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가야 할 두 가지 이유
“그런데 왜 그곳에 살곡이 있는 거죠?”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당예설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까진 몰라. 천뇌당에서 파악한 정보니까.”
“흐음. 천뇌당에서 우연히 발견한 건 아닐 테고, 작정하고 찾아낸 게 아닐까 싶네요.”
“어째서?”
“맹주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넌 맹주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야.”
“보통 그건 사람이 좋아 보일 때고요. 딱 봐도 나쁜 놈은 굳이 열 길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요? 깊이 들어갈수록 더러울 게 뻔한데. 피해야죠.”
당예설이 피식 웃고는 물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맹주가 살곡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본거지까지 찾아낸 거다?”
“네. 맹주는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만 이용하니까요. 자기 예측을 벗어나는 걸 굉장히 싫어하죠.”
“과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디로 튈지 모를 네가 제일 싫겠네.”
“분명 그럴 거예요.”
남궁천이 씨익 웃어 보였다.
“어쨌거나 살곡이 왜 거기에 있는지는 나도 몰라. 신병이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머문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곳으로 터를 잡은 것인지. 분명한 건 그곳으로 가는 건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다는 거지.”
“그래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죠.”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구나. 기어이 가겠다는 거니?”
“갑니다. 가야 할 이유가 두 가지나 생겼으니까요. 이미 살곡은 지금 절 노리고 있어요. 살곡 특성상 제가 죽을 때까지 거머리처럼 달라붙겠죠. 그럴 바엔 역시 먼저 치는 게 좋죠.”
“그것도 그렇구나.”
당예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적랑단원 스무 명을 데려가도록 해.”
당예설이 데려온 적랑단원은 모두 그녀의 뜻에 따라 당가에 남기로 한 상황이었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사양하고 싶지만 어떻게든 같이 보내려고 하겠죠?”
“똑똑하네. 사실 신병이기가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잖아?”
그렇다.
당예설의 의중은 신병이기에 있었다.
이미 남궁가와 손을 잡기로 한 이상 최대한 협력하여 이득을 취할 생각이었다.
“신병이기가 단 한 자루만 있을 수도 있죠.”
“그럼 깨끗하게 포기할게.”
“알겠습니다. 대신 위험은 각자가 감수하는 걸로.”
“물론이지. 흑무련과 전투에서 살아남은 단원들이야. 적어도 짐이 되진 않을 거야.”
대략의 이야기가 정리되자 당고륜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기가 맹으로 갔으니 지금쯤 맹주가 이를 갈고 있을 거다. 그 한심한 녀석이 어쩌면 맹주의 인질이 될 지도 모를 일이고.”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맹주도 우기를 어떻게 하진 못할 거예요.”
“그래, 지난 일로 네 동생을 너무 나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당고륜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 이후로 부쩍 힘을 잃은 표정이었다.
한때는 추상같은 위엄을 지녔던 아버지가 이렇게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니 당예설도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 * *
날이 밝고 남궁천과 남궁검은 떠날 채비를 갖췄다. 두 사람과 함께 떠날 적랑단원 정예 스무 명도 장원을 나섰다.
나머지 서른 명은 여전히 당가에 남아서 당예설을 보좌하기로 했다.
“이제 본 가와 당가는 한배를 탔소. 여러 역경이 있겠지만 버티고 이겨낸다면 분명 원하는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저도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생각은 품지 않을 것입니다. 강호의 생리는 저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요. 모쪼록 천중산에서 원하는 걸 얻으시길 바랍니다.”
남궁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중산은 바로 장보도의 위치였다.
즉, 살곡의 본거지가 있는 곳.
한차례 작별 인사가 끝나고 나서 남궁천과 남궁검은 마차에 올랐다.
당가에서 배웅을 나온 이들만 일백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렇게 사천 성도를 벗어난 남궁천 일행은 부지런히 북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남궁천은 마차에서 쉬지 않고 운기조식을 했다.
그간 아무리 잡다한 무공을 익혔다지만, 마기를 품은 건 처음이었다.
때문에 습관처럼 운기조식을 해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운기조식이 끝나면 잠시 남궁검과 담소를 나누다가 잠을 청하고, 다시 눈을 뜨면 운기조식하는 것을 반복했다.
언제부터인지 남궁검과 함께 둘만 남은 공간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이제 마기도 꽤나 익숙해졌다.
물론 갑자기 생긴 강맹한 기운이 완전히 제 몸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다루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다시 한번 창벽공의 포용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좀 어떠냐?”
“꽤 좋아졌습니다.”
남궁검의 물음에 남궁천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마차는 이제 섬서로 들어서서 동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어느 산기슭을 지나고 있었는데, 창밖으로는 숲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었다.
“조용하네요.”
“사천을 벗어나서도 움직임이 없구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남궁검의 대답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운기조식하는 데 신경 쓰이진 않더냐?”
“어제까진 괜찮았는데, 이것들이 살기가 점점 짙어져서 오늘부턴 좀 거슬리더라고요.”
“하면 어찌하려고?”
“뭐, 서두를 것 없으니까 겁 좀 주려고요.”
“알겠다. 나는 두고만 보마.”
“예, 할아버지. 잠시 다녀올게요.”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이 마차 문을 열고는 몸을 훌쩍 날려 지붕 위로 올라섰다.
움직이는 마차 위로 올라서니 맞바람이 시원하게 부딪쳐왔다.
“야 이 새끼들아!”
순간 공력을 실은 목소리가 숲을 뒤흔들자 인근에 있던 산새들이 후드득 날아올랐다.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지켜보려거든 살기를 보이질 말던가? 신경 건드려서 지치게 만들 생각이라면 잘못짚 었다. 괜히 피 보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물러서!”
“…….”
숲은 여전히 고요하다.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입매를 치켜올렸다.
“그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남궁천이 품에서 다섯 자루의 암기를 꺼내 양손에 나눠 쥐었다.
사천당가에서 받아온 암기였다.
“뒈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라고.”
말을 마친 남궁천이 순간 양손을 뿌렸다.
쒸쒸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다섯 자루의 암기가 쾌속하게 날아갔다.
잠시 후 암기가 날아간 방향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크억!”
“억!”
곧이어 묵직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
다음 순간 숲속에서 흑의 경장에 복면을 쓴 살수들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슈슈슈슈슉!
그러자 마차를 호위하듯 이동하던 적랑단원 스무 명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며 경계했다.
차차차차앙!
남궁천이 살수들을 둘러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불나방들 나왔냐? 뭔 살수 새끼들이 이렇게 훤히 몸을 다 드러내는 거야?”
남궁천이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리자 살수들 사이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너는 죽는다.”
“그래, 인간은 누구나 죽지. 왜 다 아는 걸 너만 아는 척 씨불여 대고 지랄이야?”
모처럼 도발을 당하니 전생의 말버릇이 나온다.
남궁천이 살기 서린 눈으로 살수들을 한차례 훑었다.
어지간한 자들은 자신의 이런 시선을 받으면 위축되게 마련인데, 이 살인마들은 감정도 없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저 제 죽을 줄 모르고 눈만 사납게 치뜬 맹수 새끼들 같다.
“이런 반응 좋아. 오랜만이군. 자, 그럼 한바탕 놀아볼까?”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기수식을 취하자, 살수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천마신단을 흡수하고 첫 실전인 만큼 묘한 흥분감이 전신을 감쌌다. 서서히 발끝에 공력을 집중할 때였다.
“오늘은 날이 아니다.”
살수 중 우두머리가 나직이 뇌까리더니 스르르 숲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마치 그걸 신호로 여긴 듯 다른 살수들도 숲의 그림자 속으로 묻혀갔다. 이윽고 기척은커녕 살기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처럼 몸을 풀 생각에 흥분하던 남궁천은 맥이 빠져 버렸다.
“에이, 기분 잡쳤네.”
남궁천이 투덜거리고는 마차에 다시 오르자, 남궁검이 수염을 쓸고는 말했다.
“역시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우리 목적지를.”
“그러게요. 그럼 뭐가 됐든 저놈들이 신병이기를 지키고 있는 셈이네요.”
“어차피 뿌리를 뽑아야 끝날 싸움이었다. 차라리 잘된 게지.”
“옳은 말씀입니다.”
남궁천이 대답을 하고는 다시 천천히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집중했다.
* * *
깎아지른 협곡 사이에 암벽을 뚫어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전각 한 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전각 안쪽에는 시커먼 장삼을 입은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상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가 바로 살곡주였다.
곡주는 백돌을 두면서 중얼거렸다.
“결국 이곳으로 치고 들어오는군.”
곡주의 의식은 이제 현재를 거슬러 올라가서 아득한 과거의 어느 날에 다다랐다.
그날 맞은편에 앉아서 백돌을 쥐고 바둑을 두던 사람은 바로 그의 벗이자, 마교 교주 여소천이었다.
그날 곡주는 여소천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바둑이나 두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테고?”
“이곳이 어떤가?”
여소천이 음침한 협곡을 가리키며 물었을 때, 당시의 곡주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협곡에 음기가 가득하고 능선과 바위 배치가 묘해서 은둔하기에는 딱 좋군. 왜? 숨으려고? 좀 지쳤나? 하긴, 요즘 무림맹의 기세가 좀 거세긴 하지.”
당시 마교는 거의 패망을 앞둔 상황이었다.
무림맹의 최고 전성기.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여소천도 꽤나 지쳐 보이긴 했다.
여소천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숨을 건 아니고.”
“하면?”
“이미 숨겼지.”
“그런데 그걸 왜 내게 알려주는 건가?”
“여기를 살곡 본거지로 사용하게.”
“그래서 자네 보물들을 지키라고?”
“자네는 은둔하기 좋은 장소에서 안전하게 살수 단체를 이끌면 되고, 나는 보물들을 지키기에 좋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아서라, 마교랑 엮이는 게 제일 골치 아픈 일이지.”
“하하하하!”
“뭐가 웃겨?”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마교 교주와 바둑을 두고 있으니 웃기지 않은가?”
“끄응. 내가 만약 자네 물건을 독차지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여소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을 걸세. 이미 내가 손을 써두었으니.”
“손을 써뒀다고?”
“그렇네. 자네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내 물건에 손을 댈 수 없으니 꿈 깨시게.”
“하긴. 자네가 어떤 인간인데 그리 허술하게 둘까? 아무튼 그럼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네와 나.”
“둘뿐?”
“그렇네. 공사를 한 자들은 다 죽였네.”
“하면 자네가 죽고 나면 그 보물들은 영원히 묻히겠군?”
“글쎄. 단초는 남겨둘 테니 자격이 있는 자라면 그 보물들을 차지할 수 있을 테지.”
“보물들을 가질 자격이 있는 자라.”
“아니지. 천하를 굽어볼 자격이 있는 자.”
“…….”
교주 여소천이 씨익 웃으며 백돌을 두었다.
“자, 자네가 둘 차례일세.”
잠시의 상념에서 빠져나온 곡주는 손으로 얼굴을 한차례 쓸었다.
당시에는 없던 주름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걸린다.
“이렇게 치고 온단 말이지. 이젠 정말 내 차례로군. 모두 불러들이고, 일급 대응 단계로 대비하라.”
그의 말에 허공에서 미약한 기척이 스르르 지워졌다.
홀로 남은 곡주의 눈매가 비수처럼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