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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검제-280화 (279/508)

280. 이런 거였어?

‘평범한 바둑판이 아니었군. 기물이었어!’

초견파공안으로도 기물의 원리는 파악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공력을 끌어 올리고 밀어내는 힘에 대항하려고 하면 그 힘이 그만큼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래서야 마치 자신의 힘과 싸우는 것 같지 않은가?

정사마의 기운을 번갈아 사용했지만 마찬가지.

‘차라리 힘을 뺀다면……?’

스윽.

‘오, 된다.’

모든 공력을 철저하게 갈무리한 다음 손을 뻗자 확실히 아까보다는 수월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그 또한 쉽지만은 않았다.

‘지독한 영감이네.’

남궁천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릉을 보았다.

이릉에게서 느껴지는 살기.

마치 부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 속에 살기가 스며들어있었다.

범인이라면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릴 정도로 강맹한 살기다.

어디 그뿐인가?

단상 아래에서 지켜보는 사방살도 남궁천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살기를 보내오고 있었다.

‘더럽네, 이거.’

공력을 완전히 갈무리해서 일반인처럼 맞닥뜨리는 살기는 가히 숨도 쉬기 힘들 정도였다.

한데 더 큰 문제는 이릉이 어마어마한 공력으로 남궁천의 전신을 찍어누르고 있다는 것.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공력을 끌어 올려도 문제, 갈무리해도 문제가 아닌가?

그런 남궁천의 속을 눈치챈 것인지, 이릉이 희미한 웃음를 머금었다.

‘쉽지 않을 것이다. 강호신룡이라 불릴 만큼 무공이 특출하다는 것은 잘 알겠지만, 내공을 다룬다는 것은 결국 나이에 비례한 것. 이제 약관을 채운 녀석이 노부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단상 아래에서 지켜보는 사방살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공을 다룬다는 것은 그만큼 노회함이 필요한 것이었기에.

남궁검만이 오로지 남궁천을 철저히 신뢰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잠시 길을 찾던 남궁천이 곧 잡념을 떨쳐냈다.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마음을 굳힌 그가 강공으로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일순 공력을 끌어 올리자 장삼 자락이 펄럭이며 한껏 부풀어 올랐다.

후우우우우웅!

사방으로 기풍이 훅 불어나간다.

이를 본 이릉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참고로 자신이 둔 돌이 흐트러지면 그 역시 불계패로 간주할 것이네.”

한마디로 기운을 잘못 다루다가 자칫 흑돌이 어지럽혀지거나 튕겨 나가기라도 하면 남궁천이 진다는 뜻.

‘영감탱이가 아주 치졸하네. 결국 바둑은 허울일 뿐이고. 내공 대결이잖아?’

그것도 단순히 강한 내공을 가리는 싸움이 아니다. 얼마나 더 정교하고 섬세하게 내공을 다룰 수 있느냐다.

결국 흑돌을 먼저 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이 아닌가?

내려둔 돌이 자리를 이탈하지 않게 공력을 쏟아내며 버텨줘야 한다.

만약 흑돌이 기풍을 이기지 못해 자리를 이탈하기라도 하면 남궁천은 첫수에 불계패가 되는 것이다.

마침 이릉이 기다리다 지쳤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다.

“바둑 둘 생각이 없는 겐가?”

“둡니다. 둬요. 영감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나? 왜 그리 서두르시오?”

“클클. 제법 주둥이가 잘 여물었구나.”

“아무렴. 이 나이쯤이면 뭐든 다 잘 여물만큼 여물었을 때지.”

말을 마친 남궁천이 더욱 강맹한 공력을 끌어 올리면서 바둑판으로 손을 뻗어갔다.

부들부들……!

바둑알을 잡은 손가락 끝이 떨려온다.

자칫 바둑알을 떨어뜨려서 바둑판 밖으로 튕겨 나가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이를 악문 남궁천이 일순 손을 쑤욱 뻗어냈다.

딱!

마침내 흑돌이 우상귀에 포석됐다.

‘후우!’

안도의 숨을 내쉬는 그때,

슈우우욱!

‘헛! 이건 또 뭔?’

놀랍게도 이번엔 바둑판이 남궁천의 공력을 빠르게 흡수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란 남궁천이 얼른 손을 떼며 물러났다.

이를 본 이릉이 씨익 웃음을 그렸다.

“제법이군.”

“이거 재미있네. 묘한 바둑판이오.”

“자공석판(磁功石版)이라는 기물일세.”

“빨리도 알려주시는군.”

“그게 안마당에서 싸우는 이점이 아니겠나?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고 쳐들어왔을 게 아닌가?”

“말은 바로 합시다. 내가 물건을 가지러 가는 길에 살곡이 있었던 것뿐이오.”

“어쨌거나.”

“어쨌거나라니. 세상 편하게 사시네.”

“어차피 이슬처럼 왔다가 가는 인생 아닌가? 세상살이 고달파서 좋을 것도 없지.”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을 이슬처럼 날려 버린 거요?”

“호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 자, 그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내 차례인가?”

이릉이 히죽 웃어 보이고는 백돌을 집어 들었다.

남궁천이 우선 팔짱을 끼고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스으윽.

이릉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더니 백돌을 바둑판 위로 가져갔다.

그 순간 남궁천도 공력을 끌어 올리고는 쏘아냈다.

후우우우웅!

장삼이 펄럭이며 기풍이 훅 불어 나갔다.

그 와중에도 내공을 섬세하게 조절하여 바둑판에 놓인 흑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구오오오오오!

두 사람의 기운이 매섭게 휘몰아친다.

확실히 흑돌을 먼저 둔 남궁천이 훨씬 불리했다.

이미 놓아둔 흑돌이 자칫 기풍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끝이었다.

이릉의 이마에 핏대가 슬며시 일어났다.

‘어린 녀석이 제법이군!’

사실 첫수에 불계승을 거둘 것으로 생각했다.

한데 남궁천은 그 중압감을 이겨내고 흑돌을 내려두는 데 성공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바둑판이 공력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른 손을 떼며 물러났다.

쉽지 않은 일이다.

대게는 그 순간 당황하여 급하게 공력을 거두다가 내력이 뒤엉켜 주화입마에 걸리곤 한다.

공력도 근육과 마찬가지다.

온 힘을 다해 밀어내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당기는 힘을 최고로 끌어 올리면 근육에 무리가 가고 놀라게 마련이다.

그 성급한 전환점에서 대개 각혈을 하거나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내상을 입는다.

한데 남궁천은?

태연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게 이제 막 약관에 다다른 아이라고?

산전수전 다 겪어본 노장처럼 담백한 이 반응이?

게다가 벌써 이 싸움의 묘리를 파악하고는 공력으로 마주쳐오고 있지 않은가?

확실히 재미있는 아이다.

그러나…….

“역시 바둑은 심리전이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좀 작작 하시오. 심리전은 무슨. 이건 그저 또 다른 내공 겨루기구만.”

“심리전일세.”

“아니, 이게 뭔 심리전이야? 내공만 들입다 퍼부어대면서 바둑알을…….”

“자네 어미가 궐음증으로 병사했지?”

“……!”

순간 남궁천이 움찔거리자, 그 틈을 타서 이릉이 백돌을 두었다.

딱!

이릉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자네 차례일세.”

“하던 얘기 계속해 보시오.”

“이런…… 그리 살벌한 얼굴로 노려보는데 어디 겁나서 할 수 있겠나? 게다가 저기서도 저리 째려보는데.”

이릉이 슬쩍 돌아본 곳에서는 남궁검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 것 같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딸의 이야기가 갑자기 나오니 순간적으로 치미는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감정을 절제하는 능력이 뛰어나긴 했다.

이릉이 다시 남궁천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자, 자네 차례일세. 급할 것 없으니 얘기는 천천히 나눠 가면 될 테지.”

“좋소.”

남궁천이 딱딱하게 말을 뱉고는 흑돌을 쥐고 손을 뻗었다.

구오오오오!

아니나 다를까, 이릉의 강맹한 기운이 천장에서부터 찍어 누를 듯 떨어져 내렸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소.”

“뭐가 말인가?”

“바둑을 두자고 하면서 이렇게 대놓고 살기를 쏘아대니까 말이오. 게다가 공력을 남발하면서 방해까지 하고. 이 묘한 바둑판은 또 어떻고.”

“한데?”

“이젠 익숙해졌소.”

“익숙해졌다고?”

이릉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그렇소. 익숙해졌소.”

“허언증이 있나 보군.”

이릉은 농이 아니라 진심으로 던진 말이었다.

허언증이 있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 익숙해질 리가. 아니면 단순한 허세겠지.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도 이 바둑판 앞에서만큼은 당황하기 일쑤다.

이 묘한 바둑을 둘 때만큼은 평정심을 이어가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내공을 섬세하게 다뤄야 할 뿐만 아니라, 심후해야 하며, 거기에 심리전에도 능해야 하니까.

남궁천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모르시나 본데 나는 수많은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적이 있소.”

이릉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어린 나이에 언제 그랬더냐?”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으나, 아마 영감이 지금껏 살아오며 받은 살기보다 많을 거요. 단 한순간에 수백, 수천 명의 살기를 받아본 적도 있소.”

“확실히 허언증이로군. 허세도 이 정도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니.”

이쯤 되자 남궁검도 남궁천의 말을 그저 허세나 전략의 일환으로 여겼다.

하나 남궁천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전생을 겪었더라면 이 바둑 대결을 보고 코웃음을 쳤으리라.

“뭐, 신기하긴 하오. 공력을 밀어냈다가 빨아들이기도 하는 바둑판이라니. 이것도 가져가야겠소.”

“이기고 나서나 그런 얘기를 하시게.”

“그래서 아까 하던 내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해보시오.”

“그러잖아도 하려고 했네. 자네 어머니가 과연 병사를 했을까?”

멈칫.

남궁천의 손길이 다시 한번 움찔거렸다.

이릉이 재미있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 어미는 천하제일룡이었네.”

“알고 있소.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지.”

“그렇네. 물론 건강한 사람도 돌연사하는 일은 흔한 세상이지. 하나 천하제일룡이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병사를 했다는 건 어딘지 석연치가 않지.”

“그래서?”

딱!

“……!”

이릉이 두 눈을 부릅떴다.

남궁천이 아무렇지도 않게 흑돌을 놓았기 때문이다.

이릉이 남궁천을 힐끔 쳐다보았다.

억누른 노기가 다분히 느껴진다.

어찌나 울분을 누르고 있는 것인지 당장 기혈이 뒤틀려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지경이다.

한데도 흑돌을 내려두었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남궁천이 팔짱을 끼며 턱짓했다.

“계속 씨불이면서 하시오. 방해하지 않을 테니.”

“끄음. 그럼 우선…….”

딱.

이릉이 바둑판에 백돌을 두었다.

과연 남궁천은 말했던 대로 일절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두라는 듯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모든 관심은 어머니 얘기에 있다는 듯.

이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좋다, 그렇다면 속전속결로 끝내주마.’

이릉이 턱짓을 했다.

“자, 자네 차례네. 오랜만에 빠른 바둑이로군.”

“좋소. 얘기 계속하시오.”

“아주 오래전이었지. 남궁선이 본 가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네. 본 곡에 의뢰가 들어왔어.”

“누구로부터?”

“이쯤이면 짐작할 것도 같은데.”

이릉이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가 더 없이 푸근한 할아버지의 미소라서 더욱 심사를 뒤틀리게 한다.

하지만 남궁천은 일절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맹주인가?”

“그렇네.”

“그래서?”

“그 의뢰를 받은 나는 맹주가 나와 비슷한 부류라는 걸 알 수 있었지. 그는 강호를 지키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했네.”

이번만큼은 남궁천도 흑돌을 꽉 말아 쥐고는 손을 가늘게 떨었다.

당장에라도 흑돌이 남궁천의 손에 부서져 가루가 될 것만 같았다.

“계속.”

“그 사람은 바로…….”

“…….”

“자네 어머니, 남궁선이었네.”

따악!

남궁천이 흑돌을 내려두었다.

“……!”

이릉이 또 놀란 눈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이놈은 도대체……! 제 어미를 죽였다는데도……?’

오히려 옆에서 지켜보던 남궁검이 맹렬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상황.

남궁천이 이릉을 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영감, 세상 공기를 조금이라도 더 마시고 싶으면 계속 씨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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