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75화 (274/508)

275. 가야 할 두 가지 이유

콰아앙!

급기야 집무 책상이 부서지고 말았다.

정확히 절반이 갈라져서 가운데가 움푹 주저앉은 책상을 보며 총관이 긴 숨을 가느다랗게 내쉬었다.

언젠간 저 책상이 부서질 날이 올 줄 알았다.

맹주는 감정을 잘 절제하는 편이었지만, 최근에는 정말이지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흑무련은 북쪽을 다 장악해 버려서 강호가 절반으로 쪼개졌고, 구파일방은 제멋대로 굴면서 협조하지 않는다.

거기에 이번엔 당가에서도 일이 틀어졌으니, 맹주로서도 많이 참은 셈이다.

묵천악이 부서진 책상을 보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찌나 얼굴에 힘을 주는지 태양혈이 툭 불거졌다.

총관이 다시 한숨을 가느다랗게 내쉬고는 옆을 힐끔 보았다.

‘당가도 참 골치 썩겠군.’

자식 하나 있는 것이 저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오늘 맹주를 대노하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당우기였다.

원래 당우기는 마신단을 가지고 진작 도착했어야 했다.

한데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도착한 당우기는 빈손이었고, 오히려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전해왔다.

바로 당가가 맹주를 배신하고 남궁가와 손을 잡았다는 것.

당 가주는 당우기를 붙잡아두려고 했지만, 소가주 자리를 잃은 그가 반발심을 품고 몰래 집을 빠져나와 맹으로 달려온 것이다.

눈치 없는 당우기가 맹주의 분노를 공감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맹주님! 이건 명백한 배신입니다! 아버지는 그 썩어빠진 남궁가와 손을 잡으려고 저를 소가주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했습니다! 마신단은 어디로 빼돌렸는지 제게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궁가에 호의적인 누님을 소가주로 임명했지요! 어찌 이런 법이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제 아버지지만 저는 신의를 저버린 아버지의 행동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어서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당우기의 두 눈에는 핏발까지 서 있었다.

그를 본 총관이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한심한…… 제 아비를 저버리고 달려온 게 무슨 자랑이라고. 임무에 실패한 것만으로 치도곤을 당해도 모자랄 판에.’

물론 맹주는 당우기를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이번 임무에서 실패한 것은 엄중히 질책하겠지만, 지금 당우기는 맹주를 철저하게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날이 무딘 칼도 때론 쓰일 때가 있는 법. 이용할 도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당예설이 적랑단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었지?”

맹주의 물음에 총관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예, 그저께 받은 전서에 그리 적혀 있었습니다. 흑무련을 막지 못하고, 적랑단원 다수를 잃은 책임을 지고 단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당우기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 도착한 서신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예설의 이런 결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예설은 야망이 있는 무인이었으니까.

가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그녀는 무림맹에서 최대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매사 최선을 다해왔다.

해서 어린 나이에 적랑단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비록 이번엔 흑무련에게 대패했지만, 그간의 공로가 있었기에 큰 문책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데 갑자기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니 이상하게 여긴 참이었다.

“클클클. 아주 약아빠진 여우였군.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어.”

까드득.

이가 갈린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남궁천은 진천랑보다 더 까다롭다.

진천랑은 공공의 적이었다.

강호의 모든 무인이 노리는 적.

하지만 남궁천은 벌써 많은 세력을 휘어 감았다. 거기에 여론을 다룰 줄도 안다.

마치 진천랑이 살아 돌아와서 자신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다시 덤비는 것 같지 않은가?

“남궁천…… 남궁천…… 남궁천……!”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한데 저 멍청한 녀석은 그 단순한 임무도 해내지 못하고선 뭘 잘했다고 여기서 큰소리인가?

“당우기.”

“예, 맹주님!”

당우기가 눈치 없이 씩씩거리며 대꾸한다.

맹주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초리로 당우기를 응시했다.

“내가 맡긴 임무가 어려운 것이었나?”

“아……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 한데 그 단순한 임무조차 하지 못한다면 내가 앞으로 자네를 어찌 신뢰할까? 자네도 자네 아비와 한뜻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찌 믿을까?”

쿠웅!

순간 당우기가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포권하며 소리쳤다.

“제 목숨을 걸고 하늘에 맹세하고, 신령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결코 아버지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절 소가주 자리에서 내쫓으셨고, 제 누이는 임무를 방해한 것도 모자라 저에게 암기를 날리고, 독까지 사용했습니다! 맹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건 저의 부족함이지만, 마음만은 결코 맹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이상한 걸세. 자네 집안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렸는데, 어째서 자네는 내게 달려온 건가? 자네가 내 입장이라면 선뜻 이해가 될까?”

맹주의 칼날 같은 시선을 받으면서 당우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의심을 품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제가 드린 말씀은 모두 진실…….”

“이보게.”

“예, 맹주님.”

“생각보다 말귀가 어둡군.”

“죄송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지. 다시 묻겠네. 나는 자네가 가족마저 등지고 이곳에 온 이유를 묻는 것이야.”

맹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당우기가 고개를 들어 그런 맹주의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참이나 얽히던 끝에 당우기가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저는 제 그릇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맹에서 큰 역할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신…….”

“대신?”

쿠웅!

순간 당우기가 다시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다.

“절 당 가주로 만들어주십시오!”

“…….”

당우기의 외침을 끝으로 맹주실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하나 놀란 이는 아무도 없다.

맹주 묵천악은 희미하게 입매를 치켜 올렸고, 총관은 맹주가 사람을 다루는 솜씨에 내심 경탄하고 있었다.

당우기는 알고 있을까?

지금 자신의 행동이 사천당가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는 것을.

만약 당우기의 이런 모습을 당고륜이 보았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리라.

가문의 중대사를 맹주에게 부탁하는 꼴이라니!

묵천악이 냉소를 거두고는 당우기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게. 내 이제야 자네의 진심을 알겠군.”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님. 그리고 죄송합니다.”

“아닐세. 임무에 실패한 자를 모두 문책했다면 아마 지금쯤 무림맹에는 사람이 남아나지 않았을 테지.”

“그렇군요.”

그제야 당우기가 속없이 웃는다.

‘호부에 견자가 없다더니. 예외도 있는 법이군. 하긴 그게 세상 아니겠는가?’

묵천악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내 언젠가는 자네를 중히 쓸 것일세. 그때까진 청랑단으로 들어가서 지내도록 하게.”

“청랑단……! 학관이 아니고요?”

“그래. 내가 청랑단주에게 말해두겠네. 자네 같은 인재를 학관에 계속 남겨둘 수는 없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우기가 거듭 감사를 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 저를 내치신 걸 후회하실 겁니다! 아버지는 누나를 내치고, 절 받아들이셨어야죠!’

“그럼 그만 가보게.”

“예, 맹주님!”

당우기가 씩씩하게 걸어가고 나자, 맹주가 예의 그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총관.”

“예, 맹주님.”

“저 얼빠진 녀석을 잘 지켜보게.”

“분부 받들겠습니다.”

“살곡은 어찌 되었나?”

“아직 남궁 가주와 소가주가 사천당가에서 이동하지 않아서 대기 중인 듯합니다.”

“흐음.”

잠시 침음을 흘린 묵천악이 창가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당가가 본 맹에게서 등을 돌렸네. 이건 명백한 반기지. 이참에 당가를 아예 묻어 버리는 건 어떻겠나?”

“어떤 방법으로…….”

“천독노와 손을 잡고 마신단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남궁가는 현재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니 엮기가 어려울 듯하고, 적랑단주가 마교와 손을 잡으면서 일부러 본 맹에 혼란을 가하기 위해 흑무련에 패했다는 설정이 어떻겠나?”

그야말로 악의로 가득한 내용이다.

총관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생각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합니다.”

“어째서?”

“당가의 지지도가 아직은 꽤 높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지지도가 높은 남궁가를 엮어도 문제고, 엮지 않아도 자연스럽지 않아서 문제가 됩니다. 아마 맹에서도 세력이 둘로 쪼개질 위험이 있어 보입니다.”

총관의 직언에 묵천악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건가? 우선은 당가를 지켜봐야겠군.”

“급한 건 오히려 남궁가 쪽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내 잠시 당 가주의 배신에 흥분한 모양일세. 살곡이 제 역할을 해줘야 할 텐데. 우선은 지켜볼 수밖에.”

“곧 남궁가도 길을 나설 테니 지켜보시면 또 길이 보이겠지요.”

“부디 잘 해결해 주면 좋겠군.”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마음 한편에서 슬금슬금 치미는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남궁천은 그에게 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자칫 되레 찔려 버리고 마는.

* * *

음기가 가득 찬 동굴 안에 하얀 고양이 가면을 쓴 백묘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마침 동굴 벽에서 시커먼 피풍의를 두른 늙은 사내가 귀신처럼 스르르 빠져나왔다.

백묘가 고양이 가면을 벗으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귀영(鬼影) 장로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귀영 장로라 불린 사내가 칼로 쇠를 긁는 듯 탁한 음성을 흘렸다.

“맹에서는 움직임이 있었나?”

“살곡에 의뢰를 한 것 같았어요.”

“살곡에?”

귀영 장로가 뜻밖이라는 듯 흰자위로 가득한 눈을 치떴다.

백묘가 생긋 웃었다.

고양이 가면을 벗었지만, 백묘는 여전히 하얀 고양이처럼 예쁜 얼굴이었다. 다만 입술이 유난히 붉어서 어딘지 섬뜩한 느낌을 풍기기도 했다.

“맹주가 작정을 한 것이로군.”

“우선은 지켜보는 게 좋겠죠?”

“그래야지. 다만 사천당가가 정말 마신단을 제조한 게 사실이라면 당가도 지켜볼 일이겠어.”

“조만간 남궁가가 이동할 듯해요. 본 가로 돌아가든 어디로든 가겠죠. 그때 남궁가도 함께 지켜봐야겠어요. 애초에 남궁가에서 마신단 제조를 의뢰했으니 그쪽에서 가져갈 가능성도 크다고 보거든요.”

“일리가 있다. 다만 항시 위치만 확인하도록 하고, 전면에 나서지 않도록. 본 교가 재기하기 전에 남궁가에 잃은 것이 많다. 아직은 조금 더 웅크려야 할 때. 흑무련과 맹주도 함께 지켜보면서 때를 기다리는 게 좋겠다.”

“네, 바짝 웅크릴수록 높이 뛰어오를 테니까요.”

백묘가 어딘지 섬뜩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 * *

“지금 여길 가겠다고?”

당예설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남궁천이 남궁검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요? 안 될 이유라도 있어요?”

“당연히 있지.”

당예설이 망설임 없이 대꾸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당고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데 그러느냐?”

당고륜의 시선이 종이에 그려진 지도로 향했다.

남궁천과 남궁검의 다음 행선지였다.

마단곡에서 가져온 상자에 들어 있던 지도.

바로 신병이기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가면 안 될 이유가 두 가지.”

“두 가지나?”

“첫째, 이제 이곳은 흑무련의 영역이 되어 버렸어. 북쪽이니까 백도 무인이라면 이를 갈 흑도인들이 바글거린다는 거지.”

“뭐,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는…….”

“둘째. 이게 심각한 부분이야.”

“뭐죠?”

남궁천의 물음에 당예설이 또박또박 대꾸했다.

“이건 사실 맹의 기밀이지만…… 여긴 살곡의 본거지야.”

“……!”

순간 남궁천과 남궁검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살곡의 본거지라니.

당가에 올 때까지 계속 살수를 보내던 그놈들이 아닌가?

살곡의 본거지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당예설이 말을 이었다.

“이제 가면 안 되는 이유를 알겠지? 다른 곳도 아닌 살곡이야. 맹에서도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된 정보지.”

“허…….”

남궁검이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그가 남궁천을 스윽 돌아보았다.

“살곡이라니. 이거 어쩌면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허허허!”

“하하하!”

남궁천과 남궁검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예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웃는 거야? 도대체?’

남궁천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아오, 이것들 안 그래도 짜증 제대로였는데. 잘 됐네요. 가야 할 이유가 이제 두 가지네요. 하하핫!”

“그러게 말이다.”

남궁검이 수염을 쓸며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당예설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아니, 지금 내 말을 듣긴 한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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