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79화 (278/508)

279. 이런 거였어?

“영감.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환영식을 이딴 식으로 하나?”

남궁천이 빈정거리며 말하자, 살곡주 이릉이 피식 웃었다.

“내 자네를 무시했네. 강호신룡이라는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군. 정중히 사과하겠네.”

“어째 내 의도와 다르게 전달된 것 같은데. 뭐, 넘어갑시다.”

“그럼 올라오겠나?”

이릉이 전각 안쪽을 가리키며 한 걸음 물러서자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럽시다. 그런데 댁의 애새끼들이 내가 한 걸음이라도 떼었다간 죽일 듯이 달려들 것 같아서 말이오.”

“다들 자중해라. 이제부터 살곡의 손님이시다.”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살을 엘 것 같은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사방살을 제외한 모든 살수들이 거짓말처럼 기척을 감추며 사라졌다.

“그래, 이래야지. 그렇게 막 무섭게 노려보고 그러면 안 돼. 아무리 내가 성격이 좋아 보여도 처음 보는 사람이 그렇게 막 죽일 듯이 째려보면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고.”

남궁천이 너스레를 떨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마침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달그닥…… 달그닥…….

외길을 따라 협곡 안쪽으로 들어서는 마차 한 대.

지금껏 피바람이 불었던 장소에 너무나 유유히 나타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뭐, 별일 없었으니 다행이네.”

마부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을 몰고 왔다가 돌계단 아래에 다다라서야 말고삐를 당겼다.

이히히힝.

말들이 멈춰 서자 그 뒤를 따라온 적랑단원들도 우르르 앞으로 달려와서 계단을 따라 올라왔다.

‘거, 몸은 각자 알아서 책임지라고 했다고 너무 사리는 것 아닌가?’

마침 마차 문도 열리면서 남궁검이 예의 그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섰다. 그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거, 요란하게도 했구나.”

“이것들이 요란하게 달려들더라고요.”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는 사이 남궁검의 시야가 이릉에게 향했다.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격렬하게 뒤얽혔다.

“당신은…….”

노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일세. 적랑단주.”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릉과 남궁검을 번갈아 보았다.

적랑단주라고?

적랑단을 이끌고 와서 착각한 건가?

아니, 그러기에는 두 사람이 안면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아, 예전에 할아버지가 적랑단주였던 걸 두고 하는 말인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남궁검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 살아 계셨구려. 이 호위.”

이 호위?

누군가의 호위였다는 건가?

척 보기에도 이릉은 초절정고수의 영역에 발을 들인 자였다. 그렇다면 지키고자 했던 이는 더욱 대단한 자였으리라.

혹시 천마의 호위였나?

마교의 장보도에 하필 살곡이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한데 남궁검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천아, 저자는 전대 맹주의 호신위를 지냈던 이릉 호위다.”

“예? 맹주의 호신위요? 천마 쪽이 아니라?”

“천마와는 친분이 좀 있을 테지. 어쨌든 변절자니까. 아니, 내통자라고 해야 더 옳으려나?”

남궁검이 차갑게 대꾸하자, 이릉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뭐라고 불러도 좋네. 하나 나는 나의 신념에 따랐을 뿐. 세상이 정한 잣대에 나를 넣으려고 하면 꽤 골이 아플 걸세.”

두 사람의 이해 못 할 대화에 남궁천이 손을 저었다.

“뭐, 어쨌든 적인 건 확실하니까. 갑시다.”

“시원시원해서 좋구나.”

이릉이 끌끌 웃음을 흘리고는 뒷짐을 진 채 돌아섰다.

남궁천이 계단을 오르자 남궁검과 적랑단원들이 함께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발길을 이번에도 이릉이 붙잡았다.

“미안하지만 객이 아닌 분들은 멈춰주시게.”

슈슈슈슈슉!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살수들이 귀신처럼 나타나서 앞을 막았다.

적랑단원들이 당황하자 남궁검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이 호위. 그 아이는 본 가의 소가주이고, 내 손주요.”

“손주라. 자네가 대살성의 자식을 그리 부르다니 놀랍군.”

“내 앞길을 막는다면 꽤 골치가 아플 거요.”

후우우우웅!

남궁검이 기운을 끌어 올리자 장삼자락이 크게 부풀어 오르며 펄럭였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매서운지 앞을 가로막고 선 살수들도 움찔 한 걸음 물러설 정도였다.

이릉이 눈을 게슴츠레 뜨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어차피 자네도 내 손님이니. 하나 다른 자들은 대기하게.”

“잘 생각하셨소.”

남궁검이 무뚝뚝하게 말을 뱉고는 살수들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다.

적랑단원들도 뒤를 따르려고 했지만, 살수들이 살기를 팽팽하게 끌어 올리며 앞을 막아서자 더 이상은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언젠간 누군가를 맞이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자네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어.”

“마교에서 올 줄 알았소?”

남궁천의 질문에 이릉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그게 정상이지. 죽은 천마도 그걸 바랐을 것이고.”

“미안하게 됐군. 죽은 자의 바람까지는 들어줄 수가 없어서 말이오.”

“미안할 것까지야. 그리 따지면 내가 자네들에게 미안할 게 더 많지.”

“무슨 뜻이오?”

“자자,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 나누세.”

이릉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궁천의 등을 툭툭 쳤다.

뒤늦게 남궁천은 이릉이 꽤나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 칼을 겨눈 적에게 등을 너무나 쉽게 내어준 것이다.

이런 방심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분명 이릉이 가진 살수의 자질 때문이리라.

“영감은 왜 맹을 배신하고 마교 앞잡이가 되었소?”

“마교 앞잡이라니. 나는 맹을 위해서 희생을 했을 뿐일세. 맹을 나온 후로 마교 교주와 친분을 좀 다지긴 했지만.”

“맹을 위해 희생이라. 대충 알 것 같군. 당신도 현 맹주와 비슷한 부류구만.”

“부정하진 않겠네.”

“천만다행이오.”

“다행이라?”

“나중에 죽일 때 죄책감은 들지 않을 것 같아서.”

“죄책감이라고? 살곡을 피바다로 만들어놓은 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죽여도 싼 놈들이오. 귀한 밥 처먹고 똥만 싸면서 한다는 짓이 시체 만들기 아니오? 영감은 맹에 있던 인물이라 좀 다른 사연이 있을까 해서 잠시 걱정했소만, 그게 아니라 그냥 뒤틀린 사고방식 때문이라면 죽어도 싸지.”

“사람 앞에 두고 너무하는구먼.”

“사람 앞에 두고 무심히 죽이는 놈들도 많잖소.”

“과연 한마디를 안 지는군.”

“당연하지. 사내라면 똥 굵기도 이기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소.”

“허허. 재미있는 친구로군.”

그렇게 웃으며 전각 앞에 다다르자, 육중한 문짝이 저절로 스르르 열렸다.

안쪽에서 살수들이 문을 열어준 모양이었다.

“들어가세.”

남궁천과 남궁검이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사방살이 따라붙었다.

남궁천이 불편한 듯 뒤를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저 영감탱이들은 왜 따라오는 거요?”

“신경 쓰지 말게. 본 곡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네 명이니까.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닌다네.”

“똥 쌀 때도?”

“흘흘. 그렇네.”

“와, 그건 또 신박하네. 난 누가 보고 있으면 똥이 안 나오던데.”

“음? 자네도 누가 보는 곳에서 똥을 싼 적이 있었나?”

“많소.”

전생에는 정말이지 그런 경우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추격자들이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똥을 쌀 때도 감시를 했으니까.

“원치 않은 상황이었다면 꽤 괴로웠겠구먼.”

“그래서 변비가 생겼었소.”

그러자 문득 남궁검이 돌아보며 물었다.

“변비가 있는 것이냐?”

불쑥 들린 목소리에 남궁천이 무심결에 돌아보다가 움찔거렸다.

이 상황에서 저 걱정 가득한 표정이라니.

이제 조손간의 정을 쌓아서 조금 편해졌나 싶었더니, 처음 받은 걱정이 하필 변비 걱정인가?

남궁천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뭐,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래, 차전자피를 많이 먹도록 하여라. 변비에는 즉효다. 평소에는 콩과 해조류를 많이 먹도록 하고.”

“예…….”

“물도 많이 마셔야 한다.”

“……알겠습니다.”

“벽곡단은 가능한 삼가라. 변비의 지름길이니라.”

“명심…… 하지요.”

“두강주도 효과가 괜찮으니…….”

“할아버지.”

“으응?”

“혹시…… 변비세요?”

“…….”

“아…….”

“너의 고통을 내가 안다. 하필 닮지 않아도 될 것을…….”

“그러시구나…….”

잠시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세 사람이 전각 안쪽 단상에 다다랐다.

단상 위에는 태사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앞으로 작고 단단한 바위 탁자가 있었고 양옆으로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릉이 탁자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더러운 똥 얘기는 그만하고 우선 앉으시게.”

남궁천과 남궁검은 왠지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남궁천이 탁자 옆에 앉자, 이릉이 태사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궁 가주께선 상석에 앉으시게. 내 오늘은 특별히 배려하지.”

“사양하지 않겠소.”

남궁검이 태사의에 앉자, 이릉이 남궁천과 마주 앉았다.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오? 나하고 식사나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나는 가끔 여기서 전대 교주와 바둑을 두었네. 자네도 오늘은 내 손님이니 나와 내기 바둑을 두는 게 어떤가?”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자네와 함께 온 자들은 적랑단원이겠지? 아마 당예설을 따르는 자들일 테고.”

“앉아서 천 리를 보시는군.”

“클클. 이 일을 하다 보면 그리되더군.”

“그래서 뭐요?”

“저들이 다 시체가 되면 자네도 손해이지 않겠나? 깔끔하게 바둑으로 승부를 보자는 걸세. 물론 자네가 제안을 거절하면 어쩔 수 없지만.”

“흐음.”

남궁천이 침음을 흘리다가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남궁검은 알아서 판단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적랑단원을 모두 잃으면 신병이기를 찾아도 옮길 사람이 턱없이 부족해지리라.

당예설을 보기에도 면이 안 설 테고.

“좋소. 해봅시다.”

“잘 생각했네. 가져 오게.”

이릉의 말에 사방살이 곧장 어디론가 가더니 묵직한 돌판을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돌판이 꽤 무거운 것인지 내공이 심후한 사방살이 전부 달라붙어서 옮기고 있었다.

쿠웅!

그들이 바위 탁자에 거뭇한 석판을 내려두었다.

석판은 바로 바둑판이었다.

한데 빛깔이 거뭇한 것이 처음 보는 재질이었다.

‘만년한철도 아닌 것 같고. 대체 뭐로 만든 거지?’

남궁천이 무심결에 손을 뻗으려는데, 이릉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렸다.

“아직. 손대지 말게.”

“음?”

“바둑을 시작하지 않았잖은가?”

“흠. 알겠소.”

잠시 후 두 사람에게 흑돌과 백돌이 놓였다.

나이에 따라 자연히 남궁천 앞에는 흑돌이 놓였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 사방살이 단상 아래에 도열했다.

이릉이 남궁천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규칙은 간단하네. 바둑에서 자네가 이기면 되네. 하나 돌 하나라도 엉뚱한 곳에 놓게 되면 불계승으로 간주하겠네.”

“좋소.”

“돌을 두기를 포기해도 마찬가지일세.”

“당연.”

“자, 먼저 시작하시게.”

“그럼.”

남궁천이 흑돌을 집어 들고는 우상귀에 포석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

남궁천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과연…… 이런 거였어?’

손이 나아가질 않는다.

무슨 조화인지 바둑판 위로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좀처럼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남궁천의 손을 마구 밀어내는 것 같지 않은가?

마치 자석이 같은 극을 만나 서로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

남궁천의 당혹감을 읽은 듯 이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러나? 자네. 어서 두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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