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78화 (277/508)

278. 무적난신(無敵亂神)

“아니, 왜 나만 피독주를 안 준다는 거예요? 아무리 내가 밉다지만, 이왕 손을 잡기로 했으면 확실히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당 가주님 영 실망이네.”

남궁천이 투덜거리며 말하자, 당고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글쎄, 자네는 피독주가 필요 없대도. 아울러 해독제도 줄 수 없네.”

“그러니까 왜요! 이건 보복심리 아닙니까?”

“아, 글쎄. 말 그대로 자네는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왜 필요 없냐고요!”

“중독당할 일이 없으니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 나참, 당가에 넘쳐나는 게 피독주와 해독제인데 그게 그렇게 아깝습니까?”

“허어, 자네는 만독불침지체란 말일세.”

“아무리 제가 만독불침지체라도 피독주와 해독제는…… 응? 뭐라고요? 제가 만독…… 뭐요?”

남궁천이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고륜이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 정도 말했으면 말귀를 알아들어야 할 것 아닌가? 피독주와 해독제가 필요 없는 인간이면 당연히 만독불침지체가 아니겠나?”

“만독불침지체라니…… 왜요?”

“뭐가 왜야?”

“그러니까 왜 제가 그런 몸인데요?”

이쯤되자 상황을 지켜만 보던 남궁검도 슬며시 나서며 물었다.

“나도 궁금하군. 천이가 만독불침지체라니? 그게 사실인가?”

“설마 제가 그런 걸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당고륜의 대꾸에 남궁검이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그런 몸을 만든 것이냐? 그것도 책으로 배운 것이더냐?”

“어…… 그건 아닌데…….”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당고륜이 얕은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천마신단을 복용한 것과 관련이 깊어 보입니다.”

“천마신단과?”

“마교 교주 천마는 독이 통하지 않는 자입니다. 해서 본 가로서도 상대하기 가장 까다롭지요.”

“한데 마신단의 영향으로 천마처럼 만독불침지체가 되었단 말인가?”

“따지고 보자면 마신단은 독 중에서도 가장 강맹한 독에 속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온갖 영초와 독을 조합해서 만든 마신단이니까요. 한데 그 마신단의 기운을 품었으니 더 이상의 독이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지요. 저도 여기까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뭐, 사실 남궁천이 마신단을 복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으니까.

당고륜의 말에 남궁천과 남궁검이 입을 다물고 서로를 보았다.

“제가 만독불침지체라니…….”

“이런 경우가 다 있구나.”

“그러게요. 흐흐흐…….”

“후후후…….”

남궁천과 남궁검이 서로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 * *

황무칠보독에 당하고도 멀쩡하다니!

서서히 희미해지는 안갯속에서 그림자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황무칠보독은 다루는 자들에게도 매우 위험한 독이었다. 피독주도 없고 해독제도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황무칠보독 때문에 남궁천에게 가까이 가기가 어려운 실정이 되고 말았다.

그림자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남궁천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에 날 공격했던 네 명. 다른 녀석들과 느낌이 다르던데. 이름이 뭐냐?”

“살수에게 이름은 무슨.”

그림자 중 하나가 대답하자, 남궁천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름이 없어도 뭐 부를 때 쓰는 호칭은 있을 거 아냐? 어차피 여기서 다 뒈지거나, 내가 뒈지거나 둘 중 하나잖아. 말해줘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

“…….”

“우린 사방살(四方殺)이다.”

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 사방살. 뭐 사방에서 죽이러 온다는 건가? 한 명이 한쪽 방위씩 맡아서? 하여튼 이름도 거지 같네. 살수들은 작명 감각은 영 없구나. 하긴 벽곡단이나 처먹으면서 사람 죽일 생각만 가득한 새끼들이 뭐 이름 따위 신경 쓰겠어?”

“…….”

사방살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그들끼리 열심히 전음을 흘리면서 대책 회의를 하고 있으리라.

대략의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안개 너머에서 뭔가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슈슈슈슈슈슈슉!

‘화살인가?’

한데 허공에서 불빛이 어른거린다.

‘불화살이로구나!’

남궁천이 얼른 진각을 밟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꽈앙!

순간 자신을 뒤덮고 있던 황무칠보독이 풀썩 날아올랐다.

독은 불에 약하다.

만약 저 불화살들이 남궁천 근처로 떨어지면 순식간에 옮겨 붙을 것이다.

파라라라라!

허공으로 솟구친 남궁천이 일순 몸을 회전하자 사방으로 기풍이 불어가면서 몸에 묻었던 황무칠보독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불화살이 마침내 황무칠보독과 마주치는 순간!

화르르르르르륵!

삽시간에 화마가 몸집을 키우며 허공을 장악했다.

남궁천을 에워싸듯 퍼져 나간 불길이 살아 움직이는 화룡(火龍)이 되어 꿈틀거리는 것만 같다.

후둑! 후두둑!

불붙은 황무칠보독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하자 마치 하늘에서 불비가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화륵, 화르르륵!

독을 어찌나 많이 뿌린 것인지 사방팔방으로 불길이 치솟으며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남궁천을 불태워 죽이려고 쏜 불화살이 오히려 살곡 전체를 태워 버릴 지경이 되고 만 것.

불길이 솟구쳐 오르니 안개도 점차 희미해지면서 사방의 광경이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고, 대리석 바닥 끝에는 암벽에 박혀 버린 듯 보이는 전각이 있었다.

어느새 살곡 깊숙한 안마당까지 들어온 모양이었다.

“조져!”

순간 사방살 중 하나가 명령을 내리자, 살수들이 불길을 가르며 마구 튀어나왔다.

쉬이이잇!

따앙!

남궁천이 다시 바람처럼 몸을 날리면서 살수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마기를 철저하게 창벽의 기운으로 갈무리했다.

확실히 정신이 훨씬 명료해지면서 상대의 움직임이 명확하게 보였다.

쉬이이이잇!

옆구리로 짓쳐 드는 도신!

휘리리릭!

남궁천이 몸을 옆으로 눕히며 회전하자, 도신이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바닥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쉬컥!

뭔가를 베는 감각이 손끝에 전해진다.

털썩!

쓰러지는 소리.

감각으로 미루어보건대 죽지 않을 만큼의 깊이였으리라.

그럼에도 신음을 흘리지 않고 참는다는 것은 살수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도 제대로 된 놈이 있었군.’

감탄하기가 바쁘게 또 하나의 살수가 불구덩이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까앙!

퍼억!

날아드는 검을 쳐내고는 그대로 발을 내질렀더니, 이번에도 살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튕겨 나간다.

하나를 처리하고 나면 또 하나가 불구덩이에서 튀어나오고, 그걸 처리하면 또 다른 녀석이 튀어나왔다.

안개가 사라지니 이젠 불길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과정이 지루하거나 짜증 나지 않다.

이 또한 전생의 향수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어디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상황에서 이렇게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검을 휘둘러 살을 베거나, 목을 썰고, 검집을 휘둘러 대가리를 깨는 쾌감이란.

‘무슨 두더지 떼를 잡는 것도 아니고…….’

아, 두더지 잡기 놀이라는 걸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남궁천은 다시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둘러갔다.

하나 이번에는 마기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창벽공에 몸을 내맡긴 상태.

확실히 마기를 품은 창벽공은 그 위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평소라면 균열만 갔어야 할 대리석 바닥이 아예 박살이 나 버렸고, 튕겨 나갔어야 할 도검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그 파편에 찔려 죽거나 다치는 녀석들도 상당했다.

그야말로 무적난신(無敵亂神)이 되어 남의 집 안마당에서 행포를 부리는 꼴이 아닌가?

전생에도 떼싸움은 자주 했지만, 대개는 그 시기를 스스로 정한 게 아니다.

쫓고 쫓기다가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고 떼싸움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스스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이다.

단지 의도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차이일 뿐인데도 남궁천의 기분은 많이 달랐다.

이래서 사람은 주도적으로 살아야 하나 보다.

‘이렇게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어 가지요.’

퍼억!

마침내 마지막으로 날아든 살수의 머리통을 검집으로 내려쳐 깨버리니 어지간히 질린 것인지 더 이상은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후우우.”

긴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불길이 군데군데 타오르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널브러진 살수들만 해도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

‘내가 이렇게 많이 죽였나?’

하긴 전생에서도 무아지경 속에 검을 휘두르다 보면 지나간 자리가 피와 시체로 가득했었다.

어쨌거나 이런 난장이 벌어졌는데도 불길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협곡 가득한 음기 때문이리라.

오히려 불길이 조금씩 수그러들면서 에워싼 살수들이 좀 더 명확히 보였다.

물론 눈에 보이는 자들 외에도 주변 지형이나 사물에 몸을 은신하고 있넌 것들도 있으리라.

남궁천이 목을 한 차례 우두둑 꺾고는 물었다.

“왜 쳐다보고만 있어? 안 오냐?”

“…….”

“안 오면 내가 가고.”

성큼.

의도적으로 크게 한 걸음을 내딛자 살수들이 우르르 멀어진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병신들. 쫄기는.”

살수 중 늙수레한 남자가 수신호를 보냈다. 그는 사방살 중 한 명인 북방살이었다.

신호가 떨어지자 십여 명의 살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왔다.

“그렇지. 그래야 불나방답지!”

남궁천이 말을 뱉으면서 품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휘릭, 휘릭, 휘릭……!

십여 자루의 비수가 나비처럼 너풀거리며 날아갔다.

추혼비접!

역시나 당가의 비기다.

“엇!”

“칫!”

십여 명의 살수들이 일제히 물러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틈을 타서 남궁천이 재빨리 세침을 꺼내 던졌다.

삐잉! 삥! 삐삐잉……!

“컥!”

“윽!”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린 살수들히 목이나 가슴 등 요혈을 움켜쥐며 픽픽 쓰러졌다.

“호오, 이게 되네?”

남궁천이 신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고륜의 술법을 따라한 것.

화려한 비기를 앞서 사용하고, 거기에 정신이 빼앗겼을 때 기본기에 충실한 평범한 암기를 날려 보내는 것.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십여 명의 살수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고, 그중 세 명만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래도 살수들은 여전히 많았다.

“쓰레기들이 너무 많구나. 역시 여긴 소각장이 되어야겠다.”

남궁천이 싸늘하게 말을 뱉자, 수신호를 내렸던 북방살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고얀!”

파바바밧!

단숨에 허공을 가른 사방살이 남궁천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퍼어엉!

서로 장이 부딪치자 두 사람이 빠르게 멀어졌다.

츠츠츠츠츳!

북방살은 손바닥부터 어깨까지 욱신거리는 걸 느끼면서 눈자위를 꿈틀거렸다.

‘이 기운은…….’

묘하다.

정공처럼 느껴지면서도 굉장히 이질적이면서 사이한 기운을 품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저 아이의 정체가……?’

눈살을 찌푸린 북방살이 서서히 공력을 다시 끌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딱…… 딱…… 딱…….

암벽에 박힌 전각 쪽에서 지팡이로 바닥을 짚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 백염이 성성한 노인이 구부정한 허리를 한 채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게 자란 눈썹이 눈처럼 새하얀 노인.

어딘지 살수 집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생긴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거 환영식이 너무 초라했구나. 어서 오게. 남궁천.”

그가 바로 살곡주 이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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