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기 싸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당고륜이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거나 남궁천은 지금 마신단을 무사히 소화하고 눈앞에 서 있었다.
죽일 작정으로 암기까지 날린 마당이니 뭐라도 한마디 해야 하지 않겠나?
깊은숨을 내쉰 당고륜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위험할 뻔했네.”
“그러게요. 굉장했네요. 장로님들까지 다들 나타나셔서는.”
“자네가 기운을 흡수하지 못하는 줄 알았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에이, 설마 제 내공이 뭐 다 녹아 버리기라도 했겠어요? 마신단이 용공단도 아닌데. 마신단의 기운이 세긴 했지만 잘 극복한 것 같습니다.”
“……천만다행이군.”
당고륜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역시 알고 있었어……!’
일부러 용공단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이미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당예설이 남궁천과 한배를 탄 상황이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리라.
‘식객과 딸에게 놀아난 꼴이 되고 말았구나.’
딸의 말대로 이건 무인으로서의 패배나 다름없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남궁천이 사건의 모든 내막을 알고 있다면 이대로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그렇다고 먼저 인정할 필요는 없다. 혹여나 기우일 수도 있으니.
당고륜이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지금은 완전히 기운을 소화한 것인가?”
“음…… 완전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렵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정도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자, 당고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럼 고생했는데 편히 쉬시게. 전각이 부서진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그거야 당연한 거지만.”
당연하긴 뭐가 당연해! 네가 부쉈는데!
이마에 핏대가 서는 걸 참고 있는데, 남궁천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들었다.
“잠깐만요.”
“……뭔가?”
당고륜이 천천히 돌아섰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뭐가 그리 급하세요? 모처럼 본 가와 당가가 힘을 합해서 큰일을 해냈는데 좀 즐겨야죠.”
“뭘 어찌 즐기자는 건가?”
“아니, 뭐 축하 연회도 하고. 남은 재료들은 당가가 소유하게 됐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지도 이야기하고, 두 가문의 장래에 대해서도 고심하는 뭐 그런 시간들 좋잖아요?”
이게 지금 날 놀리나?
당고륜이 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곧 침착하게 대꾸했다.
“많이 긴장했더니 조금 피곤하군. 그런 건 다음에 하세.”
“그래도 미룰 게 있고, 미루지 않을게 있는 법인데…….”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잖은가?”
“중요하죠.”
“도대체……!”
“당가가 앞으로 무림맹과 갈라설 것을 생각한다면 아주 중요한 문제 아닌가요?”
남궁천이 가볍게 던진 말에 당고륜은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뻣뻣한 자세로 돌아섰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당가가 앞으로 맹과 갈라설 테니 본 가와 협력하는 게 중요한 문제라고 말씀드렸죠.”
“어째서 본 가가 맹과 갈라설 것이라고 생각하나?”
“에이, 제가 좀 어려도 바보는 아니에요. 맹주님이 이곳에 왔다는 건 뻔하잖아요.”
당고륜의 눈썹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역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은 그만두자는 건가?’
당고륜이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자, 남궁천이 빙그레 웃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조건이라? 대체 무슨 조건 말인가?”
“당가가 본 가와 손을 잡기 위한 조건입니다.”
“허!”
당고륜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감히 다 기울어진 가문이 당가와 손을 붙잡으려 하면서 되레 조건을 붙여와?
“아무래도 자네가 이제 막 마신단을 복용해서 정신이…….”
“소가주 자리를 여기 계신 적랑단주님께 주시죠?”
“……뭣이?”
“어차피 그 돼먹지도 못한 망나니 녀석은 가망이 없어요. 가문을 위해서라도 그 호구 같은 당우기보다는 여기 계신 적랑단주님이 제격입니다. 뭐, 적랑단주님을 맹의 요직에 머물게 하고 차차 맹을 장악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남궁천이 주변을 휘이 둘러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보다시피 이 지경이 됐으니까요. 마신단을 놓친 맹주가 당가를 곱게 볼 리는 없잖아요?”
당고륜이 입만 딱 벌리고 있자, 이번엔 지켜만 보던 당우덕이 나섰다.
“남궁 소협!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인가! 본 가의 문제를 외부인인 자네가 어찌 왈가왈부한단 말인가! 본 가와 손을 잡고 싶다면 오히려 정중히 요구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당 가주님은 지금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아실 겁니다.”
남궁천이 말을 끊으면서 들어오자, 당고륜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라?”
“마신단을 만들기 위해 무림공적과 손을 잡은 걸 어찌 수습하실 겁니까? 천독노와 손잡은 사천당가라. 천하가 비웃지 않을까요?”
“허! 그건 자네가……!”
“제가 뭘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증거 있습니까? 뭐, 좋아요. 다 맞다고 치죠. 어차피 본 가는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가는? 본 가처럼 강호의 외면을 받고도 잘 버틸 수 있을까요?”
“……!”
“거기에 가주님은 지금 본 가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마신단을 빼돌리지도 않으셨잖아요. 아마 맹주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크게 노하실 텐데.”
남궁천이 능글맞게 웃는다.
당고륜이 마신단을 빼돌리려 했다는 걸 다 알면서도 굳이 의리를 지키려고 했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건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는 신호였다.
“끄음.”
당고륜이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새삼 남궁천이 무서운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세워둔 것인가?
‘오히려 맹주의 선택이 악수가 됐어.’
맹주는 일부러 남궁천과 남궁검이 보는 앞에서 방문을 했다.
이 두 사람에게 압박을 주기 위해서였으리라.
하나 남궁천은 맹주의 생각보다 훨씬 영악한 구석이 있었다.
압박은커녕 맹주가 깔아놓은 판을 제대로 이용해서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게다가…….
‘설아까지 이용해서…….’
당고륜의 시선이 당예설에게 향했다. 그러다가 그는 뭔가를 깨닫고 흠칫 떨었다.
‘그런가…….’
지금 당예설의 표정.
결코 이용당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뭔가를 주도적으로 해낸 무인의 표정이다.
‘거래가 된 거로구나.’
이제야 이해가 된다.
당예설은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섭섭함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딸이 굳이 소가주에게 집착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원망도 절반쯤 섞인 것이리라.
그 나머지 절반은…….
‘가문을 위해서인가?’
확실히 지금 당예설의 눈빛은 원망이나 증오의 감정을 담은 게 아니다. 모종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그 먼 길을 돌아온 것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허탈감이 더욱 크게 몰려왔다.
막상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자신의 아둔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소가주에 관한 것만 해도 그렇다.
관례에 따른다고 굳이 아들을 소가주로 만들었다.
하나 그에 따른 찬반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보수적인 가신들은 관례를 따라야 한다고 했고, 진취적인 가신들은 능력에 따라 임명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 변화는 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었기에 관례를 따르기로 했다.
제 누이에 비해 아쉬울 뿐, 당우기의 재능 자체도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었기에.
하지만 공정하지 못한 이 과정으로 비뚤어질 아이들의 입장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우기는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갔고, 예설은 자신에 대한 원망을 산처럼 쌓아갔으니까.
당고륜이 복잡한 생각에 빠진 사이, 남궁천이 그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선택하시죠? 본 가와 함께 변화를 도모할 것인지, 아니면 썩은 동아줄을 잡고 맹주와 함께할 것인지.”
당고륜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장로들도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칫 무림맹을 상대로 반역을 꾀한다는 오해를 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
하나 남궁천의 말대로 선택지가 없다. 외통수에 제대로 몰린 상황.
“가주…….”
당우덕이 당고륜을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도 당고륜은 한참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궁천을 보았다.
“조건은 그게 전부인가?”
“아,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뭔가?”
“추향응(追香鷹)도 한 마리 내어주시죠.”
“추향응?”
추향응은 당가에서 키우는 영물 중 하나인데, 중원 어디에서든 만리향을 쫓아서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푸른 매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예, 그거면 됩니다. 어렵지 않죠?”
“흐음.”
확실히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당예설을 소가주로 임명하라는 것도 당가로선 나쁠 게 없다. 오히려 은근히 당예설을 지지하던 세력들은 이 기회에 관례를 깰 좋은 명분이 생긴 셈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당우덕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당우덕이 넌지시 말했다.
“가주.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나쁘진 않은 제안 같소.”
당고륜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하지만 신중을 기해서 나쁠 건 없는 법.
“본 가가 자네와 함께 걸어갈 길이 가시밭길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증명하겠나?”
“에이, 하루 이틀 살아보신 분도 아니면서 왜 이러실까? 그걸 제가 어찌 증명하겠어요? 당연히 쉬운 길이 아니겠죠. 자갈밭일 수도 있고, 진흙탕 길일 수도 있습니다. 가시밭길일 수도 있고요. 뭐든 달콤한 열매는 자고로 인적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법이죠. 그렇다면 무인으로서 오히려 고난의 길을 반겨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교묘한 대답에 당고륜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런 대답을 이제 약관을 채운 아이가 할 만한 것인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처럼 말하지 않는가?
사실 앞서 던진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남궁천의 말대로 더 이상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남궁천과 당고륜의 시선이 허공에서 한참이나 얽혔다.
마침내 당고륜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예설을 돌아보았다.
“이 싸움에서…… 네가 이겼다.”
“아버지가 그랬듯 저 또한 가문을 위해서예요.”
당예설의 대답에 당고륜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네가 소가주가 되면 가문이 흥한다는 뜻이냐?”
“우기가 되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겠죠.”
“네 동생을 그리 믿지 못하느냐?”
“이성적으로 판단한 것일 뿐이에요. 무림세가를 이끄는 것은 가족의 정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이성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당고륜이 문득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딸은 똑똑하다.
이제는 승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
무인으로서도, 아비로서도 완패다.
결심이 선 당고륜이 장로들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오늘부로 우기를 소가주에서 폐하고, 당예설을 소가주로 임명하겠소.”
장로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관례를 깬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남궁천의 요구로 소가주가 바뀌었다는 것이 못내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당가를 위해선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리라.
대략의 상황이 정리되자 당예설이 한 걸음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본 가가 강호제일의 가문이 되도록 항시 앞장서겠습니다.”
마치 남궁천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장로들에겐 작게나마 위안이 되긴 했다.
당예설은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침내…… 쟁취했구나.’
적랑단주에 올랐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그녀로서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자리에 오른 셈이었으니까.
누군가는 태어나면서 저절로 주어지는 자리지만, 그녀만큼은 절대로 불가능했을 그 자리에 오른 순간이었다.
다만 이번 결정은 단순히 소가주가 바뀌는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오늘부로 사천당가는 무림맹과 은근한 대립 구도를 이루게 되리라.
당고륜이 남궁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자네 계획은 무엇인가?”