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가야 할 두 가지 이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마차는 부지런히 길을 달려 섬서에 위치한 천중산 기슭에 도착했다.
마차는 울창한 숲 사이로 꾸준히 달렸고, 남궁천은 역시나 운기조식을 하면서 내공을 단단히 다져갔다.
운기조식을 하면 할수록 창벽공의 묘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초견파공안을 익혀서 세상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창벽공을 더해 그 세상을 품게 되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닌가?
다그닥…… 다그닥…….
비탈진 길을 한참 동안 따라가던 마차가 어느 순간 천천히 멈춰 섰다.
운기조식에 몰두하던 남궁천도 슬그머니 눈을 뜨고는 기운을 갈무리했다.
“천중산이군요.”
“그래, 기운이 부쩍 정돈된 느낌이구나.”
“모처럼 운기조식에만 집중하니 성과가 있었어요.”
“잘됐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의 몸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확실히 남궁천은 외형적으로 좀 더 다져진 모습이었다.
다만 마기를 흡수했기 때문인지 이따금씩 날카로운 눈빛을 보일 때가 있긴 했다.
그래도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천만 다행이었다.
만약 남궁천이 마기에 사로잡히기라도 했다면…….
‘그땐 정말 대살성의 탄생이 되었을 테지.’
생각도 하기 싫은 상황이다.
사위를 그리 잃었는데, 손주까지 그리 보내 버리면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는가?
마침 마부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안개가 무척 짙은 데다 아까부터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요.”
남궁천이 일어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여기 계세요.”
“벌써 골방 늙은이 취급이냐?”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효심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남궁천이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남궁검이 피식 웃었다.
새삼 감개무량하다.
손주와 이런 대화를 나눌 날이 올 줄이야.
가세가 기울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남궁세가가 다시 재기하기 위해서는 삼 대를 지나서도 힘들 거라고 생각했건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무엇에 그리 집착을 했는지 모르겠다.
남궁천은 누가 뭐래도 자신의 손자였고, 사위는 천하대살성이 아니었으며, 딸은 천하제일룡이지 않았던가?
운이 나빠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들, 사랑하는 이들이 아직 곁에 남아 있었는데 어찌 그리 절망스럽게 여겼을까?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나 보다.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묻는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그저 이 순간이 좋구나.”
남궁검답지 않은 대꾸에 남궁천이 흠칫거리더니 미간을 살짝 좁혔다.
“할아버지도 마침내…….”
“으응?”
“살육의 쾌감에 빠지셨군요. 사실 그게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죠. 예, 그런 쾌감에 도취되어서 이성을 잃는다면 좀 문제겠지만, 어느 정도 즐기는 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이해합니다.”
“이야기가 어찌 그리 흘러가는 것이냐?”
“응? 그쪽이 아니었어요?”
“됐다. 그만 가보아라.”
남궁검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남궁천이 여전히 뜻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모습을 남궁검이 물끄러미 보다가 생각했다.
‘또 성장했군. 이젠 나를 뛰어넘었을지도…….’
내놓은 자식이었다가, 품 안의 자식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그 품마저 벗어나려고 한다.
남궁검이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선아, 이 아비는 여전히 삶이 서툴구나.’
한편 마차에서 내린 남궁천은 앞으로 걸어가서 장보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러 진법과 기문둔갑술을 이용해서 살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숨긴 상황.
장삼이 축축하게 젖어들 정도로 짙은 안갯속에서 희미한 살기가 느껴진다.
남궁천은 장보도를 머릿속으로 한번 암기한 후에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뒤를 바짝 따라오도록.”
“예, 공자님.”
마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궁천은 안갯속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어차피 장보도에 파훼법까지 나와 있으니 길을 잃을 일은 없으리라.
또한 안갯속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살기로 미루어 짐작컨대 진법이 까다롭게 펼쳐져 있진 않을 것이다.
진법이라는 것이 적아를 가려가면서 발동하진 않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안갯속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쒸쒸에엑!
암기가 머금은 공력이 남궁천의 시야에 들어온다.
‘확실히 이럴 땐 초견파공안이 도움이 된단 말이지.’
빛줄기와 함께 날아드는 암기를 가볍게 쳐내자 금속성이 시끄럽게 울렸다.
따다앙!
쉬쉭, 푸푹!
“크억!”
“어윽!”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
적의 형상은 잘 보이지 않지만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빛줄기는 보이고 있었다.
튕겨낸 암기 역시 은으로 세공된 것이어서 안갯속에서는 잘 찾기도 어려웠지만, 초견파공안 덕을 보았다.
“이제 좀 살수다워졌네. 그래, 너희 같은 살수 새끼들은 쥐구멍에 숨어서 깔짝대야지. 그때처럼 몸뚱이 훤히 드러내면 뒈지기 십상이라고.”
딱히 도발하려고 던진 아니지만, 듣는 살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후우웅.
안개에 섞인 뜨끈한 기운.
그리고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빛줄기.
단전에서 피어오른 공력이 살기를 실은 채 체내 곳곳으로 내달린다.
“새끼들이, 감정 조절이 안 되네. 살수로서 기본이 안 되어 있어.”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벽라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예상대로 살수들은 마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을 최우선으로 노리고 있었다.
살이 따갑도록 느껴지는 살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뭐, 오히려 이게 편하긴 하지.’
남궁천이 양손을 소매에 넣으면서 작은 암기들을 만지작거렸다.
‘한 번 써볼까?’
사방은 안개로 휩싸여 있어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다.
자신이 무슨 무공을 어떤 식으로 쓰는지 상대는 결코 알지 못하리라.
이보다 좋은 조건이 또 있을까?
“자, 불나방들아. 어디 날아올라 보아라!”
쏴아아아아아!
남궁천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소매에서 수백 개의 암기를 쏟아냈다.
정말이지 어디에서 저 많은 암기가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로 허공을 빽빽하게 채웠다.
만천화우.
당가의 절기.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남궁세가 소가주가 사천당가의 절기인 만천화우를 펼칠 줄을!
“크아악!”
“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치솟았다.
동시에 남궁천을 향해 불나방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 새끼 죽엿!”
“하아앗!”
이성을 잃은 살수들이 또 본분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소리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참, 사람 한두 번 죽여본 초보도 아니고.”
흥분해서 저리 소리치며 달려들면 오히려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꼴이 아닌가?
물론 남궁천은 사양하지 않았다.
이들이 이렇게 나오길 오히려 바랐으니까.
차차차앙!
만천화우를 피해서 날아드는 살수들을 향해 남궁천이 마주쳐 갔다.
쉬까앙! 따앙!
푹푹푹!
남궁천은 벽라검과 하나가 되어 검무를 추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더 악착같이 덤벼라!”
남궁천이 칼날 같은 음성으로 외치며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검신을 타고 살을 베는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짜릿한 쾌감!
하나의 죽음은 하나의 삶을 상기시킨다.
누군가를 베어 넘겼다는 것은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래, 전생에는 그런 생각으로 살았다.
오늘 남긴 열 개의 죽음은 열 번의 노력을 뜻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사람을 죽이다 보면 정신이 이상해져 광증이 깊어지기도 했다.
가령 내일은 더 많이 죽여서 더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거나.
열심히 살았다는 척도가 몇 명을 죽였는지로 판단되는 기이한 현상.
그러고 보면 대살성은 만들어진다는 말이 맞을지도.
어쨌거나 뭔가를 베는 감각은 짜릿한 쾌감을 안긴다.
그 쾌감 속에서 남궁천은 홀린 듯이 춤을 추었다.
“흐아!”
체내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입에서 허연 김으로 흩어진다.
남궁천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는 것을.
또한 관자놀이가 툭 불거지고 이마에 핏대가 솟았으며, 살을 베는 감각이 손끝에 전해질 때마다 입매가 치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크하!”
촤아아악!
“끄아악!”
비명이 고막을 파고든다.
짜릿한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마침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앞을 가로막았다.
쉬이이이잇!
몸을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며 검을 뿌렸다.
한데 그림자는 생각보다 빨랐다.
쩌까아앙!
불꽃이 터지면서 벽라검이 튕겨 나갔다.
한 차례 휘청거린 남궁천이 눈을 부릅뜨고는 다시 검을 후려쳤다.
검식과 초식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저 벽라검에 의지를 내맡긴 것처럼 움직였다.
파바밧!
상대가 달아나기 시작하자, 남궁천도 금리도천파의 술법으로 몸을 튕기며 날아갔다.
따다당! 따당!
남궁천은 빛살처럼 달리면서도 그림자와 검을 섞었다.
그림자는 연검을 사용했다.
노련한 움직임으로 보아서는 나이가 꽤 지긋한 상대이리라.
그렇게 얼마나 빠르게 달리며 검을 섞었을까?
어느 순간 반대편에도 다른 그림자가 나타나서 연검을 후려 왔다.
슈슈슈슉!
따라라라라랑!
벽라검과 연검 두 자루가 마구 뒤섞이면서 불꽃을 터뜨렸다.
잠시 후에 두 명의 살수가 더 붙었다.
하나같이 처음 그림자처럼 노련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제는 남궁천이 이들을 쫓는 것인지, 이들이 남궁천을 쫓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우선은 발 닿는 대로 달리며 마구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얼마나 미친 듯이 달렸을까?
파바밧!
휘리리리링!
연검 한 자루가 벽라검을 뱀처럼 휘어 감으면서 날아들었다.
푹!
“큿!”
손등이 찔린 남궁천이 얼른 물러나면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
잠시 의식의 끈을 놓고 있었다.
‘확실히 아직은 마기를 완전하게 제어하진 못한 모양이군.’
모처럼 전생의 기억에 흠뻑 젖어서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둘렀다. 일전에는 이런 일이 있어도 이성을 놓지 않았는데, 이번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렇다고 마기를 아예 다룰 수가 없는 정도는 아니다.
조금 신경 쓴다면 마기를 잘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정신 차리도록 찔러준 걸 고마워해야겠군.’
남궁천이 손등의 피를 혀로 핥…….
‘아냐, 안 되지. 뭔가 광기에 취한 대살성 같잖아.’
얼른 고개를 흔든 남궁천이 벽라검을 고쳐 쥐고는 기수식을 취했다.
기운이 대번 달라졌다.
‘마기를 창벽공에 갈무리해서 운기한다.’
심호흡을 하자 단전에서 묵직한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마기를 품은 창벽의 기운이 곧 혈맥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발끝에 공력이 다다른 순간, 남궁천이 진각을 밟았다.
꽈앙!
동시에 그의 신형이 튕겨 나갔다.
슈우우우웃!
남궁천을 에워싼 네 명도 동시에 날아들었다.
휘리리리링!
따다다다다다앙!
벽라검과 연검이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다음 순간 약속이나 한 듯 네 그림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두며 멀어졌다.
곧이어 허공을 가득 메우며 쏟아져 내리는 누런 분말!
촤아아아아!
‘황무칠보독(黃霧七步毒)……!’
흡입하는 순간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죽어버린다는 맹독 중의 맹독이 아닌가?
남궁천이 얼른 숨을 참았지만, 이미 황무칠보독을 흡입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순 남궁천의 낯빛이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누렇게 뜨기 시작했다.
“클클클. 제아무리 날고 기는 강호신룡도 황무칠보독에는 어쩔 수 없지.”
그림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남궁천이 마른기침을 토해내고는 입매를 비틀었다.
“나 지금 당가에서 오는 길이야. 이깟 황무칠보독에 당할 것 같아?”
“쯧…… 황무칠보독은 피독주가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쓰는 것은 해독제도 우리에게만 있지.”
“아니, 그게 아니라…….”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느닷없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자, 하나…… 둘…… 셋…….”
“…….”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일곱 발자국 넘었네?”
“……!”
당황한 그림자들을 향해 남궁천이 다시 한번 씨익 웃었다.
“당가에서 그러더라고. 내가 만독불침지체가 되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