서남북 순일세.”

“묻지도 않는 걸 친절하게도 알려주는군. 그것도 심리전의 일환인가?”

“뭐, 그런 셈이지. 하지만 자네는 정말이지 대단하군. 강철 같은 심중을 가졌어. 참으로 놀라워.”

“왜? 허언증이라더니.”

“이해할 수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군. 또 궁금한 게 있는가? 이건 순수한 존경의 의미로 대답해 줌세.”

“실행에 옮긴 건 영감인가?”

“나와 서방살이 했지.”

“살곡의 일인자와 이인자, 삼인자가 다 참가했단 말이군.”

“천하제일룡을 제거한다는 것은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니까. 남방살까지 가담했지.”

“그렇군. 자랑이다, 이 개새끼들아.”

“말이 심하군.”

“그럼 내 어미를 죽인 원수들에게 존댓말이라도 바라나?”

“…….”

“욕을 하자면 밤새도록 할 수도 있어. 그래 봐야 내 입만 아프니까 참는 거지.”

“자네는 정말 놀라운 인재로군. 맹주가 이번엔 왜 자네를 노리는 것인지 알겠어.”

이릉이 진심 어린 감탄을 흘렸다.

두 사람은 지금 대화를 나누면서도 벌써 대여섯 번이나 흑돌과 백돌을 번갈아서 둔 상황이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릉이 백돌을 둘 때 남궁천은 그 어떤 방해도 하지 않았다.

이릉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리전을 펼쳐서 어떻게든 심중을 흔들고자 했는데, 오히려 고도의 집중력으로 바둑을 두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방법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정말로 계가를 해서 이기는 수밖에 없는 건가?’

이릉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궁천이 흑돌을 집어 들며 물었다.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는 그게 전부?”

“그렇네. 유감일세.”

“미친 새끼가 사람을 죽여놓고 유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자네, 그 말투는 좀…….”

“닥쳐.”

딱.

남궁천이 흑돌을 내려두자, 이릉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이건 뭐지?’

남궁천이 흑돌을 내려둔 위치가 묘했다.

마치 죽으려고 적진에 뛰어든 꼴이 아닌가?

만약 자신이 신의 한 수를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면, 이건 최악의 수나 마찬가지였다.

‘돌을 던진 건가?’

이대로 불계패를 인정하는 건가?

하긴 제 어미의 죽음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알게 됐으니 속이 뒤집히고 눈알이 돌아갈 지경일 터.

하지만 그런 것에 비하면 남궁천은 너무 담담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 해? 안 두고.”

기권은 아닌 건가?

이릉이 침음을 잠시 흘리다가 백돌을 두었다.

조금 전 남궁천이 둔 한 수로 바둑의 형세는 급격하게 백돌이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또 흑돌을 아무렇게나 두었다.

딱!

“……!”

역시 이해가 안 되는 한 수.

자리가 정확하니 돌을 던진 거라고 할 수 없는데, 도저히 좋은 수가 아니다.

결국 이릉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바둑을 둘 마음이 있긴 한…….”

“없지.”

“뭐라?”

“너 같으면 어머니를 죽인 원수 새끼와 수다 떨면서 바둑이나 두고 싶겠어?”

“흘흘. 그렇다면 역시 돌은 던진 건가? 그럼 나의 불계승으로…….”

“시끄러워, 이 미친 영감탱아.”

“…….”

“불계승이든 파계승이든 좋을 대로 생각하시고. 너는 오늘 뒈진다. 그리고, 너. 너. 너.”

남궁천이 손가락을 들어 동방살과 서방살, 그리고 남방살을 차례로 가리켰다.

이릉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도가 지나치군. 규칙을 어긴…….”

콰앙!

순간 남궁천이 바둑판을 발로 걷어차 올렸다.

이릉이 일순 바닥을 차며 물러났다.

파밧!

쒸에에에엣!

그가 바람처럼 물러섰지만, 남궁천이 자석처럼 따라붙으면서 검을 곧게 뻗어냈다.

따앙!

간발의 차이로 검을 쳐낸 이릉.

하지만 남궁천이 왼손에 들린 비수로 곧장 이릉의 목을 찔렀다.

푹!

“컥!”

“곡주님!”

사방살이 경악해서 외치는 사이, 남궁천이 연이어 목과 가슴 배를 차례로 찔러갔다.

푹푹푹!

“크으윽!”

이릉의 이마에 핏대가 선명하게 솟았다.

이릉의 무릎이 꺾이려는데, 남궁천이 얼른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넌 누워서 뒈질 자격도 없다.”

“크윽…… 네놈이 날…… 죽인다고 해도…… 천마의 보물을 차지할 수 있을…….”

“그딴 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뒈져라. 가서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라.”

쒸에에엑!

“안 돼에에엑!”

푸욱!

이릉의 절규가 무색하도록 남궁천의 비수가 그대로 입에 틀어박혔다.

그대로 목을 뚫고 벽에 박혀 버린 비수에 이릉의 전신이 축 늘어지며 매달렸다.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곡주를 잃은 사방살은 잠시 눈만 뒤룩뒤룩 굴릴 뿐이었다.

제일 먼저 동방살이 사태를 파악했고, 서방살이 함께 몸을 날려 왔다.

“저 새끼 죽엿!”

“노오오옴!”

남궁천이 곧장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벽라검을 손에서 날려 보냈다.

쒸에에에엑!

화살처럼 날아간 벽라검이 그대로 동방살의 심장을 꿰뚫고는 벽에 처박혔다.

콰자악!

쿠당탕!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린 동방살이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바닥에 쓰러졌다.

한편 남궁천을 향해 달려들던 서방살은 가슴에서 시퍼런 날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푸욱!

“끄어억……!”

그를 찌른 사람은 남궁검이었다.

서방살이 남궁천을 향해 몸을 날렸을 때, 거의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날아와 배후를 노린 것이다.

촤아아악!

검이 뽑혀 나가자 서방살이 그 자리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남궁천이 서방살의 머리통을 짓밟아서 터뜨려 버리고는 남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남방살과 북방살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사신(死神)!

다른 단어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어떠한 표정도 떠올리지 않은 남궁천은 그야말로 감정이 결핍된 맹수 같았다.

시산혈해 속에서 홀로 걸어오는 느낌이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면 이런 분위기를 풍긴단 말인가?

도처에 죽음이 가득한 것만 같다.

남방살과 북방살이 그 위압감을 이기지 못해 털썩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살, 살려주시오!”

남궁천이 무심히 발을 들어 올리더니 남방살의 머리를 밟아서 터뜨렸다.

퍼억!

즉사한 남방살 곁에서 북방살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오들오들 떨었다.

남궁천이 예의 그 얼음장 같은 얼굴로 물었다.

“네가 다음 서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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